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간신 김자점(남한산성4부)
2012년3월1일
도선인 14명 남한산성에 가다
봄볕이 따사로운 삼월 초하루 남한산성에 집합하여
남한루-침괘정-북문-서문-수어장대-압문-영춘정-남문
주차장으로 유턴 할 때 까지 딱따구리와 까치의 지져김을
들으며 사적지를 감상하다
행군중 대화중엔 남한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나?
서부터 시작되는 자연 병자호란에 얽힌 이야기중에 인조반정에
서부터 이괄의난으로 가다가 그전 야간산행시 조선에서 가장
간사한 奸臣이 누구인가를 말하다가.
1.김자점
2.유자광
3.임사홍
4.이완용
김자점을 크로즈업한 것이 생각난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참여해 인조의 신임을 쌓고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인조를 호송하였고 병자호란때는 서북도원수로 남하한 청군을 초기에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 크게 패하여 그책임으로 절도정배를
당하였는데 인조의 후궁 소원 조씨의 베게밑 송사로 바로 복권되었지만
그로부터 효종에 이르기까지 임경업장군을 고문으로 죽게하고 청나라역관
정명수와 결탁하여 청나라의 후원을얻어 권력기반으로 삼았다
그의 후견인 인조 사후 효종즉위1년만에 홍천으로 유배시켰는데 그곳에서
심복 이형장을 시켜 새왕(효종)구臣 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한다고
청나라에 고발하고 그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않은
장릉지문(1651년 송시열이 찬술한 (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에서 급히 군대와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였으나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의 활약으로 그음모를 좌절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아들 김익 이 수어청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송시열등 김진
원두표 제신들을 제거하고 송선군을 추대하려 하여 아들과 함께 참살
당하였다.
김자점은 뇌물과 아첨으로 오직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청에다 매국행위
까지 자행한 파렴치한 인물이었다.
배우가 분한 김자점상
丙子胡亂때 조선군의 명장이었던 임경업장군이 인조24년
1646년에 세상을 떠났다 장군은 25세때 무과에 급제하여 1624년 이괄의 亂을
평정 하는데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막고 원병을
청하였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남한산성 까지 포위되었다
1634년 명나라로 망명 明軍의 총병이 되어 청병을 공격하다가 포로가 되어 옥에
갇혔다가 결국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형리에게 죽임을 당했다
임경업이 문초를 받으면 무금의처도 문초해야되고 무금의처가 김자점에게 알렸다고
하면 김자점도 임경업장군의 탈출을 도운꼴이 되어 그러면 심기원의 당으로 몰려
자기도 죽어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었기 때문이었다
1646년 6월20일 장군은 심기원사건의 연루및 자기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어겼다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 刑吏의 모진 매를 이기지못해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장군의 나이 53세 였으며 고향인 충주달천에 장사
지냈다
임경업 장군동상
오늘은 삼일절 애국 선열들의 만세 소리가 들리는 듯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역사는 기억한다.....
제1주차장 옆에 보면 포청골이란 표식판이있다
이곳은 포도청이 있어 기해 박해때 천주교인들을 잡아다 주리를 틀고 주차장엔옥사가 있어 옥에 가두었다가 계곡물에 목을첬다 하는데 그곳에 천주교 건양탑이세워져있다
새로 단장된 한남루 앞 종각
단청 까지 끝낸 한남루
남한산성 탐방후 분원리 붕어찜 먹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