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2일
남한산성
(3번째탐방 광주 쌍령전투 이야기)
3월은 심양일기
4월은 애절한 공녀들의한
5월은 만화같은 쌍령전투이야기를
초등동창들과 함께하며
병자호란때 전투사항을 이야기 하다
오늘은 외성으로 돌아 다니며
병자호란때 경기도 광주
쌍령전투에서 아군 4만의 군사들이
팔기군300(3000명이란 설도있습)에게
참패한 어이없는 전투사황을 이야기하는데!!!
화약을 충전하다 기습한 청군에게 支離滅裂
한 아픈역사를 돌아보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라며 실록은
싱그럽고 야생화만 아름답게 피었지만
역사는 침묵하며 교훈을 남긴다..
조선군
조선의 신기전차
명나라도 인정한 조선의 '조총'
조선의 대표적인 화약 무기는 조총과 화포다.
특히 조총은 인조 때에 이르러 주력 병기로 활용된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조선은 조총수를 앞세워
기마병을 선봉으로 한 청나라 군대와 맞섰다.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총 도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바 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파상공세에 밀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길 뻔한 조선이었다.
조총 개발에 조선이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광해군 시절이다.
후금의 누르하치가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을 때였다.
누르하치의 침략 위협을 느낀 광해군은
조총을 비롯해 각종 화포 제작에 돌입하는 한편,
화약원료인 염초를 확보하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이후 인조 때에 이르러 조선이 보유한
조총 제작기술은 일본을 넘어섰다고 한다.
팔기군
청나라 '홍이포', 조선을 무너뜨리다
청나라의 군대는 팔기군 체제였다. 서로 다른 8개의
깃발아래 병력을 편제했다. 몽고족과 한족도
팔기군에 포함돼 있었다.
중국 전쟁사 전문가인 크리스 피어스가 펴낸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를 보면, 청군은 일반적으로
창병, 검병, 궁수로 구성된 3열의 보병과
그 뒤에 기병이 배치되는 식이었다.
청나라는 정묘호란 전인 1620년대부터 화승총과
화포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병은 당시에도 칼, 창, 활 등을 주로 사용했다.
기병은 대부분 철갑을 착용했는데,
징이 박힌 면갑(바깥쪽은 천, 안쪽은
금속조각을 입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은 홍이포(紅夷砲)에 의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군은 홍이포를 앞세워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의 마지막 보루인 강화도마저 함락시켰다.
홍이포의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청나라는 남한산성 밖에 진을 치고 행궁을 향해
홍이포를 쏘아댔다. '속잡록'(1637년 1월 24일)은 홍
이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적이 홍이포를 터뜨리니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 하고,
작은 것은 계란만 하다.
빠르기는 회오리 바람과 같고, 소리는 벼락과 같아
그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았다'.
강화도 수비군에게도 홍이포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
동계집' 1637년 1월 27일 기록을 보면, 포성이 산과 바다를
흔들고, 포탄을 맞은 물건은 곧바로 꺾이거나 무너졌다고 돼 있다.
조선이 홍이포를 쓰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정조는 "병자년(1636, 인조 14년 병자호란)에
이 방법을 배우지 않아 쓰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고 했다
남한산성 전투도
이긍익은 부친이 당쟁에서 희생되어 평생을
야인으로 살면서 연려실기술등 책들을
저술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양측군대의 수가
언급되어있지 안은데 무슨 근거로
4만이라하였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만약 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작전을 잘짜서
팔기군을 무찔렀다면
명이 멸망하지 않았을터이고 참혹한 인간 진상이나
노예매매 같은 조선 최대의
비극은 막을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까운것은
병인양요때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매복하여 현대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을 섬별한
양헌수 장군같은 지장이
당시엔 없었나?! 임란때 진주성의 김시민
행주산성의 권율 한산대첩의 충무공 등
홍의장군 곽재우같은 의병은 어디로 갔고
나약한 인조와 보수꼴통 서인들만 있었나??
왜???? 병자년은 의인이 없었을까????
이긍익의 쌍령 전투에 대한 기록
사료1-3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제장사적조
左兵使許完,(중략)
與右兵使閔栐, 合兵四萬. (중략) 賊之先鋒三十三人 (중략)
遂使賊兵三百餘騎, 破左右兩陣云.
좌병사허완(許完)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우병사 민영(閔栐)과 군사 4만을 합하여
고개를 넘어가는데 척후병을 파견하지
아니하여 막연히 적의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이르러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쳤는데 정포수(精砲手)를
뽑아서 모두 가운데에 두어 굳게
스스로를 호위하고 중등과 하등 포수는
밖에 몰아놓고 다만 화약을
다만 화약을 사람마다 각각 2냥씩 나눠주었다.
초관(哨官)이택(李擇)이 정포 천총 이기영(李起榮)을
불러서 말하기를,
“외면이 지탱하지 못하면 가운데가 홀로 지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완이 듣고 말하기를, “
1등 포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1월 3일 이른 아침에 적의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가지고 남산
상봉(上峯)에서 줄지어 전진해 오니, 아군이 나가 맞이하여 한 번 싸워
용감하고 건장한 적병이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적병이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에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서문
그러나 포수가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이미 다 떨어졌으므로 포수들은 화약을
더 달라고 연달아 소리치고
또 정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재촉하여
앞으로 나와 목책(木柵) 가까이 왔다.
안동 영장(安東營將)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당하여 손수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목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신지(信地)에 우뚝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쳐들어오니 중견포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다. 허완이 겁을
집어먹어 말을 타지 못하자
3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서 밟혀 죽었다.
군졸이 붕궤되어 쓰러진 시체가 목책과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적병이 짧은
무기로 함부로 찍었다.
또 우진에 닥쳐오므로 민영이 진을 정돈하고
기다리다가 포환을 일제히
발사하니 맞은 자가 바로 죽었다. 적이 감히
핍박하지 못하므로 승전할
기세가 있었으나, 화약을 또한 단지 2냥씩만
주었기 때문에 다시 화약을
나누어주느라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
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
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되었다.
적이 이때를 틈타서 총돌격하니 마침내 전군이
전멸되고 민영도 죽었다. 적이
양진을 깨뜨리고 나자 죽은 자의 옷을 벗기고
또 불을 놓아 적이 양진을
깨뜨리고 나자 죽은 자의 옷을 벗기고 또
불을 놓아 태우고 갔다. 처음에 선약해가
남산 위에 진을 옮기자고 세 번 청하였으나
민완이 끝내 듣지 않아서 마침내
적 3백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고 한다.
○ 감사 심연(沈演)이 화완이 도망쳐 살아 있다고 치계하였기 때문에 증지과
사제(賜祭)의 은전이 민영에게 미치고 허완에게는 미치지 않았는데,
허완의 아들 장()이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한 연후에 증제(贈祭)하였다.
허완 [許完, 1569~1637]
요약
조선 중기의 무신. 병자호란 때 1만여 군사를 이끌고 광주
쌍령에서 적과 대전하다 패해 자결했다.
본문
본관 양천(陽川). 자 자고(子固). 시호 충장(忠莊).
25세 때 무과에 급제, 수군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이순신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선전관을 거쳐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고, 1604년(선조 37)
단천군수(端川郡守)를 지낸 뒤 훈련원중군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629년 회령부사가 되어 국경수비를 담당,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1635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1만여 군사를 이끌고 북상, 1637년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적과 대전하다 패하여 많은 군사가 죽자 자결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민영 [閔栐, ?~1637]
요약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병자호란 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서
척화를 주장하고, 남한산성으로 올라오던 중 쌍령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본문
의주부윤(義州府尹)을 거쳐 1635년(인조 13)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척화론을 주장하였는데,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올라오던 도중 경기도 광주(廣州)의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함께 전사하였다.
1701년(숙종 27) 신료들의 건의에 따라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1756년(영조 32)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의 건의로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병조판서에 증직(贈職)되었고, 광주시
초월읍의 정충묘(精忠廟)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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