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여행

진랍풍토기의 건축개요(캄보디아여행3부)

훼브스 2020. 7. 20. 14:46

 

 

 

 

 

 

 

 

 

 

 

 

 

건축시기 : 12세기말~13세기초

 

건축왕: 자야바르만 7세   (Jayavarman VII (1181~1220)

 

종교 : 불교

 

건축양식 : 바이욘

 

명칭

: 앙코르란 "도읍지" 톰은 도읍지" 톰은 "거대하다", 즉 도읍지

 

          이름 자체가 "거대한 도시"라는 뜻이다 

 

 

 

 

 

 

 

흰앙코르돔의 대표적인 건물 바이온 신전 약20만개의 바위를

끼워맞춰 멋진 조각상을 연출해 내는 유래없는 걸작품이다

저 멀리 보이는 탑들 위에는 관음보살상이 얹어져 있으니

바로 바이욘의 미소들이다


 

 

"왕궁의 중앙에는 황금탑(바이욘을 지칭)이 하늘을 찌르며 서 있고 그 옆에

 

는 20여개의 탑과 수백개의 돌로 된 방들이 에워싸고 있다. 그 동쪽에는 황

 

금 사자 두 마리가 지키고선 황금 다리가 있고 양쪽에는 8개의 황금 부처상

 

이 돌로 된 방을 따라 나열되어 있다. 황금탑 북쪽에는 청동으로 된 탑(바푸

 

온을 지칭)이 솟구쳐 있고 그 북쪽에는 황금탑(바이욘)보다 더 높을 지도 황

 

금탑(피미아나가스를 지칭) 지칭)이 역시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데 그 아래

 

에는 10개도 넘는 방들을 가진, 참으로 장관인 장면을 연출한다. 이 탑에서

 

북쪽으로 400m 즈음에는 왕의 거처가 있으며 왕궁 위쪽에는 또 다른 황금탑

 

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다. 이러한 광경을 보는 외국상인들은 입모아 "캄

 

보디아는 대단히 부유하고 우아한 나라"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1296년부터 2년간 앙코르 톰에 거주했던 원나라 사신(세관원) 주달관(Zhou Taguan)의

 

문자 기록은 당시의 앙코르톰을 알게 하는 대단히 중요한 사적으로 흔히들 앙코르톰

 

묘사에 인용한다. 예전의 눈부신 황금 도금은 죄다 사라졌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우리는

 

앙코르톰의 장엄함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개요 : 크메르 왕국의 최전성기이며 마지막

 

도읍지로서 광영을 누렸지만 엄청난 예산을 메우지 못해 몰락의 길을 재촉했던 앙코르

 

톰은 600년 왕조의 위대했던 순간을 재현한다. 톰의 면적은 145.8헥타르 약 45만평에

 

달하는 방대한 도읍지로 자야바르만 7세의 독특한 건축이념으로 빚어진 불교 건축의

 

승화된 걸작품이다.

 

원래 이곳에는 바푸온 등의 신전이 서 있었고 그들 신전을 포함하여 30년에 걸쳐

 

거대한 도읍을 축조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복구한 것이다.

 

톰의 건축물을 대표하는 바이욘을 예로 들자면 유래없는 독특한 구조물로서 일반적인

 

건축법 즉 벽돌을 쌓아 석회나 진흙을 발라 굳히는 그런 공법이 아닌, 서로 크기가

 

다른 큼직한 바위들을 어떤 접착제(진흙이나 석회, 못 등)를 사용치 않고 그저 비규칙적인

 

돌들을 쌓아올리면서 자연스레 의도적인 형상을 만들어내는.... 유래없는 신비한 건축이란

 

 점에서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다.

 

 앙코르와트가 치밀한 설계 하에 짜여진 인공적인 건축물이라면, 톰의 중심인 바이욘은

 

자연미 그대로를 간직한 건축물로서 높게 평가 받는다. 앙코르와트가 지엄한 힌두교

 

사원이라면 앙코르톰은 밑둥은 힌두교에 위쪽은 불교를 얹은, 즉 힌두교 위에 승화된

 

불교의 승리로 장식된다. 그리고 그 불교의 관음보살상은 바로 자야바르만 7세의 모습이니

 

 자화자찬의 정도가 이집트 최강의 파라오 람세스 2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형태 : 앙코르톰은 한 변의 길이가 3km인 정사각형 구조를 취하며 내부는 정확하게 4등분

 

여 그 정 중앙에 바이욘 신전을 앉혔다. 이 구조는 앙코르의 신전에서 흔히 보는

 

 퀸퀑스(Quincunx) 스타일로서 사방에 4개의 대륙을 의미하는 4개의 탑과  중앙

 

에 메루산을 놓은 형상을 재현한 것으로 도시의 4구역은 4개의 세상이며

 

바이욘은 메루산을 형상화한 배치도이니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신전인

 

셈이다. 바이욘 서북쪽은 앙코르톰이 건설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바푸온

 

신전과 삐미아나까스 등과 함께 왕궁이 있었고 동북쪽은 왕궁의 확장 부분으로

 

 테라스와 왕실 의식을 치루던 왕실 정원(왕의 광장)이 있다. 그외 남쪽 지역에

 

는 일반 가옥들이 있었으나 신전 이외는 진흙, 벽돌, 목재 등의 건축재를 사용했

 

기 때문에 1,200년 세월을 감당치 못하고 모두 유실되어 지금은 거대한 나무들

 

로 꽉 찬 밀림을 형성한다. 그리고 성벽 밖은 해자가 찰랑이며 드넓은 논밭이

 

펼쳐지면서 왕국의 부를 과시했지만 지금은 극히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앙코르톰의 인구 : 심혈을 기울려 지은 앙코르톰에 아무나 거주시켜 격을 떨어

 

뜨릴 자야바르만 7세가 아니다. 약 45만평의 부지 중 절반은 왕궁과 신전이 차

 

치했고 나머지 절반에 거주 가능한 사람은 왕족, 귀족, 승려들 그리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하인들뿐이었고 일반 백성들은 성문밖에 거주했다. 참파왕을 사살하

 

고 전쟁을 종식시킨 후 식민지로부터 공물을 받아들이던 최전성기에 앙코르톰

 

내의 인구는 약 10만명까지 증가했다고 하니 톰은 번성한 도읍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도읍지를 둘러싸고 거주하던 도시주민 수는 100만명에 달하여 당시

 

 세계 어느 도시의 인구수와 비교해도 최고를 뽐냈다고 한다.  

 

 

감상 : 앙코르톰 자체는 도읍지의 개념이며 그 도읍 속에 포함된 건물들은 따로

 

 설명하게 되므로 앙코르톰 감상은 성채와 성문 정도이다. 그래도 자야바르만 7

 

세의 건축이념과 종교관이 어울어져 하나하나 종교적 의미를 품고 있으므로

 

그 의미와 함께 읽으면 재미 있다. 

 

 

①성벽 : 앙코르톰은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방어 성채 형상을 취한다. 끊

 

임없는 전쟁을 겪어온 그로서는 신성한 톰을 수호할 난공불락의 성벽과 해자가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앙코르톰은 정확하게 정사각형을 취하며 한 변의 성벽

 

은 3km, 철분을 다량 함유하여 금강석처럼 단단한 붉은 라테라이트 벽돌을 8m

 

 높이로 쌓았으니 그 위용만으로 뭇사람을 압도했을 것이다. 여기에 성벽의 외

 

곽을 둘러 넓이 100m의 해자를 팠으니 물에 젖은 적군은 성벽을 기어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야바르만 7세는 챰족의 난을 피해 한동안

 

 프레아칸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야만 했다.  

 

 

 

매일 몇 번씩 드나들 게 될 앙코르돔의

남쪽 고푸라 탑문과 유해교반 다리 왼편이

오른쪽이 악마들이다

 

 

②다섯 개의 성문앙코르톰에는 다섯 개의 성문이 있다. 위 지도에서 보다시피

 

동서남북 각 방향의 중앙에 각각 하나씩. 그리고 동쪽에 승리의 문을 하나 더 갖

 

고 있다.

 

 

성문은 23m 높이. 성문벽은 번개와 하늘의 신 인드라(Indra)가 바즈라유다

 

(Vajrayuda, 금강저, 벼락을 쏘는 무기)를 든 채 자신이 타고 다니는 영물 코끼리

 

인, 코가 셋 달린 아이라바타를 타고 선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밑단은 아이라바타의 코가 연꽃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멋진 성문 위에는 바위로

 

어 맞춘 4개의 얼굴상이 얹혀져 각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마치 활짝 핀 연

 

꽃 모양새처럼, 거대한 왕관처럼 독특한 형상을 취한다이것이 앙코르 건축물이

 

대표하는 고푸라 탑문의 전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앙코르톰은 건축물의 구조나 위치, 장식 등 어느 것이든 신화적 의미를 내포하

 

여 설계했으므로 그 상징적 의미와 함께 설명을 들어보자.

 

◎인드라 조각의 성문  인드라는 약한자와 중생을 보호하는 신으로 천상천하

 

에서 가장 강력한 벼락을 주무기로 사용한다.

 

불교에서도 사천왕(四天王)을 지휘하고 32천(天)을 다스리며 세상의 갖은 악마

 

들을 물리치고 인간을 보호해주는 12천(十二天)의 하나인 제석천(帝釋天)으로

 

숭배된다. 챰족의 대대적인 침범에 시달리고 결국 수도를 떠나야 했던 자야바르

 

만 7세에게 금강저를 들고 성문을 지키는 인드라야 말로 수도를 지키고픈 그의

 

염원의 발로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하늘의 제왕 인드라 신 위에 자야바르만 7세

 

의 얼굴상(앙코르톰 내 건물들에 얹혀진 관음보살 얼굴상은 자야바르만 7세의

 

상징적 얼굴이라고 하니)이 얹혀져 있으니, 가히 자신의 신성숭배의 경지에 이

 

름을 볼 수 있다.

 

 

◎해자(Moat) 지금은 대부분 말라 버렸고 남문 일대 등에서만 간신히 볼 수 있

 

지만, 앙코르톰 성벽 주변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무려 100m나 되는 폭의 해

 

자(물을 가둬서 양쪽을 격리 시키는 기법)를 두고 있다. 해자는 신성한 것의 격

 

리, 신계와 인간계의 격리를 위한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으니 앙코르톰은 왕궁

 

의 신성함을 상징한다. 이 해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앙코르 신전들의 해자

 

기법은 서양으로 전파되어 중세 성벽 주변에 꼭 설치하는 수비법의 하나였다.

 

이 해자 기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유럽과 중동을 지배했던 이가 오스만 터키의

 

슐레이만 대제였다. 동서양을 다 합쳐도 앙코르톰의 해자만큼 넓은 폭을 가진

 

곳은 찾아보지 못한다. 앙코르 지역은 평지 위에 불룩 솟은 몇개의 산을 제외하

 

곤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는 평야이다. 이런 지역적 약점을 갖고서는 외적의 침

 

입에 대처하기 힘들기 때문에 야소바르만 1세의 경우도 도읍지를 버리고 프놈바

 

켕 산에 성채도시를 지어 외적에 대항했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앙코르톰을 지

 

키기 위해 적들이 도저히 접근 불가한 드넓은 해자를 만들었으니 그의 전술전략

 

의 뛰어남은 이렇게 해자 하나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해자의 종교적 의미는 해자

 

를 장식한 "젖의 바다 휘젖기 조각"으로 대변한다.

 

◎젖의 바다 휘젖기 조각

자야바르만 7세의 건축적 재능은 해자를 단순한 전략

 

적 의미로만 놔두지 않는다.

 

해자 위로 놓여진 다리 또한 기막히다. 해자 다리의 조각은 힌두교의 창조 전설

 

"젖의 바다 휘젖기"를 연출한다. 원래 신이나 악마들도 제한된 생명을 갖고 있어

 

영생의 약을 구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만다라산을 바수키(또는 나가, 뱀)의 몸에

 

묶어 생명의 바다를 일천년간 휘젖는다는 내용이다. 나가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

 

의 손녀가 낳은 영물로서 물의 정령이며 해자의 수호신이며 불교에선 명상중인

 

부처를 보호했던 무찰란다이다. 그 나가로 하여금 해자 앞을 지키게 한 덕분인

 

지 1,2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앙코르톰의 완벽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시

 

엠립쪽에서 왔을 때를 기준으로 남문을 보면, 왼편의 54개 석상은 신들이다. 전

 

신에 밝은 색채를 띄며 온화한 표정에 끝이 뽀족한 원추형 모자를 쓰고 있다. 오

 

른편의 54개 석상은 색채는 물론 툭 불거져 나온 눈 등 표정도 험악하여 한눈에

 

악마들임을 알아본다. 신과 악마는 동맹을 맺고 바수키를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박자를 맞춰 휘휘 젖는다. 즉 앙코르 톰을 에워싼 해자는 곧 생명의 원천이요 우

 

주의 바다라는 상징성을 띄고 있다. 이들 석상의 일부는 원상보

 

구를 위해 또는 보존을 위해 별도 보관하여 모조품으로 대체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앙코르 톰 주변에는 드넓은 논밭이 펼쳐져 식량 조달도 쉬웠다고 하는데

 

이 해자는 단순히 전략적 목적 이외에 농경지에 물을 조달하는 주요 수원지 역

 

할도 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것 외에도 앙코르 지역 북쪽에 자야타타카라는

 

저수지를 만들어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키도 했다. 드넓은 해자를 바라보며 선

 

인드라 신은 보호자 역할 이전에 홍수의 신이요 비의 신으로 농경민들이 숭배하

 

던 신이니 이 물은 인드라 신의 권능을 듬뿍 담은 생명수이며 이 물로 영근 쌀은

 

인드라 신의 은총을 담은 소중한 양식이다.

 

 

◎승리의 문(Gate of Victory) : 왕궁의 정문(동문)과, 로열박스와 직선으로 연

 

결되어 있는데 원래 전승하여 돌아오는 병사들이 이 문을 통해 위풍당당하게 들

 

어와 거대한 테라스 앞 넓은 광장(왕의 광장)에 사열하여 왕에게 전승보고를 드

 

리는 용도로 만들어졌으니 승리의 문으로 출입하는 자의 영광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앙코르의 기타 유적들이 승리의 문 동편에 주로 위치하여 오늘

 

날 관광객들도 남문과 승리의 문을 가장 많이 관통하게 된다.

 

◎남문(Southern Gate) : 시엠립쪽에서 오면 이 문을 관통해야 하므로 관광객

 

은 하루에도 서너번씩 남문을 통과하게 된다.

 

앙코르 유적 매표소를 지나 싱그런 향기를 뿜는 숲길을 달리다보면 저어만큼 거

 

대한, 그리고 기절할만큼 멋진 고푸라 문을 맞이한다. 관광객은 이 남문을 대표

 

로 하여 앙코르톰의 성문 구조를 이해하면 된다.

 

 

tip :*이른 아침에 남문을 지날 때 사진을 찍어라. 정오에는

 

조각의 이미지가 흐리게 나온다(경험상).

 

*차는 남문 앞에 대기 시키고  석상을 감상하면서 다리를 건느면서 위의

 

설명을 대조해 본다. 

 

◎북문 : 고즈녘한 풍경 속에 자리한 북문은 프레아 칸과 닉 포안으로 갈 때 통

 

과한다.

 

◎동문 : 동문은, 승리의 문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어 쓰임새가 별로 없고 시체나

 

쓰레기를 내가는 허드               레 용도로 사용되었다.

 

◎서문:  앙코르톰에서 서 메본과 서 바라이로 연결되어 있다. 

 

 ③도로 : "모든 길은 바이욘으로 통한다...." 정사각형의 거대한 성곽도시 앙코

 

르톰에는 정중앙의 바이욘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쪽 곧은 25m폭의 4개의 도로가

 

나 있고 로열박스에서부터 승리의 문까지 이어지는 또 하나의 도로까지 합쳐 모

 

두 5개의 도로가 도웁지를 관통한다. 그 도로에는 통행인을 위해 121군데의 쉼

 

터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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