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여행기

루브르박물관과니케상 (서유럽여행7부)

훼브스 2020. 7. 24. 13:58

 

2013년8월17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밀로의비너스상과 니케의여신상

모나리자그림 은 교과서에서 수없이 접했고 석고상을 모델로  뎃상중 누구나 보아왔던 너무나 유명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작품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 관람객은 많고 세계적인 유능한 소매치기 들이 다 모인다 해서 박물관을 일시 폐쇄 시키는 일이 벌어진 사례도 신문에 보아 왔고 수주전 모나리자를 관람 했던 친우 변사장은 모나리자 사진 찍다가 지갑이 털렸다는 조언으로 여권 가방 챙기랴 여유란 전혀없이

루브르 박물관을 견학하였는데!!“내가 왔노라”를 외치는 것으로 보람을 찾을수 밖엔 없었다.

가이드의 빠른 설명이 이어폰으로 들렸지만 스치고 지나간다고 표현해야 옳은 표현이다

 

아들 과 여식 모두 유럽여행을 40일씩 보내준 기억이 새롭다지금은 두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는 여식은 그때의 추억을 말한다“그때 유럽여행을 보내준 부모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쉬운일이 아니었을 터인데!!!“그렇다 자유여행으로 찬찬히 감상해야지 그냥 지나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명화와 조각상에 파뭍혀 사진을 찍다가 일행을 놓치고 말았 이어폰에서 계속해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 왔다 니케의 “여신상 앞으로 오세요” 대영 박물관의 비너스상 루브르의

 

밀로의 비너스 아름다운 선은 기원전 사람들의 예술의 경지가 신기에 가까워 놀라움 뿐이었다

파리 중심가 리벌리가에 있는 국립박물관인 루브르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대영박물관 과 함께 세계3대 박물관으 손꼽힌다. 12세기 후반 필립2세의 명으로 착공된 루브르궁으로 쓰다 1672년 루이14세가 백사유 궁전으로 이사하면서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면서부터 1692년 루브르 건물에 왕립아카데미가 들어서고 1699년에는 첫 번째 살롱전이 개최되었다 대혁명당시 국민회의는 루브르가 박물관으로 국가의 걸작을 전시해야 된다고 선포하였으며 나폴레옹 통치시절 많아 유품들이 반입되어 전시되었으나 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자 고국으로 각각 돌려보내졌다 루브르 박물관은 파리의 세느강변에 포함하여 세계유산 으로 지정되어있다.

 

죽어가는 노예들(미켈란젤로 1513-1515)

원래 묘비건설을 위해 제작한것인데  미완성인채 남아 있던 작품이었다 비틀린 근육질의 몸에 인간의 꿈과 고뇌가 그대로 담겨있다 루브르 박물관 안으로 들어와 첫 대면 하는 석상 이었다 사진을 찍는데 가이드의 말은 이작품은 힘이 없고  남성을 상징하는 근육과 심볼이 위측되어 있는 노예를 모델로 한것이라 하면서  여기서 중요한것은 만지지 못하게 철 울타리를 해놓았는데 그것이  없다면 중요한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

비너스(Venus)

드디어 제일 보고 싶었던 밀로의 비너스 상 앞에 서다  사랑과 미의여신,비너스(Venus) 라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시대의 대리석 조각인 밀로의비너스(Venus De Milo)를 떠올린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8등신의 여인 누드 조각상으로 높이가 204cm에 달한다 1820년 그리스 에게해 남동부의 카클라데스 제도에 속한 밀로섬 에서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섬의 이름을 따서 “밀로의비너스” 또는 그리스어로 메로스의

아프로디데(Aphrodite of Melos) 라고부른다

밀로의 비너스는 발견당시 섬에 정박 중 이던 프랑스 해군에넘어갔다 이듬해 1821년 프랑스 대사로 있던 리비에르 후작이 입수해 프랑스 국왕 루이18세에게 헌납했고 현재 이곳 루브르에 있으니 멜로의 비너스의 운명 또한 슬프다    조국 그리스엔 영원히 가지 못할것 같다.

 

 

 

 비너스상의 뒷 모습이다 기원전 어느 예술가가 혼을 들여 만들어 졌던 미적 감각은 살아움직이는 것  처럼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 져 있었다  소년때 화실에서 몾품 뎃상을 수없이 하면서 보아왔던 조각품을 진품과 어떻게 비교 할수 있겠는가? 앞모습 앞가슴 풋풋한여체는 모델이 처녀라는 것을 암시하고 뒷모습의 균형있는 자세는 미적 감각을 더한다 지금처럼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을 장인의 예술성에 탄복하게 한다

 

디오니소스를 안고 있는 실레노스

 

이석상을 이해하려면 그리스 신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셀레노스(Silenus/Sileni)는 그리스 신화의 목축의 신으로 디오니소스의 스승 또는 조언자로 알려져있다  신화는 없지만 그리스의 항아리에 자주그려져 있다 딸기코를 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음악과 술을 즐기는 숲의 정령 셀레노스 가운데 하나였다니오니소스를 양육한 실레노스는 물의 요정이며 반인반수 숲의 신 "사티로스"의 아버지다 세일레노스 라고도한다.수염이 더부룩한 노인인데 때로는 말(馬)의 다리와 꼬리를 가진것으로 서술된다 디오니소스(박카스)는 제우스와 테베 시의 창설자인 카드모스의 딸  세벨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제우스의 아내 질투의 대명사  헤라  는 남편과 사랑을 나누는 세벨레에게 원한을 갖게되자  그녀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헤라는 세멜레의  늙은 유모인 베로에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녀의 애인이 정말 제우스신인가 의심을 품도록 하기위하여 탄식하며 말했다"나는 사실이기를 바라지만은 그러나 두려움을 금할수 없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자신의 말과 같지 앉은 경우가 있답니다 그가 진정 제우스 인가 증거를보여 달라고 하십시요.그렇게 하면 사실여부를 알 수 있을것 입니다"그말에 속은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무엇이던지 밝히지는 않고 어떤 청하나를 들어주십사고 제우스에게 청했다 제우스는 들어주마하고 약속하고 신들도 두려워하는 스튁스강의 신들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위배할수 없는 서약을 했다 그제서야 세멜레는 청을 밝혔다 제우스는 그녀의 말을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그럴 사이가 없었다 깊은 고뇌에 잠긴 채 그녀와 잠시 헤어져 하늘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는 휘황찬란한 몸차림을 하였다 그러나 거인족들을 명망시킬 때와 같이 중무장을 하지 않고  오직 신들사이에서 알려진 차림을 하였다  이렇게 차리고나서 그는 세멜레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인간으로서의 육체는 신의 광휘를 감내할 수 없음으로 그녀는 녹아 버렸고 그녀가 살아지기직전 제우스는 세멜레의 몸에서  태아를 구출하였다

그는 자기 허벅지를 베어 그속에 아기를 넣고 꿔매었다  몇 달후 제우스는 허벅지를 절개하고 아기 디오니소스를 꺼냈다 이 아기를 세멜레의 자매인 이노 한데로 데리고 갔다는 설과 제우스가 유아인 디오니소스(박카스.바쿠스)를 데리고 와 뉘사 산의 님프들에게 맡겼다 이 님프들은 그를 소년이 될때 까지 양육하고 그보수로  제우스에의해 휘아데스 성좌로서 별 사이에 놓여지게 되었다 한다   

그리스에서는 포도재배와 더불어 술의 신이 되어 격렬한 도취상태가 따르는  종교적 광란의 제례는 오르페우 스교 등의 신비적인 밀의(密儀)와 결부되었다 디오니소스 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술과 풍요의 신이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고 아리아드네의 남편이다 로마신화의 바쿠스(Bacchus)에 해당한다   

 

마르시아스의 형벌(Le Spplice de Marsyas)

로마제국 AD1-2세기의 작품으로 로마에서 발견된 높이2.56m의 대리석 작품 음악경연대회에서 대담하게도 아폴로와 싸워이긴 마르시아스는 아폴로에 의해 소나무에 매달린채 처참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지금은 잃어 버린 BC 3세기 전반 그리스시대 청동원작을 로마에서 복사한 것이라 한다  

 

아르데미스 여신상

이작품을 아는게 아니라 신화의 아르데미스 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처녀신 제우스와 레토의 딸이며 아폴론의 쌍둥이 누이동생이다 로마신화 에서는 다이에나 와 동일시된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는 사냥을 좋아하여 활로 무장하고 산과들을 뛰어 다니며 사슴을 쫒는다 그녀의 화살은 때로는 사람에게도 겨누어져 아기를 낳으려는 여자에게 고통이 없는 죽음을 안겨준다.

잠자고 있는 헤르마프로디데(Sleeping Hemaphrodite)

잠자고 있는 헤르마프로디데(Sleeping Hemaphrodite)

신화를 토대로 기원전 160년경 조각되었다는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테는 아름답게 어제 잠든모양으로 앞에 다가왔다 매끄러운 곡선 뒤에서 여체의 신비를 느낄때 쯤 앞으로 돌게 되는데 그만 나도모르게 웃음반 놀람 반으로  침을 꿀꺽 삼키게 된사실 루브르의 전시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한조각상들은 남성미 넘치는 심볼을 상세하고 건강하게 표현된 것들이 많았다

어느 조각상이던 씩씩한 심볼을 달고 있으나 워낙 오래된  조각상이라 그 예술성에 여성들은 근엄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헤마프로디테 앞에선 동료 숙녀들은 웃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헤르마프로디테는 로마제국 A.D1-2세기 작품으로 로마 의 디오크레티안 의 목욕탕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헤르마프로디테의 조각상은 그리스산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밑부분의 메트리스는 이탈리아의 카라라(Carrara)산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다 한다  높이1.69m 너비0.89m 이다 1619년 보르게체 추기경이 베르니니에게 이 조각상을 고전적인 배경으로 올려놓을 받침대를 만들라고 하였고 같은헤 데비드에게 본체 복원을 맏겼다.한다 이작품에서 나타난 헤레니즘 특징인 무감동한 나체를 바로크시대 이탈리아 거장인 베르니니가 메트리스 위에 올려놓음으로서 극적인효과를 보이고 있다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는 흥미진진 하다.헤르메스(Hermes)는 미의여신 아프로디데 와의사이에 에로스와헤르마프로디데를 낳았다 헤르마프로디데(Hemaphrodite)는 미소년 이었는데 살마키스(Salmacis)라는 요정과 강제로 몸이 함처져서 자웅동체 의 인간이 된다  자웅동체가된 신화는 이렇다 어느 날 헤르마 프로데스가 샘에 이르자 살마키스는 그의 잘생긴 용모에 반하였다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데에게 다가가 자신과 결혼 하여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헤르마프로티테가 옷을 벗고 호수에 들어가자 살마키스는 그를 껴안고 강제로 입을 맞추었다.헤르마프로디테가 한사코 뿌리치려고 하자 살마키스는 그와 영원히 그와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신께 빌었다 살마키스의 기도가 이루어져 그녀는 헤르마프로디테와 한몸이 되었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몸이 절반은 남성이고 절반은 여성 남녀 추니가 되었다

 

헤라 클레스 상

 

헤라 클레스 상

헤라클레스는 "힘" 남성을 상징하는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 신 이고 신들의 제왕 제우스와  인간 알크메네 의 아들이다 힘있는 남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나라 속담 비슷하게 영국시인 바이론은 무지하고 무모한 힘의 남용을 해 오버하는 정치인 들에게 "모기 한 마리 잡기위해 헤라클래스의 몽둥이를 휘둘러야 하는가"   라고 외쳤다 한다 조각 표현은  헤라크레스의 12업중 하나를 나타내는듯 그리스 신화에 수많은 신과 영웅들중에  최고로 유명한 헤라클래스(herakles)다 그리스인들은 끊임없이 헤라클래스 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는데 “헤라클래스 없이는 되는일이 없다” 할 정도로 헤라클래스는 신들중에 제일 인기를 지니고있었다  헤라클래스는 으뜸신인 제우스와 페르세우스의 손녀 알크메네 사이에서태어났다

바람둥이 제우스는 평소 미인으로 알려진 알크메네를 노리고 있다가 남편인 암피트리온으로 변장하여 후다닥 일을 치루고  그때 낳은아기가 헤라클래스다

 

제우스는 많은 자식들중에 헤라클래스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다 그래서 그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이때 헤라클래스의 이름은 “헤라의 영광” 이라는 뜻으로 제우스의 세 번째 아내인 헤라(hera) 가 들어가는데 바람을 피워서 얻은 자식이 헤라에게 피박받을 것을 염려해서 아기를 잘봐주기를 기원해서 지은 이름이라한다. 하지만 이런 제우스의 노력과 배려에도 불구하고 헤라는 헤라클래스가아기였을때부터 괴롭힌다,

 

잠자는 아기 헤라클래스의 요람에 독사2마리를 풀어 넣었는데 아기 헤라클래스는 이뱀 두 마리를 손으로  잡아죽인 일화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는 질투의 여신으로 암소로 변한 이오를 괴롭히는이야기는 유명하다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잇는 보스포로스(Bosphorus) 해협을 지나며 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보스포로스 해협이라는 이름은 “소가 걷는 바다”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나코스의  딸 이오(Io)를 제우스가 건들였다 질투의 화신 헤라가 괴롭히자 흰 암소로 둔갑시켰는데 헤라의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을 헤메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넜다 하여 붙혀진 이름이라 한다

 보스(bos)가 그리스어로 암소 포로스(phorus)가 그리스어로 여울 이라서 암소가 지나간 여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헤라와 헤라클래스의 질긴 악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인간과 남편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래스에게 미움은 계속되어헤라클래스가 자라서도 그의 형인 에우뤼스테우스의 부하가 되어 그의 모든명령을 수행하도록 되었다

 우뤼스테우스는 달성할 가망성이 없는 모험을 그에게 그에게 명령했다 헤라클래스의 12가지 노역(勞役) 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헤라클래스의 12가지 과업

 

1.네메아의 사자퇴치

2.레느네에 사는 히드라(물뱀) 퇴치

3.케르네이아 산주에 사는 사슴을 산채로 잡는일

4.에리만토스산의 멧돼지를 산 채로 잡는일

5.아우게이아스 왕의 가축우리를 청소하는일

6.스팀팔스 호반의 사나운 새 퇴치

7.크레타의 황소를 산채로 잡는일

8.디오메데스왕 소유의 사람 잡아먹는 4마리의 말을 산채로 잡는일

9.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의 띠를 탈취하는 일

10. 괴물 게리온이 가지고 있는 소를 산채로 잡는일

11.님프(妖精) 헤스페리스들이 지키는 동산의 황금

사과르 따오는 일

12.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를 산채로 잡아 오는일

 

안토니오 카노바(1787-1793)의"큐피트와 프쉬케"

안토니오 카노바(1787-1793)의"큐피트와 프쉬케"

 

"큐피트의 입마춤에 소생하는 프쉬케" 큐피트는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 큐피트와 프쉬케의 그리스

신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영어식으로 발음한것이 큐피트(Cupid) 그리스(Eros)와  베너스(Venus)영어식발음 비네스 에대한  신화 영원히 잠든 프쉬케를 깨워 사랑을 확인하는 형상이다

 

이탈리아 신고전주의 예술의 개척자인 카노바석공의 아들로 태어나서 대리석 조각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베네치아에서 도제 수업을 쌓았으며 로마에서 활동했던 그는 당시 유럽 예술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며 로마의 신들과 영웅들 복잡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요정들을 소재로 작업을 하였다

 하얀 대리석상에 투명성이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은빌리에성에 보관되었다가 1824년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신화에 나오는 프쉬케는 왕의 셋째공주로 태어나서 너무나아름다워비너스가 시기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비너스 신전에 찾아오지않고 프쉬케를 찬양하게 되자  비너스는 아들인 에로스(큐피터)에게 미움의 화살을 쏘라고  지시한다 어머니의 청으로 프쉬케를 찾아가 본 순간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에로스는 허둥대다가 미움의 화살대신 사랑에 화살을 자신에게 찔리면서 프쉬케에게 쏘았다

 

니케(그리스어:Nikn)는 그리스 신화의 정복과 승리의 여신이다

 

니케(그리스어:Nikn)는 그리스 신화의 정복과 승리의 여신이다

로마 신화의 빅토리아에 해당한다 우리가 체육 행사때 마다 즐겨 외쳤던  구호이다 티탄 신족의 하나인 팔라스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여신 스틱스 사이에 태어났다 질투 또는 경쟁심을 뜻하는 클라토스 폭력을 뜻하는 비아의 남매이다 전재의 여신이기도한 아테나 와 관계가 깊고모습도 비슷하지만 단독으로 그려질 때는 날개가 달려있고 종려나무 잎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아테나가 아테나가 팔에 니케를 올려 놓은 모습을 볼수 있다 기간데스와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인 기간토마키아에서 제우스 편에 선 탓에 종종 제우스 옆자리에 아클오 폴리스에 니케 신전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미술 작품으로는  파이오니스가 만든 (니케상)과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견된 사모트라케니케 아크로폴리스  미술관의 (샌들벗은 니케) 등이 유명하다  

 

에게해에 있는 사모트라 섬에서 1863년에 출토된  이조각상은 “사모트라의 승리의여신상”또는 니케상으로 불리는데 작품의 머리와 두팔은 파손되어 유실되었습니다 1950년에 떨어져나간 오른손이 발견되고 오스트리아 빈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유실된 니케의 유실물로 판명되어 현재는 니케상옆에 진열되어 있다 니케상은 안정되면서 동시에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비율을 두루 갖춘 작품입니다 니케상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듯한 역동적 모습에서 탄성을 자아낸다

 

가나의 결혼식(the  wedding feast at cana)

가나의 결혼식(the  wedding feast at cana)  캔버스 유채 677×994cm  베로나 출신의 베로네세(Veronese)가 1563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벽면을 가득 채운 넓은 회랑에 어마어마하게 큰 그림앞에서  사람들이 몰려있다 높이 6m를 훌적 넘고 넓이는 약10m에  이르는 이 대형 작품은 색채 감각이 출중한 베네치아 출신 화가의 그림답게 산뜻하고 생생한 색의 향현그 자체이다  가나의 혼인식예수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기적을 행하여 술통을 다시 가득채운 일을 그린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축하연은 널찍한 식탁 중앙에 예수님과  성모마리아가있고 그들 주변에는 초대받은 사람들과 시중드는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화가는 이 작품에서 성서의 본래 의미보다는 화려한 잔칫상과  베네치아의 웅장한 건축물 떠들썩한 축제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앵그르작 -그랑오델리스크  

 

앵그르작 -그랑오델리스크 

 

신고전주의 작가인 앵그르의 대표작으로 1814년 작품이다 모델인 오델리스크는 이스람 술탄의 하렘 에 잇는 궁녀 로 하렘에 있는 여인들은 죽어서나 하렘에서 나올수 있었다 하며 포로나 노예 중에서 미인만 차출된 연들이라 한다

 

 

  성모자와 성안나 

성모자와 성안나 

 

프랑스와1세가 가져온 그림 성모마리아가 자신의 어머니인 성안나의 무룹에 앉아 아기를 안아 올리는 독특한 구도를 잡아 인간의 역사와 운명이  어머니에서 자녀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데오도르 제리코의 "메뒤즈의 뗏목"(1816년)

 

데오도르 제리코의 "메뒤즈의 뗏목"(1816년)

 

 1816년  식민지 개척을 위해 프랑스에서 대서양을 통해  새네갈로 항해중 이던 프랑스 함선이 침몰하면서 일어나는 잔혹한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항해 경험도 없는 위그디호 라쇼말 이라는

두사람이 정부에 돈을 주고 함장자리를 돈을 주고 사서 항해 하다보니 암초에 걸려배가 좌초하게 되는데 400명 승함 인원중  150명이 뗏목을 만들어 살아남게 된다 굶주림과 절망에 빠진 생존인원은 15일 동안 표류하다  15명만 살아 남게 된다 이중 구조되자 마자 5명은 즉시 사망하고 나머지 10여명도

광기어린 표류과정에서 모두 미처버린다는 끔직한 사고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화가는 33세에 낙마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패전한 왕은 궁녀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  낭만주의 위대한 에술가 들라크르와가 발표한 작품 기원전9세기  앗시리아왕 사르다나 팔로스 적군의 침공으로 몰락이 피할수 없음을 알자 부하들로 하여금 애마와 애첩을 죽이게 하고 자신은  독배를 마시며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 들과 함께 화염속으로 사라 진다는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바이런이 1821년  이 전설을 희곡으로 써서 발표한 것을 들라크르와가 읽고 작품화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비드의 "사바니여인의 중재"  

다비드의 "사바니여인의 중재"  

 

로마는 천년왕국이라 할 만큼 아주 역사가 오랜나라입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이슬람 지역까지 넓은  땅에걸처 있던 거대한 제국이었다 그러나 처음 로마가 건국될 당시만해도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건국시조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황제 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아들로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 형제간의 권력투쟁에서 최후승자가 된 로물루스는 이후 로마의 최고 지배자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로물로스에게는 한 가지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로마는 대부분 남자들로 이루어진 전투집단이라 여자가 매우 부족 하였습니다.신붓감이 없으니 나라를 이어 갈 자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가지 꾀를 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꾀를 냈다. 이웃부족인 사비니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신전 앞에서 축제를 열 것이니 모든 여성분들과 함꼐  오셔서 먹고 마시고 즐깁시다"

 

그러나 이것은 사바니 여인들을  납치하기 위한 속임수였습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로물로스가 신호를 보내자 로마인들이 사바니 여인들에게  덤벼들어 납치해 버렸다 사바니 남자들은 엉겹결에 당하고 속수무책으로 쫒겨왔습니다. 자기나라로 도망친 사비니 사람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은 빼앗긴 딸과 누이 그리고 부인을 되찾기 위하여 차근차근 힘을 길렀다.

 

그리하여 몇년뒤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처들어 왔습니다 로마와 사바니 남자들 사이에 곧 피 튀기는

전쟁이 벌어졌습니다.이때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이미 로마인의 아내가 되어 아이를 낳고 살던 사비니 여인들이 그들 사이에 끼어 들면서 "제발 싸움을 그만두세요 여기서 헛된 피를 흘리게 된다면

더 불행만 자초한다"그녀들 입장에서는 사바니의 친정오빠들과 로마의 남편이 서로 칼끝을 겨누는 꼴이 되었다 결국  여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전쟁은 중단되었습니다 다비드의 (사바니 여인들) 은 바로 그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림 복판에 양팔을 벌리고 선 여인은 헤르실리아 이다

 

그녀는 원래 사바니 왕 타티우스의 딸이었지만 이때는 이미 로마의 왕 로물루스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림 왼쪽에 수염이 텁수룩한 사람이 아버지 타타우스이고 오른쪽이 창을 번쩍든  사람이 남편 로물로스 이라 한다. 로물로스의 방패를 보면 로마(ROMA) 라는 글씨와 함께 늑대의 젖을 빠는 어린이가 새겨져 있다

양족 군사들 가운데 헤르실리아를 비롯한 사바니 여인들이 갓난아기와 함께 뒤엉켜 있습니다. 한여인은 제발 싸움을 멈추라는 듯 타티우스의 다리를 잡고 있고 또한여인은 아이를 번쩍 치처든 채 사바니 군사들을 향해  "이 아이가 당신들의 조카 입니다!" 하고 울부짖는 듯한 모습다.

이렇듯 위험을 무릅쓴 사바니 여인들의 중재로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로마는 번영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한다.

 

그렇다면 다비드는 그 많은 역사적 사건중에 왜 하필 이런 내용을  그렸을까?? 18세기말 다비드가 살던 당시 프랑스는 혁명의 시대 였다.시민들이 왕과 귀족들을 상대로 자유와 평등을 얻기위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리고 있었던 때이다.그 와중에 전제군주였던 루이16세 와 왕비가 단두대에서 처형 되었으며 혁면에 앞장선 지도자들 또한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다비드 자신도 혁명 세력에 적극 가담했다

 

그래서 감옥에 수감될 때도 있었습니다.시간이 지날수록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면서 피 흘리는 싸움이 그칠줄 모르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어쩌면 사바니와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조국 프랑스의 두 세력이 서로 관용을 베풀어 화해의 악수를 나누길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사바니 여인들) 이란 작품속에서 화가는 그런소망으로 평화를 구원하였다 보면 된다. 

 

다빈찌의 세례요한  어둠속에서 일어나는 세례요한  곧 있을 예수의 강림을 예언 하는듯 손으로 하늘을 가르키고 있다

모나리자(Mona Lisa)또는 라 조콘다(La Gioconda La Joconde)

 

모나리자(Mona Lisa)또는 라 조콘다(La Gioconda La Joconde)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초상화 앞엔 많은 인파로 줌렌스로 촬영할수 밖엔 방법이 없었다 가이드 한옆으로 모이게 한다음 황금비율을  아는사람 있느냐는 질문에 아무도 말하는 이 없었다 이때 우리 일행 초등학교 6학년 생 지웅이가 1:1.618 이라 답한다 이에 찬사가 이어졌다

 

황금비율이 많이 들어간 모나리자는 모나(mona) 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히는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한국어로 한다면 "리자여사" 라는 뜻이 된다 다른 이름 "라 조콘도 는 우리말로"조콘도의 부인" 아라 말할수 있다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화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있다 코와 눈썹의 길이와 턱과 코의 길이의 비율.  인증과 입술의 길이와 입술과 턱의 길이의비율  얼굴의 가로세로의비율 등 황금비율이 많이 들어가 균형잡힌 느낌을 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2년에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조르지오 바사리 의  말에 의하면 미완성작으로 남겨둔지 4년이 지난후에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림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하여 진퓸옆에 있는 선전포스타를  촬영하였다   

 

유지니 데라크레와 (Eugene Delacroix, 1798-1863)

 

 유지니 데라크레와(Eugene Delacroix, 1798-1863)

대중들을 선도하는 자유의 여신(Liberie Guidant le people 1830 외젠 들라크루아는프랑스 낭만주의의 중요한 화가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에술의 최고 대표자로 손꼽힌다 이 그림 앞에서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불의 한 장면이 떠올려 졌다.혁명 시민군들이 바리게이트를 처놓고 항거 하는데 대포를 동원 경찰병력에 와해 되는 과정에서 소년과 처녀 청년들이 삼색기를 내걸고 싸우는 중에 주인공 청년은 장발잔이 하수도로 피신시키는 장면 소년과 처녀는 죽음을 맞고 !!! 영화의 그장면은 이 그림을 스켓치 한 것 같았다

그림에서 여인으로 의인화한 자유의 여신이 한 손에는 프랑스 혁명의 3색기를 들고 다른 한손에는 뾰족한 칼이 꽂인 총을 잡고 권총을 들고  있는 옆의 소년과 함꼐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녀를 따르는 군중들 가운데 는 높은 모자를 쓴 상류층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증산층이나 노동자들이 섞여있다 환하게 비추는 뒤의 구름이 그녀의 신성을 돋보이게 하는 가운데  장애물들을 넘어 쓰러진 시체들을 밟고 전진하면서 뒤에 따라오는 군중 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 군중들은 모두 결연한 의지의 눈동자가 빛난다

 

다윗왕의 편지를 든 밧세바 / 람브란트 (Van Rijn Rembrandt 1606-1669)

다윗왕의 편지를 든 밧세바/람브란트(Van Rijn Rembrandt 1606-1669)BATHSHEBA WITH KING DAVIDS LETTER1654년경 캔버스 유채 142×142Cm

 

 

구약성서에서 주제르 따온 작품으로서 다윗의 아내가 되라는 사자의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모습은 풍만한  여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으나 동시에 다가올 비극적인 운명을 두려워하는 우수가 깃들여져 있다 그녀는 끝에는 다윗을 배반해야 하는 운명에 있었기 때문이다.긍극적으로 이작품은 헨드리키에를 모델로한 누두화 이기는 하나 람브란트의 주요 관심사는 바로 밧세바의 갈등을 그려내는데 있었다 작품의 구도 자체는 고대의 부조 작품을 묘사한 동 판화에서 빌어 온것이기는 하나 그구도 이상으로 람브란트에게 중요한 것이 밧세바의 얼굴 표정이었다.요컨대 렘브란트는 고대의 구도 원리에 따르면서 그것을 그의 고유한  비극적 드라마로 묘출 한 것이다  

나폴레옹

 

 

다비드의 나폴레옹1세의 대관식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존경하게 되자  

그를 찬미하는 대작을 몇점 남겼는데 그중 이그림을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속의 내용은 스스로 대관후 황후가 되는

조세핀에게 대관을 씌워주는 광경으로 교황 비오7세가 못마땅하게

지켜보며 축복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나폴레옹을 만난이후 열열한 팬이된 다비드는 나폴레옹 을

 

이그림을 그리기 위하여는 많은 밑 그림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이러한 구성으로 그리려 했던 그림이 아니나

나폴레옹의 권력이 타인에 의해 양위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에의한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러한

구성을 하였다한다 그림속에 웅장함과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The oath of Horatii 1784)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The oath of Horatii 1784) 

신고전주의 회화를 알리는 Horatii.는 로마의 전설을 바탕으로 그렸다 B.C 7C의 로마건국초기 로마와 알바롱가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두 가족은 결혼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훗날 혁명파의 일원이 었던 다비드가 처형에 찬성한 루이16세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서 미술은 대중을 됴육시키는데 공헌해야 한다다비드의 신념이 들어간 작품이다 패권을 다투던 도시국가 로마와 알바롱가는 접전 끝에 전면전 대신 세사람의 대표 전사를 뽑아 결투하고  그 결과에 승복하자고 하였다 로마의 대표로 호라티우스 일가의 삼형제가 선출되어 알바롱가의 대표로 뽑힌 쿠리 아티우스 가의 세아들과 대결하게 되었다.결투초반 알바롱가 쪽이 우세하였으나 마지막까지 남은 호라티우스 삼형제중 한사람이 이들을 모두 베어 버렸다  그런데 호라티우스 가의 여동생 카밀라가 쿠리아티우스 가의 아들과 약혼한 사이였다 로마식 아치가 있는 배경을 뒤로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주저없이 아버지께 맹세 하는 삼형제의 모습과는  달리 우편에 세여인은 번민하고 있다 두아이를 안고 있는 큰 며느리와 가운데의 둘째 며느리  그리고 좌절에 빠진 누이카멜라의 모습이 보인다 쿠리아티우스가의 삼형제를 죽이고 개선한 오빠를 향해  누이는 조국 로마를 저주하였고 이에 격분한 오빠는 카밀라 마저 죽이게 되었다 엄격했던 당시의 로마법은 조국을 구한 용사를 친족살인죄를 적용해 국외로 추방되었다는 비극적 가족사를 담고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51-1854) 작 샤롤 7 세 대관식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851-1854)작 샤롤7세 대관식

대관식 이라는 부제로 그린 그림에서  정작 주인공은  잔다르크이다 그의 영웅적인 모습을 부각시킨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잔 다르크는 (Jeanne d’Arc 141216-1431530) 또는 성녀 요한 나 아르크(Sancta Joanna de Arc)는 프랑스의 국민적영웅이자 로마카토릭 교회의 성인이다 오클레앙의 성처녀(Ia Pucelle dʼ Orlėans)라고도 불린다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켜낸 영웅이다 샤롤7세의 대관식 광경을 그린 것 이지만 대관식을 주제로 삼지 않고 잔다르크의 영웅적인 모습을 전면에 부각 시키고 있다 이는 샤롤7세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그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열일곱 나이에 그녀는 군사 임무에 착수한다 그녀는 적군에 포로로 떨어질 때 까지 그녀의 용기와 전투술은 전장에서 여러번 증명되었다  그녀는 배신자의 농간으로 영국군에 체포되어 종교 재판에 회부되고  유죄평결을 받고 고문과 협박 성폭행 등 마녀로 변질시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다가 1431530일 화형에 처해졌다  그로부터 25년 후에 교황 갈리스토3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종교재판소는 잔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여 그녀에게 내린 혐의 모두를 무혐의 이며 따라서 무죄라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순교자로 선언한다  잔다르크는 1909년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잔다르크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왕루이.리지외의 성녀 테레사 등과함께 프랑스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851-1854)다비드의 뒤를 이은 신고전주의 미술을 이끈 지도자이다 6세 때 들어간 학교가 프랑스 혁명으로 문을 닫는 바람에 학교 교육은 4밖에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평생동안 배움에대한  열정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타고난 재능이 어우러져 신고전 주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는 특히 초상화에 뛰어 났으며 그의 그림들은 대부분 선과 윤곽이 뚜렷하고 균형이 잘 잡혀있다  여성 누드를 즐겨 그렸는데 그림을 보면 사람인지 조각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매끈하고 완벽하게 그렸다 앵그르는 역사화에서 니콜라 푸생과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전통을 따랐으나 말년의 초상화는 위대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18년간 로마에서 옛그림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라파엘로에 심취하였다 그후 귀국하여 고전파의 대가로 환영을 받았으며 르누아르 드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루브르박물관 입구에 유리로 된 피라미트

 

루브르박물관 입구에 유리로 된 피라미트  번개불에 콩 구어먹듯 박물관을 돌아 나오는 곳이 오히려 정문이란다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가 만들어진 발단은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발표로 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은 루브르 궁전 전체를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한 대 루브르 박물관 계획을 발표하고 수많은 응모자 가 있었지만  중국계 미국  건축가인 아이오밍페이 의 설계한 루브르 궁 뜰에 유리로 된 피라미드 를 설치하는 것 이었다 처음엔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가 있지만 1983년 착수 되고 여러곳의  출입구를 하나로 묶고 1200년 카페 왕조가 세웠졌던 성곽을 발굴하여 루브르 전체 보수를 20억 프랑이라는 많은 돈이 투자 되었다 한다 지금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듯 1546년 프랑스와1세가 만든  고색창연한 중세건물 앞에 현대식 유리로 된 조형물이 서있다  니케도 만나고 프시케도 만났다 마치 일장춘몽의 무릉도원을  빠져나온듯 멍멍해진다.언제 다시 올수 있겠는가??? 루브르에게 인사를 고하고 스위스 알프스를 가기위하여 바쁜 일정에 들어간다

내일은 어느 세상으로 들어갈 것 인가?? 

 

 

루브르 박물관 정문

 

 

 

 

 

스위스 알프스로 가기위해 고속열차를 탑니다

 

 

 

역 내부 그림은 역에서 이별 하는장면을 그린것인데 나는 공연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유대인을 호송하는 열차를 그린 것이냐  가이드에게 질문 하였다 그는 정색을 하며 그런그림을 어떻게 역사에 붙혀 놓겠느냐 며  역에서 외지로 떠나는 친지들과 이별하는 장면이다 하였다 ㅎㅎㅎㅎㅎ

 

 

스위스 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애정을 표시하는 젊은 이들 스위스로 가는 데 도시락을 하나씩 배식 한다  동승한 외국인들에게 냄새를 덜 피우기위  일시에 도시락을 먹기시작한다 짧은 시간내에 김치냄새 풍기며 식사후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한다 향나무와 돌 울타리 가 처진 마을 공동묘지 일하는 농부  작업을 마치고 뒤 뜰에서 등 물 하여 주는 노부부  끝없이 펼처진 밀밭 간혹 개울이 흐른다.

맞은편 좌석에 프랑스인  젊은 연인 같은 두사람이 가다가 종착역에서는 나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한다 

불편 하였을 터인데 그들의 여유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닮아야 하는데 내 표정은 경직되어 있다  더많이 웃자

 

 

모차르트의 Requi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