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와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현인(4부2)

훼브스 2020. 8. 2. 14:11

 

 

 

초등3학년때 담임선생은 아름답고 지적이며 가끔은 우수에 졌어 창밖을 보고 계셨다...현인선생님의 노래가 나오면 그분 생각부터 난다.그분은 현인선생님의 가족 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인 [玄仁] 

 1919 경남 구포~2002. 4. 13 서울.대중가요 가수

.본명은 현동주(玄東柱)이다. 1938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우에노[上野]음악학교에서 성악과 플루트를 배웠다....

 1)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보았다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피눈물을 흘리면서 일 사 이후 나 홀로 왔다

2)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보았다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 사 이후 나 홀로 왔다.

 

 

 

 

 

 

 

 

 

 

 

1950년 12월20일 흥남부두에 도착해 쌍안경으로

해변을 살피던 미국 국적에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레너드 라루 선장은

인산인해를 이룬 피난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북한피난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다.

그들 옆에는 놀란 병아리처럼 그들에 아이가 있었다.

(빌길버트 의 기적의 배)중에서,

 

당시23살의 일등선원이었던 로버트러니(현재79세 - 변호사 ) 는

1만 4000 명을 구조해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올려져 있다.

모든 인원이 승선하는데 16시간이 걸렸으며.

당시 영하20도의 눈보라가 몰아치는 상황이었다한다.

그리고 배에 탄 피난민들은 거제도로

보내졌으며. 철수작전 시 흥남부두는 함포사격으로

폭파되었다고 합니다.

<흥남부두철수작전에서 인용함>

 

 

 

기적의 배와 크리스마스 캐롤

1만4천명 갑판에 촘촘히 선채

한사람 희생 없이 거제로

 

 

6.25전쟁 당시 ‘기적의 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는 것과 다른 맥아더의 한국전쟁’이라는 것을

쓰면서 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동부전선으로 진격했던 알몬드 장군 휘하의

미10군단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12월 10일부터

흥남부두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해안에 미조리 함을 비롯한 미해군의 주력부대가

온통 집결하여 흥남외곽을 둥글게 화망폭격을 해

대면서 흥남에 집결한 부대를 질서 있게 철수시켰습니다.

한국인 피난민들도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동부전선에

들어가 있는 군인은 12만 정도였는데 이들과 함께

탱크, 대포, 장갑차, 차량, 화약 등을 철수시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美해군기록에 의하면 이때 해군철수작전으로

철수한 군인수는 10만5천명, 화물은 탱크 1만7천5백대,

포탄 등 군수물자 35만톤, 그리고 민간인 9만1천명입니다.

철수 군인에 거의 맞먹는 민간인 피난민을 실어날았습니다.

세계군사 역사상 군인과 맞먹는 숫자의 민간인

피난민을 철수시킨 예는 없습니다.

 ▲ Captain Leonard

LaRue는 전쟁의 충격

으로 천주교 monk가

됐다.

피난민을 실어 나른 배중 ‘기적의 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Meredith Victory라는 1

0만톤급 유조선인데 이 배는 당시 미군에게 기름을

보급하기 위해 흥남에 들어갔습니다. 철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름을 내려줄 필요가 없어

회항할 예정이었습니다.

12월20일이었는데 선장 Leonard P. Larue씨는 바다를 행해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민간인 피난민들을

멀리서 보면서 도무지 뱃머리를 돌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배는 유조선이어서 사람을

태울 수 없게 되어있고 사람을 태우면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이어서 고민했습니다.

 

선원30여명만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전부이고

유조선이기 때문에 기름 냄새가 독해 사람을

태울 수 없었습니다.

화재위험도 큽니다. 뱃머리를 차마 돌리지 못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고민하고 있던 중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저 사람들을 너의 배에 태우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John Childs대령의 도움을 받아가며

유조선에 임시 사다리를 만들어 유저선위에

피난민을 태웠습니다.

1만4천명을 태웠습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운 배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배에 오른 1만4천명은 앉을 자리 없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꼿꼿이 섰습니다. 화장실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으며 통역자도 없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이 붙어 앉은 자리에서 볼일을

그대로 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배에 움직일 수 없이

앉아 있는 한국의 피난민들 사이에서 예수님이

함께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 1950년 12월 함경도 흥남 철수 당시 화물선

메레디스 빅토리 호를 가득 메운 피란민들 이들은

12월 21일 흥남을 출발하여 아주 느린 속도로 부산으로

내려와 12월 24일 밤(크리스마스 이브) 거제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이 3백톤의 기름화물위에서

모진 추위와 먹을 것도, 화장실도 없이 3일을

여행하여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무사히

거제항에 도착했는지 모릅니다. 배위에서

5명의 아기도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의

한명은 신부가 되어있습니다.

 

선장 레너드 라루씨는 너무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전이 끝난 후 1954년 수도사가 되어

지난 2001년 천국으로 갈 때까지 단 한번 워싱턴에

나온 것 외에는 수도원에 조용히 머물렀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나는 가끔 그 항해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작은

배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싣고 끝없는

위험을 넘으면서 한 사람의 영혼도 상하지 않고

향해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는 그 크리스마스

파도위에서 분명하고 잘못일 수 없는 메시지가

내에 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한국 해안의

을씨년스럽고 비통한 바다위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나의 배의 키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워싱턴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는 동안

이 신부님을 한번 찾아보기 위해 애쓴 일이 있습니다.

좀 더 열심을 냈더라면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보스턴의

어느 수도원에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결국

전화통화 한번 하지 못했고 물론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1만4천명의 구원된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이

어떻게 구원되었으며 어떻게 그런 혹독한 항해를 견딜 수

있었는지를 미처 깨닫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것은 그 기적의 배는 한때 퇴역했다가

월남전에 다시 동원되어 임무를 다한 후

고철로 팔려 중국 어느 항구에서 1996년

해체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런 기적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들의 감정을 실은 노래가 바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하고 부르는 가요

 (현인씨가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정일화 논설위원 (전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 2008.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