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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나폴레옹대관식 (서유럽여행59부)

훼브스 2020. 7. 24. 16:52

 

 

 

 

 

 

 

 

파리의 베르사유궁전은 금으로 칠하기 위하여 금이 수십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콩코트 광장에서는 루이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 의 슬픈 처형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서 출판 미술문화의 다비드의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에서 인용하면 개혁의 여건을

마련해 준 것은 오히려 루이16세 라고 한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미 왕실은 재정적자의 위기에 놓여 있었고 외국의 침략으로

정치적 경제적 파탄직전에 와 있었다

그는 외국인 재무장관을 고용해 개혁적인 경제 정책을 폈으며 솔선해서 농노를 해방했다

시민모두 교육을 골고루 받을 수 있게 했으며 귀족의 만행을 저지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과된 과중한 세금을 낮추고 정부의 적자를 부지들에게 떠맡기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가난하고 소외받은 시민이

아니라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부르주아 였다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압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전유한 교육제도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계층도 정치적 경제적 파탄의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

 

자연히 그들은 모두 루이16세를 표적으로하여 공격하게 되었고 모든 책임을 군주제에

돌리며 루이16세만 제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귀족 성지자 부르주아 지식인 계급이 합세하여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꾀하려는

목적을 은폐하고 표면적인 혁명의 바람을 일으켰다

 

모든 시민이 공감할 수 있는 이념을 내세워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 각계각층이 각자의

이익을 주장하기 위해 뜻을 모아 일으킨 혁명이었으므로 각계각츠이 충돌했고 이념과

정치에 있어서도 의견이 분분해 서로가 서로를 위협하고

살해하는 여기저기 단두대를 세우고 정적들을 처형하는 무법의 혼돈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대혼란을 틈타 나폴레옹이 득세를 한다

나폴레옹은 평민출신이라서 과거 왕실과는 달리 많은 왕족을 거느리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 부패에 이르지 않았다 외국의 침략을 막고 경제적 손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재위기간 3분의2를 프랑스를 떠나 전장에서 보냈다.

 

그는 전쟁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처럼 프랑스 영토를 확장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한편으로는 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법을 제정했는데 나폴레옹 법전은

민주주의를 기초로한 매우 진보된 법이었다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마치 유럽 전체에 대한 혁명처럼 나타난 것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의  나폴레옹

 

 

 

 

 

 

 

말메종성(Chateau de Malmaison)박물관에

전시된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캔버스에 유채 크기 259×221cm)

 

나폴레옹은 나귀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 한다

다비드가 의도적으로 용맹스럽게 말을 타고 넘는

모습을 그렸다.

 

 

 

 

상:성외관, 중:성뜰, 하:전시된 조세핀 초상 ,

 

 

 

말메종성(Chateau de Malmaison)1244년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은 오랜 시간 주인이 바뀌었다 1809년 나폴레옹은

이혼한 조세핀에게 이성과 그의 수집품을 주게된다 1814년 조세핀

이 사망할 때 까지 여기서 살았다

1906년 말부터 말메종성은 박물관으로 꾸며졌다

여기에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 전시되어 있다

1799년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Le Premier Consul)으로

임명 받은 나폴레옹은 이듬해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다

나폴레옹은 1797년 프랑스군을 이끌고 롬바르디아 지방을 점령하였으나

1800년경 프랑스군은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오스트리아군에 포위당했다

나폴레옹은 이위기에서 프랑스에서 가장빨리 제노아로 갈 수 있는

길은 알프스를 넘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기로

결정했다 18005월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은 비록 제노아에서 패배

했지만 그에이은 6월의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다비드의 자화상 1794. 루브르 박물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830-18251229)

신고전주의 양식에 속하는 유력한 프랑스 화가로 이시대의 탁월한 화가로 평가 받는다

파리에서 출생하였고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1774에는 로마상을

받았다 이듬해 로마로 유학하여 고대 미술에 큰 감명을 받았다 역사화를 그려 고전주의의

지도자가 되는 한편 근대 회화의 시조가 되었다

 

다비드는 이후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자 프랑스혁명의 전폭적인

지지자가 되었고 프랑스공화국하에서 사실상 예술의 독재자 역할을 하였다

로베스피에를가 실각하자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이후 나폴레옹 1세의 정치 체제에 협력했다

 

프랑스 혁명 때 에는 문화재 보호에 앞장섰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후 궁정 화가가 된다

다비드는 당시의 많은 지식인 기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도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틈타 혁명의 기류에 편승하여 영광을 누렸다

그가 그린 프로파간다 그림들이 프랑스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미학적으로 보면 타락한 한 에술가가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의 손에서 맹목적인 국수주의가 꽃피었고 나폴레옹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을 거처 칭송받는 영웅이 되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을 놓고 보면 다비드야 말로 미술사에 획을 그은 인물이 틀림없다
미학적으로 보면 타락한 한 예술가가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위 그림의 즉위식은 180412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대관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영웅교향곡의 악보 위로

펜을 내던져 버렸다 한다

 

 

 

 

 

나폴레옹을 존경하던 베토벤은 교향곡 3영웅이라는 표제가 붙은 이곡을 나폴레옹을

생각하고 그에게 헌정하려고 쓴 곡이었다 악보 표지의 상단에는 나폴레옹을 칭하는

보나파르트 하단에는 자기 이름을 써두었던 그는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하자격분한 나머지 결국 그도 별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제야심이나 채우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해 폭군이 될 것이다 말하고는

이교향곡의 표지를 찢어버렸다 한다

 

이후 나폴레옹을 증오한 베토벤은 연주를 강권하는 프랑스군을 피해 이웃 마을로

도망을 쳤다 한다

 

 

 

 

 

 

 

 

 

그림 중앙을 중심으로 나폴레옹과 황후 조세핀이 그주변으로 훗날 나폴리와 네델란드

왕을 지낸 나폴레옹의 형제들인 조제프와 루이가 보인다 그림 왼편에는 대관식에 참석도

하지 않은 마담메레로 불리는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황제의 권으로 그려져 있고

그옆으로 상원의원 비앵이 함께 한다.

 

 

 

 

 

 

 

 

 

그림 왼편에는 폴린 보르게제를 비롯한 나폴레옹의 누이들이 있고 조세핀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자루이와 결혼한 오르탕스드 보아르네가 왕자 샤롤의 손을 잡고 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중 왼쪽에서 2번째가 "폴린" 다비드가

사랑했던 여인(분홍옷으로 차별화 하였다) 인데

나폴레옹의반대로 맺어지지 않았다 한다

다비드는 나폴레옹 몰락후 브르쉘로 망명한다

 

 

 

 

평민 출신인 나폴레옹은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황의 참석을 요구했지만 교회로부터 독립적인 왕권을 원했기에 전통적인 대관식

에서처럼 교황이 씌워주는 왕관을 받지않고 스스로 왕관을 쓰는 쪽을 택했다

할 일을 빼앗긴 교황 피우스7세는 나폴레옹을 축복하는 손짓을 하며 그의 뒤쪽에 앉아있다

 

 

 

 

나폴레옹의대관식은 그 규모가 엄청나다 약6m의 높이에 폭이 거의10m에 달하는데

등장인물도 다양해서 귀족들 터번을 쓴 동양인과 하인 백성 등 많은 인물에 둘러싸여 있다

 

 

 

 

 

 

 

 

손짓으로 교권을 행사하는 교황

 

 

나폴레옹은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교황의 참석을

요구 하였지만 교회로부터 독립적인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스스로 왕관을 쓰고 조세핀에게도 씌워준다

교황은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 뒤에서 손짓으로

교권을 행사하는 데서 무력앞에 무력함을 보여준다 교황 피우스7

연민으로 애처롭기 까지 하다

 

 

 

 

 

원 안에 대머리 남자가 카이사르의 유령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관례 대로 한다면 황제가 되는 사람은 로마로 가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이 왕관을

머리에 씌워주는 관례를 깨뜨리고 황후 조세핀에게도 자신이 직접 왕관을 씌워주는

오만함을 보여주며 신의 대리인인 교황보다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군주의

카리스마를 과시한다 특이하게도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 옆에는 로마의 시저 카이사르

마저도 그려넣고 프랑스의 황제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효과를 노렸다

시저 가이사르의 불만에 찬 눈빛이 이채롭다

 

 

 

 

 

그림 오른편에 등을 돌리고 있는 두 사람은 나폴레옹이 총애하던 집정관 샤롤 프랑스아

레브른과 대법관 캉바세레스로 의전용 홀과 정의의 손을 들고 있다

그옆에는 의전장관이자 시종장으로 정보를 적군에게 팔아넘긴 간신 탈레랑이 있다

 

 

 

 

 

 

 

조세핀에게 황후의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첫 번째 아내는 조세핀(Josphine 1763-1814) 이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을 알게된 것은 총재정부의 주역이었던 바라스(Barras 1755-1829)

소개 때문이었는데 조세핀은 바로 바라스의 정부였다

더구나 자신보다 6살 연상인 조세핀에게 나폴레옹은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대는 나의 영혼을 빼앗아갔소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단하나의 대상이오

결국 두사람은 17963월 결혼하였다 하지만 조세핀은 나폴레옹을 사랑해서 결혼

한 것이 아니라 바라스를 위한 사교의 대상이었다 한다

결혼 후에도 다른사람과 염문을 뿌리고 애 까지 딸린 조세핀을 사랑하여 황후의

왕관을 씌워 주었으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 하는 사랑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왕들은 구중궁궐에 가두고 여자의 정절만 강요하였다

그러나 영웅들은 무언가 다른가 보다 데무친도 친구의 아이를 잉태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는가

그러던 나폴레옹은 제국의 후손을 생각하여 아들이 필요했던 나폴레옹은 1809

12월 조세핀과 이혼하고 18103월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루이즈(Marie Louise.1791

-1847)와 결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