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수어장대
오늘 외손녀와 남한산성에 갔다산채 정식을 먹고 동문으로 향하였다
남한산성은 한강유역이 내려다보이는 서장대를 비롯한 주변 산능선을 따라 석축을 쌓은 둘레 8km의조선의 대표적 산성인데 동서남북 4대문중 동문은 좌익문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동문은 남문과 함께남한산성에서 사람왕래가 가장 많았던 문이다
동문은 광주지방과 연결되는 교통로인데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4만의 조선군과 3천의 팔기군이 맞붙어 철저한 조선군의 패배로 인조는 항복하게 된다.
여기 그시대 격동의 순간을 헤쳐 가던 2인의 삶을살펴본다
송시열은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구룡촌(九龍村)에서 태어났다
송시열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후에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세웠으나 여의치 않았다
우암에 대하여는 양극적인 평가가 이어진다.주자학을 신봉하여 명분을 앞세워 명을 지지 극단적인 싸움을 주장하다가인조가 항복하게 되자 항복한 임금은 모실수가 없다고 낙향한다
그반면 이경석의 아름다운 충심과 사랑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삼전도 비문 작성하는데!!!! 철저하고 완벽한 봉건 사회 선비들이 글을 목숨보다 더 중요한 명예로 생각하던그당시에는 후대 자손들 에까지 오명을이어줄 누르하치 칭송 비문을작성하고 볼모로 끌려간 많은 사람들을 구한다...
그의 실질적이고 현명한 대 청 외교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고 나라를 구한것으로 명분만 쫒아 백성을 도탄으로 빠지게 하고 자신만 고결한 품의를 지키려 했던 송시열과 완전 배치되는 대청 자세 였다
여기 이경석의 활동사항을 자세 기술한 내용을 모셔와 올려봅니다
이경석
역지사지(易地思之) 이경석(李景奭) (3)
3. 사문사건(査問事件)을 통해 본 나라사랑
병자호란이 끝나고 1641년 전란의 시대를 산 선비답게
국가와 고난을 함께 한
이경석은 이사(貳師)가 되어 청(淸)나라의 인질로 잡혀 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있는
심양으로 가서 세자를 보필하게 된다.
당시 심양(瀋陽)에는 고관(高官)의 자제들, 김상헌,최명길을 비롯한
대신(大臣)들, 세자(世子) 등 다수가 인질로 억류되어 있었는데, 이경석은
이들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김상헌(金尙憲), 박연(朴演), 조한영
(曺漢英)의 귀국을 성사시키고 함께 잠시 귀국하였다.
병자호란으로 무려 60만 명의 남녀 백성이 청국에 끌려갔다. 포로로 끌려간
아녀자들을 데려오려면 속환이하여 돈을 치러야 하는데 이렇게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는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라고 해서 온갖 능멸과 고초를 겪고
‘화냥년’으로 정절을 지키지 못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돌아오는 환향녀들이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다시 순결해질 수 있다고 하였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사대부들은 죽음을 강요하였고, 척화론자들은 재가한 여자의
자식들이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식들마저도 관직에
등용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경석은 이 주장에 대해서도 여자의 재가와 포로로 끌려간
일은 경우가 다르다며 임금을 설득했다.
이듬해인 인조 20년(1642) 다시 심양으로 갔는데 이때 사건이 발생했다.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정박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는데
그는 명나라의 잠상(潛商)이 우연히 정박한 것이라며
시종 조정의 연관 사실을 부인했으나 구금되었다.
만주 봉황성 등에는 조선의
재상과 삼사(三司)의 관원 중에 구금된 이가 많았는데 사태가 날로 험악하여지자 각각 뇌물을 써서화를 덜어보려 꾀하면서 그를 보고도 남과 같이 하라고 함에 ‘비록 협박 공갈을 받을지라도 죽기까지 는 아니할 것이다. 하물며 나는 동궁(東宮)의 사부(師傅)로서 뇌물 쓰는 길을 여는 짓은 결코 할 수 없다’ 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결국 8개월 만에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 는 영불서용
(永不敍用)조건으로 겨우 석방되어 귀국했다.
“이제 살아서 돌아오긴 하였으나 복명하지 못하며 다시 용안을 뵙는다는 것도
기약할 수 없으니, 신의 죄과가 더욱 무겁습니다. …
종이를 앞에 대하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조실록 20년 12월17일)라는 글은 그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1644년에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리하였다
효종 1년(1650) 김자점(金自點)이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북벌 계획을 밀고하면서
청나라 사문사(査問使) 6명이 조사차 의주로 나왔다.
이경석이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라고 말하자 효종은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 (효종실록 1년 2월8일)라고 칭찬했다.
사문사 6명을 맞으러 의주로 달려간 이경석이 청천강을
건너며 읊은 애국시에서
우리는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임금을 향한
충절과 단심을 엿 볼 수 있어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이경석의 시(詩) ...... 청천탄야도 (晴川灘夜渡)
장하월흑우사사長 河月 黑 雨 絲 絲 청천강의 밤은
비는 쉴새없이 나리는데
인어탄성공개시 人 語 灘 聲 共漑 時 민심은 흉흉하고 물소리도 요란하다.
반야직장충신섭 半 夜 直 將 忠信 涉 구국일념으로 야반에 이 강을 건너가네
차심수직구신지 此 心 誰 直 鬼神 知 이 마음은 오로지 천지신명만이 알 것이네.......
조선 효종1년(1650), 이언표(李彦標),역관 이형장(李馨長)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서
사문사를 의주(義州)로 파견하자 효종(孝宗)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풍전등화의
국운을 앞에 두고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며 저들을 맞으러 달려간 이경석이
밤길을 재촉하며 청천강(지금의 평안도)을 건널 때 지은 시(詩)이다.
청나라 사신들이 서울에 도착하여 남별궁(南別宮 ..지금의 조선호텔)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 판서 및 양사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계획의 전말을 사문, 반청의 책임을 효종에게 물으며 치죄하고자 하여 조정은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경석은 끝까지 국왕을 비호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왕은 모르는 일이고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태연하게 주장하여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청나라 사신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이경석을 ‘대국을 속인 죄’를 물어
극형에 처하려 했다.
효종이 그의 구명을 간청하며 막대한 뇌물을 전달한 덕분에 청제의 명을 받아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의주의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갇혀 앞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백마산성으로 끌려 갈 때 효종은 친히 편지를 보내어
“내가 어두워 나라 일을 잘못하여 오늘날의 변을 당하게 되어 매우 통탄하노라. 국경산천이 아득하게 먼데 그리운 생각이 간절하나 천도(天道)가 밝으니 서로 만나볼 날이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스스로 몸을 아끼라”
하고 표피(豹皮)와 납약(臘藥)을 보냈다.
이경석은 다시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옥 1년 만에 석방되었는데,
귀국길에 사민(士民)들이 길가에 몰려들어 환호했다는 데서 그의 신망을 알 수 있다
청나라 사신도 " 동국(東國)에는 홀로 백헌 이경석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며 감탄하였을 만치 그의 인품과 충성심을 높이
사고 존경의념이 있었기에 이경석의
구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653년(효종 4)에 겨우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59년에는 영돈녕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8년(현종 9) 인신(人臣)으로는
세기적 영예인 궤장(궤杖)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숙종 대를 지나가면서 점점 명분론자들의 세력이 커지고,
이경석의 신도비는 깎여진다. 참으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지어진
삼전도 비문은 현재 백헌의 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 연유 또한 짐작이 간다.
우리는 백헌 이경석의 뜻을 이해하고 그를 기억하며 바르게 양 쪽의 입장에서
공평한 역사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경석이라고 청(淸)나라가 좋아서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조판서 최명길과
승려 독보(獨步)를 명(明)나라에 밀파한 것이 이를 말 해 준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조정에서 독보(獨步)를 밀파한 이유는 "조선의 세력이
곤궁해서 청(淸)나라의 통제를 받는 이유를 설명" 했다는 것이다. 이 때
이경석은 두문불출하면서 찾아
오는 사람도 물리치고 하루 종일 울었는데, 가족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고 한다.
만약 밀파 사실이 청(淸)나라에 감지되면 국가가 흔들릴 사안이었다,
게다가 명(明)나라는 " 이전의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니 기어코 함께 협공하자. "
고 답사를 보냈다. 인조실록은 " 그 일이 비밀에 붙어져 사람들이 알지 못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이라는 책에 보면 ‘백헌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
50년 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다툰 적이 없었던 분’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가 지은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의 고결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한 수의 시가 ‘새벽에 일어나서’라는 작품이다.
曉起 효기
西舍鷄三唱(서사계삼창) 서쪽 집에는 새벽이라 닭이 훼를 치고
東峯月一眉(동봉월일미) 동쪽 봉우리에는 달이 살짝 걸려 있네
秋空正澄廓(추공정징확) 가을 하늘은 참으로 맑고도 드넓은데
心亦澹然時(심역담연시) 이제 내 마음도 참으로 담담해지네.
이 시의 중심 단어는 ‘담(澹)’ 자이다. 이 글자는 담박할 담, 편안할 담,
싱거울 담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이 시에서 이 글자는 그 뒤에 ‘연(然)’ 자를 더해 욕심이 없이 담담한 모습, 또는 욕심이 없이 깨끗한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로 쓰이고 있다. 깨끗하고 청백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백헌 이상(李相)의 운에 차운하다 <청음집>
小屋無燈坐夜深 소옥무등좌야심 작은 집에 등불 끄고 깊은 밤에 앉았거니
病來心思百憂侵 병래심사백우침 병든 뒤로 이내 심사 온갖 걱정 몰려오네
翼輪廻?峯頭月 익륜회안봉두월 둥그렇게 회안봉 위 떠오르는 보름달은
?見孤臣萬里心 즉견고신만리심 외론 신하 만리 밖을 떠도는 맘 비춰주리
회안봉 :
중국의 형산(衡山) 남쪽에 있는 산으로 기러기가 가을이면 이 곳에 와서
이 봉우리를 넘지 못하고 그냥 있다가 봄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산
함경도 경성경성에도 안회산이 있음.
그는 기질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남을 억누르거나 문장으로 뻐기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었다.
병자호란 때 척화론자와 주화론자로서 서로 대립하였던 청음 김상헌과 백헌 이경석은 그들의 호만큼이나 서로 다른 기질을 가졌으면서도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또한 배청숭명의 외교로선에 있어서도 서로를 존경하였고
애국애민의 길을 같이 갔던 사이였다.
그가 다툰 대상은 불의요 오랑캐였을 뿐이다.
백헌는 부친의 임지인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났고 주로 현재의 서울 정릉에서
살았으며 뒤에 취현동(聚賢洞)으로 옮겨 살다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현재의 분당구인 광주부(廣州府) 낙생면(樂生面) 선영에 모셨다.
숙종(肅宗)이 지은 詩
숙종(肅宗)이 이경석의 문집을 읽고 친필로 그 느낌을 적은 시부(詩賦)로, 이경석의 후손들에게 하사하였던 것이다.
후손들은 참죽나무 필갑에 넣어 보관하고 있으며, 뚜껑에는 숙종성제보묵(肅宗聖製寶墨)이라고 전각(篆刻)하였다.
觀白軒集有感賦詩 백헌집을 읽고 느낌이 있어 적다
다년구멱득하지 多年求覓得何遲 오래도록 그대의 시(詩)를 찾았다가, 이제야 구해 놓았더니종일피간불자피 終日披看不自疲 온 종일 책장 넘기며 읽어도 피곤을 모르네충관애군장진견衷款愛君章秦見 임금 사랑하는 깊은 마음은 글 곳곳에 보이고성순체국귀신지 誠純體國鬼神知 나라를 내 몸처럼 아끼는 마음은 귀신도 알았네선조사장융은례 先祖賜杖隆恩禮 선왕(현종)께서 궤장을 내리시어 큰 은덕을 베푸셨고성조반감하총사 聖祖頒柑荷寵私 인조께서 감귤을 내리셨다니 남다른 총애를 입었구나.덕협태사현재상 德協台司賢宰相 덕으로 삼공(三公)을 화합시킨 어진 재상이었으니송시문정가방지 宋時文靖可方之 송나라 문정공(文靖公)에게 견줄 만 하네.
평생 《소학》과 《논어》를 거울삼아 수양하였고, 노년에는
《근사록》과 주자제서(朱子諸書)를 탐독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특히 뛰어났는데 그의 시문은 경학(經學)에 근본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문장은 “기력(氣力)이 웅혼(雄渾)하여 광화현란(光華絢爛)하며,
시도 활동양염(活動穰#염26)하다. ”는 칭송을 받을 만큼 필력이 뛰어나
〈삼전도비문〉 등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생애는 17세기의 초기·중기에 해당하는 인조·효종·현종의 3대 50년에 걸쳐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名相)으로 보냈다.
저서로는 《백헌집》 등 유집 50여권이 간행되었고, 조경(趙絅)·
조익(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 長陵誌狀》을 편찬하였다.
삼전도 비문
글로는 〈삼전도비문〉이 있으며,
글씨로는 좌상이정구비문 (左相李廷龜碑文)· 이판이명한비
(吏判李明漢碑)·지돈녕정광성비문(知敦寧鄭廣成碑文)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경석의 묘소
http://blog.daum.net/0118983530/8438687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장장이에게 업힌 인조(남한산성7부) (0) | 2020.08.01 |
---|---|
광주시립 광지원농악단 (남한산성8부) (0) | 2020.08.01 |
적장의 편지(남한산성9부) (0) | 2020.08.01 |
조선의간신 김자점(남한산성4부) (0) | 2020.08.01 |
가을섬의낙조 (0) | 2020.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