국내여행

적장의 편지(남한산성9부)

훼브스 2020. 8. 1. 14:05


벽암대사 각성(覺性)영정

 

 

청나라 침입당시 두 장수

 

 

 

배우가 분한 용골대 
마부대 1636년 병자호란때 조선에 침입한 장수로서청의 전신인 후금때 부터 사신으로 후금의 친서를 가지고조선에 여러번 왕래했던인물 병자호란 때는 홍타이지의 막료로서 행패가심하였다 

 

 

 

적장(敵將)의 편지<광주·남한산성>

 

『여보, 아마 우리에게도 기다리던 아기가 생기려나 봐요.』
『그렇게 되면 오죽이나 좋겠소. 한데 부인에게 무슨 기미라도…』
『간밤 꿈에 웬 스님이 제게 거울을 주시면서 잘 닦아 지니라고 하시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태몽인 것 같아요.』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기를 갖지 못해 영약이란 영약은 다 먹어 보고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리던 충남 보은의 김진사댁 부인 박씨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한가위 달빛이 휘영청 밝은 밤, 김진사댁에서는 낭랑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는 자라면서 남달리 총명하여 다섯 살 되던 해, 벌써 천자문을 마쳤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어느 여름날. 돌이는 서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뒹굴기 시작했다.

 

나이 많은 서당 학우들이 업고 집에 이르자 놀란 김진사는 용하다는 의원을 부르고 약을 썼으나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이 병은 더 심해졌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수리 수리 마하수리….』대문 밖에서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렸다. 시주 쌀을 갖고 나온 김진사 부인은 스님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꿈에 거울을 주었던 그 스님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묘한 인연이라 생각한 부인은 스님께 돌이 이야기를 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스님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러잖아도 소승이 돌이를 데리러 왔습니다. 절에 가면 곧 건강을 되찾을 것이며 장차 이 나라의 훌륭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김진사 내외는 귀여운 아들을 절로 보낼 수 없어 선뜻 대답하지 못했으나 태몽을 생각하고는 하는 수 없이 스님 뜻에 따랐다.

 

스님 등에 업혀 절에 온 돌이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 건강해졌다. 낮에는 활쏘기 등 무예를 익히고 밤에는 불경을 읽으며 9세가 되던 해. 김진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고향에 돌아가 상을 치르고 돌아온 돌이는 부친을 여읜 슬픔과 함께 사람의 나고 죽는 문제로 번민했다. 스님께 여쭈어 봐도 「아직 어리다」며 좀체로 일러주시려 하지 않았다.

 

사미의 엄한 계율 속에 정진하던 각성은 14세 되던 해 부휴 스님을 따라 속리산, 금강산, 덕유산 등으로 다니며 경전공부 외에 무술, 서예 등을 익혔다. 이렇게 10년이 지나자 부휴 스님은 각성을 불렀다.『이제 네 공부가 어지간하니 하산하여 중생을 구제하도록 하라.』벽암이란 호를 받은 각성 스님은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 묘에 성묘하고는 한양으로 발길을 옮겼다. 때는 조선조 광해군 시절. 조정에서는 무과 과거 시험을 치르는 방을 내걸었다. 각성 스님은 시험에 응시했다.

 

『김각성 나오시오.』각성 스님과 마주한 상대는 호랑이 가죽옷을 입고 머리는 풀어 흰수건 으로질끈 동여맨 것이 마치 짐승 같았다. 두 사람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등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 회를 거듭하던 중 짐승 같은 사나이의 목검이 부러졌다. 각성 스님은 절호의 기회였으나 상대방이 새 칼을 들고 다시 대적하도록 잠시 기다렸다.

 

그때 성난 사나이는 씩씩거리며 규정에 없는 진짜 칼을 원했다. 이를 지켜보던 난폭한 광해군은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진짜 칼을 주도록 어명을 내렸다. 다시 징소리가 울렸다. 「얏! 에잇!」기합소리와 칼 부딪치는 소리뿐 장내는 쥐죽은듯했다. 승부의 귀추가 주목되는 아슬아슬한 순간, 사나이의 칼이 스님의 머리를 후려치는데 스님은 날랜 동작으로 상대방의 칼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오, 과연 장한 솜씨로구나.』광해군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무과에 급제한 각성 스님은 팔도 도총섭이란 벼슬을 맡았다. 그러나 바른말을 잘하는 스님은 임금에게 성을 쌓고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간(諫)하다 뜻이 관철되지 않자 벼슬을 내놓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몇 년간 무술을 더 연마하는 동안 나라는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각성 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세상에 내려가 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스님은 곧 대궐로 달려가 새 임금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고맙게 여긴 임금은 스님의 옛 관직을 회복하여 팔도 도총섭에 명하고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했다. 남한산성이 다 이루어지기도 전에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왔다.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게 된 인조는 각성 스님의 공을 높이 치하했다.

 

『대사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던들 내 어찌 생명을 보존했겠소.』성곽 수호를 관군에게 맡긴 각성 스님은 의승 천 명을 모아 「항마군」을 조직, 북으로 진격했다. 『나는 팔도 도총섭이다. 대장은 나와서 나와 겨루자.』이때 적진에서 달려나오던 대장은 갑자기 멈춰섰다.

 

『혹시 김각성 장군이 아니오?』『그렇소만….』『지난날 과거장에서 칼을 잃고 도망간 사람이 바로 나요, 나는 그때 조선의 정세를 염탐하러 왔다가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했지요. 그때 살려준 은혜 잊지 않고 있소. 오늘 저녁 술이라도 한 잔 나눕시다.』

 

『술도 좋지만 우선 승패를 가리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좋소. 그럼 내일 싸우도록 합시다.』이튿날 아침. 벽암대사는 의병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그 많던 적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들판에는 편지를 매단 창이 하나 꽂혀 있었다.

 

『김각성 장군! 지난날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그냥 돌아가오.』편지를 읽은 스님은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장경사를 건립했다. 훗날 조정에서는 스님의 공을 기리기 위해 남한산성에 「청계당」이란 사당을 지어 매년 추모제를 올렸다.

 

 

 

 

 

 

구례 화엄사에 있는 벽암대사 각성(覺性) 공덕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 승병을 이끌고 참전 海 陸전을 가리지않고

참전 하였으며남한산성 축조시 팔도 도총섭이 되었고 공사를 마친후에는

“보은 천교원조 국일도대선사”

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행적을 기리기위해 당대 명성이 높았던

문관들이 비문을남겼다 유교를 국교로 했던 조선에서

승려를 위해 이런 “비”를 남겼다는

자체가 벽암대사의

공이 얼마나 컸는지지가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법주사 입구 수정교 앞에 벽암대사비(지방유형문화재 71호)가

 

남아있어 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 비는 조선 현종(1664) 때

 

건립된 벽암대사의 비로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오가 썼다.

 

 

 

 

경기도 광주 개원사는 남한산성을 쌓을 때 일 하러온 승병들을

 

총괄 지휘 하던 곳으로 병자호란 때는 僧軍의 사령부였다

 

 

 

 

 

비봉능선의 사모바위의 애잔한 전설

 

병자호란때 징병되어 전정터에서 다행히 살아 고향으로 돌아온 한남자가

사랑하는 아내가 청나라로 끌려간 것을 알게 된다 남자는 아내를 기다렸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청나라에서 운좋게 풀려난 여인들은 신원이 된다는

홍지천(세검정)에서 모여 살았다.

남자는 아내를 찾을려고 홍지천 부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못했다.

결국 그는 홍지천옆 비봉능선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그녀를 그리워

하며 기다리다 사모바위가 되었다 한다.

 

 

 

 

아래글 출처:네이트지식

 

[정의] 경기도 남한산성 내에 있는 청계당 건립의 유래에 관한 전설. 

[내용] 청계당은 벽암대사 각성(覺性)이 병자호란 때 세운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각성은 1575년(선조 8)에 출생하여 1660년(현종 1)에 타계한 조선시대의 선승이다. 광해군 때에 무과에 응시하였는데 과거장에서 당시 조선의 실정을 염탐하기 위하여 잠입해 있던 청나라의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겨루어 장원급제하고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제수되었다.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한 그는 벼슬을 내놓고 다시 금강산에 입산, 수도생활을 하였다. 
인조반정 후 어느 날 꿈속에서 부처님을 보게 되었는데 이 땅에 머지않아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일어날 터이니 국가와 사직을 구하도록 성벽을 쌓으라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벽암은 곧장 산을 내려와 인조를 배알하고 머지않아 북쪽의 오랑캐가 쳐내려올 터이니 팔도의 성곽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고하였다. 인조의 하명을 받은 그는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 축조현장에 와서 3년만에 성을 완성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함과 의발을 하사하여 공을 치하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벽암은 승병을 모집하여 청나라 군대와 싸웠다. 부평벌(富平伐)에서 적병과 크게 싸움이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중과부적으로 전황이 불리하게 되자 벽암은 단신으로 적진에 나아가 양군의 대장끼리 승부를 겨루자고 외쳤다. 적장은 다름 아닌 용골대였다. 두 사람은 용골대의 제안으로 다음날 싸우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어 보니 적장 용골대는 편지를 남기고 떠나가 버리고 약속한 싸움터에 나타나지 않았다. 편지는 지난날 벽암이 과거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그 보답으로 오늘은 이만 물러간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에도 벽암은 도처에서 적병을 물리쳤으나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자 그 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러한 벽암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세 사람들이 청계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성남시사(성남시사편찬위원회, 199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