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을 보려면 현존하는 사료들을 일부분 만이라도 보아야 할것같아 그시대 인물들을 발췌 몇분소개해본다
산성일기는 작자 미상으로 1책 필사본이다
병자호란때 청나라군사에게 포위되어 항복하기 까지 50일간의일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낙선재본·국립중앙도서관본·구왕궁본(舊王宮本)이 있다.
후금(後金 : 청나라)이 크게 일어 설 당시 조선의 혼군(昏君) 인조(仁祖)와 새끼중국인들
은 끊임없는 후금(청)의 화친요청을 거부하고 국가적인 위기를 자초합니다. 당시 몽골과
만주의 지배자로 칭기즈칸의 천명을 받은 청 태종은 인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내립니다
산성일기 (山城日記)』(서해문집 : 2004)].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편지①]
"조선 국왕은 들어라. 짐이 요동을 점령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끌어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1627)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했던 것이
다. 이것을 두고 어찌 강대하다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인조)가 섬(강화도)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겠느냐 ![『산성일기』58쪽]"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편지 ②]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皇帝)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인조)가 '이런 말을 조선의 군신들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그 같이 말한 저의가 무엇이냐? 대저 누구를 황제로 칭하는 것이
옳은가 틀린가 하는 것은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天子)라도 외로운 필부(匹夫)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식으로 짐에게 말한다는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
기는 명(明)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지를 한번 두고 볼 것이다. 자식의 위
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 된 자가 어찌 구하러 오지 않겠는가? 만일 명나라가 구하
러 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만백성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겠느냐? [『산성일기』58쪽]"
남한산성을 생각하면 자연 척화론의 대명의리와 화친론이
생각난다..“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하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 라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지만, 자신이 쓴 항서를 찢는 척화파 김상헌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독단에 빠지지 않았던 최명길 실리를 따르지 않고 명분에 치우친 재상들때문에 조선역사의 유래가없는 민초들의 수난을 당하게 된다. 처녀조공1천명을 보내라 명과의 대명 전투병력 1만을 보내라 볼모 소헌세자에게 일개 청의 장수 마부대 와 용골대가 닦달을 하다가 이에 여의치 안을때는 소헌세자를 수행했던 재상 한명씩 참수시켰다 하는 기록은 볼모로있다가 북경으로천도 할때 기념으로 석방할때까지 8년간 생생한 기록들이 심양일기에 수록되어있다
심양일기(이석호역 대중서관 에서 발췌)의 일부분을 소개하자면 1637년5월17일 세자 심양관소에 머무시다. 포로(조선군민)의 매매를 허락하니 청인들이 남녀의 포로들을 성문밖에 집합시키다 그짝이 수만이라 혹 모자가 상봉하고 혹 형제가 서로만나 얼싸안고 울부짖으니 그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다.정명수(통역관)와 김여익이 황제의명이라고 와서 하는말이“황제가 내일 세자를 만나고자 하니 세자는 마땅히 冠帶를 하고 가서 만나라” 고 하다 재신들이 말하기를 “세자가 남한산성으로부터 곧장 여기로 왔으므로 관대를 어느 겨를에 가져올수 있겠소? 이는 그대들도 아는바요 황제가 살필 바 아니겠소“ 하니 정명수등이 돌아가다 용골대가 재신들을 보고자하여 재신들이 가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八高山의 여러사람들로 하여금 울타리밖을 지키게 한것은 세자가 여기온지가 얼마않되므로 하인배들이 난잡한 폐를 끼칠가 두려워 한것인데 이제 이미 숙소도 정해졌으니 하인을 엄금하라는 명령을 거두고 여러재신들이 모두자기의 책임을 잘완수하므로 청국황제가 살구를 한그릇보낸다“ 고 하다
어느날 산행에서 우암송시열을 논할 때에 그분이 학문의 위대함은 알고 있지만 주자학을 신봉하여 명분만 앞세워 청과의 전쟁을 고집하다 결국 임금이 오랑캐에게 항복하게 되자 항복한 임금을 섬기지 못하겠다. 낙향해버리고 이어서 소현세자와 두왕자가 볼모로 끌려간후유증으로 소현 세자가 죽자 차남인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는데 여기서 제를 지내는 문제(예송론란) 를 가지고 원칙론에만 집착하여 붕당의 시초를 만들었다는 주장에 춘곡이 이르기를 “중국에는 공자 맹자 노자 등 자자를 붙이는 성인들이 많으나 우리는 그래도 그분하나 송자라 칭하지 않는가? 누가 뭐래도 학문을 체게화 시킨이가 송자아니던가..“ 역사스페셜에 소개된 이경석(1595~1671)
선생의 본관은 전주, 자 상보(尙輔), 호 백헌, 시호 문충(文忠). 정종대왕의 손자인 신종군 이효백(新宗君 李孝伯)의 5대손이다. 그당시 삼존도비를 쓴다는것은 후손들에게 큰 누를 끼치는일이었다 허나 그는 사직을 지키고자 비문을 작성하였으며 1650년(효종 1) 김자점의 밀고로 인해 조선의 반청(反淸) 북벌(北伐)정책이 알려져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 6인이 의주부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즉시 어전회의에서 공이 일체의 책임을 홀로 지고 감당하겠다고 자진하므로 왕이 위험을 우려하니 “소신 한 몸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살신성인하여 나라를 구하겠습니다.”하고 의주까지 가서 영접했다.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도착해 백관을 남별궁(南別宮, 조선호텔 자리)에 집합시키고 국왕을 추궁하고 협박하니 그 책임이 왕에게 미치게 됨으로 공이 이르기를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고 왕은 모르는 일”이라 했다.외교문서 작성자를 물으니 조경(趙絅)이 “ "내가 작성했으나 상부지시라.”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가 수상으로 이 역시 나의 책임이라.”했고, 다음날 일본과 내통한 점을 추궁하니 “이는 오해요 왜(倭)의 태도가 수상하여 대비책으로 국방을 준비한 것뿐이라.”고 답했다.
이에 청나라 사신은 누차 일인(一人) 책임인가를 다짐하니 태연한 태도로 시종일관했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흉흉하기만 했고 모두가 두려움에 안절부절할 뿐이었다. 이 날 신명의 위험이 급박한지라 가족들은 장례 치를 도구를 준비해 문 밖에 대기했으나, 공은 안색이 정연해 터럭만큼의 두려움도 나타내지 않고, 응답이 의연해 사소한 착오도 없으니, 좌우에서 보는 자가 깜짝 놀라지 아니함이 없고, 청의 사신들도 서로 말하기를 “동국(東國)에는 홀로 백헌 이상국(相國-영의정)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하고 감탄했다. 효종대왕이 역관(譯官) 정명수에게 천금(千金)을 주어 청 사신을 달래게 하는 등 극력 주선으로 극형을 면해 의주 백마산성 가시울타리 속에 안치(安置)당했다. 백마산성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사형을 당하게 될 위험이 몇 차례 있었으나 공은 답답함과 위태로운 빛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존경했다.12월에 석방되니 앞으로 영원히 벼슬에 등용하지 않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보내라고 하는 조건부 석방이었다. 공이 돌아오는 수레 주변에는 백성들이 미어지게 모여 훌쩍훌쩍 울며 서로 다투어 공의 모습을 보기를 다투었다.
2011년 3월27일 날씨 쾌청 바람불다
친우 춘성군 부부와 8호선 남한산성역 1번출구에서 만나 200m 떨어진
버스정류장에서 9번버스에 올라 남한산성 남문에서 하차 성곽을 따라
일주하다
남한산성은 인조가 성밖으로 나아가 항복하는 대목은 이러하다
「상(임금 : 인조)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
칸(황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임금)에
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인조)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
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15년 1월 30일 -‘대쥬신을찾아서’(김운회교수저)에서 발췌
참담했던 그때를 회상하며 성곽을 도는데 어수장대와 북문을 거치는 동안
친구내외와 여러 가지 말을 나누었다...새들이 지저기고 먹거리가 풍족한
산성엔 옛일이 자취는 없었다 나는 친구에게 하는말이 “그나마 청태종이
종묘사직을 불지르고 청국이 지배하였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둘레길 아기자기하고 산성에서 보이는 성남시 풍악놀이 풍요로운 대한민국엔
이제 동족의 갈등만 존재한다....무슨업보일까???
사물놀이 중 징치는 아가씨는 영화배우 뺨치게 아름답다.기념사진 청하뫼 혼쾌히허락하여 기념 사진 한컷
지방자치제 의 장점은 광주시 민속 사물놀이 볼거리다
매주 공연 한다하는데 이런 훌륭한 공연을 외국인이 카메라에 열심히
담고 있었다 공짜공연이 다른나라에도 있을까??
사진으로 보는 산책
남문옆으로 시작한다
보수된 산성길
누구의 짓일까???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
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
건물이다..(문화재청)
수어장대 앞 매바위에 음각된 수어장대글
수령300년의 향나무
왜??? 하필 여기서 시산제라고 하는 헤프닝을 벌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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