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 벚꽃/평보
벚꽃은 은하수 같다
별들이 모두모여 빛을내고
벚꽃은 모두모여 빛을 낸다.
모두모여 무엇을 할까?
사람들은
숨은 새순의 의미를
알지 못 한다
은하수처럼 빛을 내고야
사람들은 모여든다.
그리고 인생의 환희를
노래한다.
그러나 꽃비가 나리면
퇴색된 꽃잎을 애써 외면한다.
사람들은 모두모여 무슨 생각일까?
고통의 잉태의 순간도 모르고
꽃비내리는 종말의 순간도 외면하고
은하수처럼 영원 불멸의
찬란하게 빛나는 꿈만 보고 있다
한순간의 요란한 빛
벚꽃 밑에서
인생은 한번의 청춘이 있다는걸
모두 잊고 있다
<벚꽃에 관한 시 모음> 도혜숙의 ´밤벚꽃´ 외
밤벚꽃
해는 이미
져버린 지 오래인데
벚꽃은 피고 있었다
와∼
벚꽃이 팝콘 같다
아이들 떠들썩한 소리에
갑자기 까르르 웃는
벚꽃
다시 보니 참
흐드러지게 먹음직스럽다
(도혜숙·시인, 1969-)
벚꽃
우리 마을 해님은
뻥튀기 아저씨
골목길 친구들이
배고프면 먹으라고
아무도 모르게
강냉이를 튀겼어요
(김태인·시인, 1962-)
벚꽃
요절한 시인의 짧은 생애다
흰빛이 눈부시게 떨린다
살아서 황홀했고 죽어서 깨끗하다
(김영월·수필가 시인, 1948-)
벚꽃이 감기 들겠네
비가 그친 저녁
더 어두워지는 하늘가
이 쌀쌀한 바람에
여린 꽃망울들이 어쩌지 못하고
그만 감기 들겠네
그 겨울 지나, 겨우 꽃눈이 트이고
우리가 꿈꾸던 세상은
이게 아니었네
좀더 따스하고 다정하길 바랬네
윤중로 벚꽃 잎은 바람에 휘날려
여의도 샛강으로 떨어지고
공공근로자 아주머니의
좁은 어깨 위에 몸을 눕히네
(김영월·수필가 시인, 1948-)
벚꽃
관촉사 벚꽃 속에서
문상 못한 친구 만나
흠칫 놀라다
(주근옥·시인, 충남 논산 출생)
벚꽃 축제
겨우내
비밀스레 숨어있던
그들이 환하게 피어났다
벚꽃 세상을 만들었다
벚꽃을 닮은 사람들이 다가오자
벚꽃은 꽃잎을 바람에 날리며 환영해준다
벚꽃의 세상이다
벚꽃 아래 사람들이 옹기종이 모여 앉아 점심을 먹는다
벚꽃 같은 사랑을 피고자 하는 연인들이 모여든다
벚꽃 닮은 강아지가 뛰어다닌다
벚꽃나무와 함께 아이들이 웃는다
벚꽃 세상의 사람들이
벚꽃 아래에서
벚꽃처럼 즐거워한다
벚꽃 세상에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은
벚꽃처럼 아름답다
(박인혜·시인, 1961-)
정오의 벚꽃
벗을수록 아름다운 나무가 있네
검은 스타킹에
풍만한 상체 다 드러낸
누드의 나무
이제 저 구겨진 햇살 위로
티타임의 정사가 있을 거네
보라!
바람 앞에 훨훨 다 벗어 던지고
봄날의 화폭 속에
나른하게 드러누운
저 고야의 마야부인을
(박이화·시인, 경북 의성 출생)
벚꽃
백설기 떡잎 같은 눈
봄날 4월 나뭇가지에
온 세상의 나무를 네가 덮었구나
선녀 날개옷 자태인 양
우아한 은빛 날개 펼치며
송이송이 아름드리 얹혀 있구나
희지 못해 눈부심이
휑한 마음 눈을 뜨게 하고
꽃잎에 아롱진 너의 심성
아침 이슬처럼 청롱하구나
사랑하련다
백옥 같이 밝고
선녀 같이 고운 듯
희망 가득 찬 4월의 꽃이기에
(이재기·시인, 1938-)
벚꽃
그 깊은 곳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그곳에서 너는 참 고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왔구나
화장을 한 듯 안한 듯한 모습으로
너는 무슨 표 화장품으로 화장을 했니
나는 참존 화장품으로 화장을 한단다
그리고 나는 빨간 립스틱은 바르지 않는단다
왜냐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나면 내가 바라보아도
내가 아닌 듯 하거든
그래서 나는 아주 연한 립스틱으로 입술을 마무리하지
바라보아도 오래도록 싫증나지 않는 너처럼
나도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구나
너 그 깊은 곳에서 무엇으로 치장을 했는지
나만 살그머니 가르쳐주지 않으련
(권복례·교사 시인, 1951-)
벚꽃나무의 둘레가
벚꽃나무의 둘레가 눈부시다
무엇이 저렇게
내 눈을 못 뜰 만치
눈부시게 다가오는가 싶었더니
꽃 속에 숨어 있는,
어느새 성장한 여인이 되어버린
딸애가,
오 귀여운 딸애가
주변의 예쁜 풍경을 거느리고
활짝 웃고 있지 않는가
항상 품안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한 그루의 벚꽃!
주변이
꽃의 살처럼 느껴졌다
(곽진구·시인, 1956-)
벚꽃
온몸
꽃으로 불 밝힌
4월 들판
눈먼
그리움
누가
내 눈의 불빛을 꺼다오.
(안영희·시인)
벚꽃 속으로
첫사랑의 확인
눈감아도 환한
잠깐 사이에
잠깐 사이로
꽃잎 떨어져
떨어져도 환한 꽃잎
살짝 찍는 마침표
하얀 마침표
(유봉희·재미 시인)
벚꽃
봄날
벚꽃들은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무엇이 그리도 좋아
자지러지게 웃는가
좀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깔깔대는 웃음으로
피어나고 있다
보고 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기쁜지
행복한 웃음이 피어난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벚꽃
봄빛의 따스함이
이토록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겨울 냉기를
하얗게 부풀려 튀긴 팝콘
팝콘 같기도 하고
하얀 눈꽃 같기도 한
순결한 평화가 나뭇가지에 깃들인다
그 평화는 아름다운 꽃무리가 되어
가슴 가득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거니는 가로수의 빛난 평화를
4월의 군중과 함께 피어나는 벚꽃은
말끔히 씻기어 줄
젊은 날의 고뇌
(박상희·시인, 1952-)
벚꽃
천지天地에 저뿐인 양
옷고름 마구 풀어헤친다
수줍음일랑 죄다
땅 밑으로 숨기고
백옥같이 흰 살결 드러내
하늘에 얼싸 안긴다
보고 또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 자태
찬란도 단아도
이르기 부족한 말
수십 여일 짧은 생
마른 장작 타듯 일순 화르르
벚꽃
천지天地에 저뿐인 양
옷고름 마구 풀어헤친다
수줍음일랑 죄다
땅 밑으로 숨기고
백옥같이 흰 살결 드러내
하늘에 얼싸 안긴다
보고 또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 자태
찬란도 단아도
이르기 부족한 말
수십 여일 짧은 생
마른 장작 타듯 일순 화르르
온몸을 아낌없이 태우며
세상천지를 밝히는
뜨거운 사랑의 불꽃
아무리 아름다워도
찰나에 시들 운명,
순응이나 하듯
봄비와 산들바람을 벗삼아
홀연히 떠나버린 자리에
오버랩되는
고즈넉한 그리움
(안재동·시인, 1958-)
벚꽃 잎이
벚꽃 잎이 머얼리서 하늘하늘 떨리었다
떨다가 하필 내 앞에서 멈추었다
그 눈길이 내 앞을 운명처럼 막았다
가슴이 막히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흐느끼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아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었다
벚꽃 잎은 계속 지고 있었다
(이향아·시인, 1938-)
벚꽃의 꿈
가야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일은
얼마나 아름답고 눈이 부신가.
일시에 큰소리로 환하게 웃고
두 손 털고 일어서는 삶이 좋아라.
끈적이며 모질도록 애착을 갖고
지저분한 추억들을 남기려는가.
하늘 아래 봄볕 속에 꿈을 남기고
바람 따라 떠나가는 삶이 좋아라
(유응교·건축가 시인)
벚꽃나무
잎새도 없이 꽃피운 것이 죄라고
봄비는 그리도 차게 내렸는데
바람에 흔들리고
허튼 기침소리로 자지러지더니
하얗게 꽃잎 다 떨구고 서서
흥건히 젖은 몸 아프다 할 새 없이
연둣빛 여린 잎새 무성히도 꺼내드네
(목필균·시인)
벚꽃
봄의 고갯길에서
휘날리는 꽃잎 잡으려다가 깨뜨렸던
내 유년의 정강이 흉터 속으로
나는 독감처럼 오래된 허무를 앓는다
예나 제나
변함없이 화사한
슬픔,
낯익어라
(송연우·시인, 경남 진해 출생)
벚꽃과 목련 사이
그대 벚꽃으로 온다 나는 벌써 목련이다
벚꽃과 목련 사이 지나가는 우리 같아
아무 일 아니었는 듯 화안한 꽃 속이다
(권도중·시인, 1951-)
벚꽃, 이 앙큼한 사랑아
햇살 한 줌에
야무진 꽃봉오리
기꺼이 터뜨리고야 말
그런 사랑이었다면
그간 애간장은
왜, 그리 녹였던 게요
채 한 달도
머물지 못할 사랑인 것을
눈치 챌 사이도 없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 얄궂은 봄날
밤낮으로 화사하게 웃고만 있는 게요
한줄기 바람에
미련 없이 떨구어 낼
그 야멸찬 사랑이라면
애당초 시작이나 말지
어이하여
내 촉수를 몽땅 세워놓고
속절없이 가버리는 게요
이 앙큼한 사랑아
(최원정·시인, 1958-)
직지사(直指寺) 벚꽃 그늘에서
사무치기도 하여
캄캄한 그리움이기도 하여
내 기다림은 이렇게
글썽이는 하얀 소복(素服)이다
무너지듯 마음 벗으며
맨발로 먼길 나서는 흰 이마의 사람아
봄하늘 너울대는 시름도 맑게 헹구고서
치마폭 환히 펼쳐 하얗게 대지 뒤덮은
해탈 같은 이 울음들 꼭꼭 밟고
이제 가라
닿지 않는 오랜 기다림 무심히 내려놓고
맨발의 소복으로 묵상하는 봄
마음 가리키는 비밀의 흰 손 환하게 일어나
땅 속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세운다
(김은숙·시인, 충북 청주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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