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천에서
은행나무 밑을 걸으며/평보
황혼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편안한 얼굴을
가진 것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 주는 배려일 것
입니다
욕심을 버린 편안한 얼굴
아름다움이 아닐까요.
노랑 은행나무 잎이
아름답게 빛나는것은
죽어가면서도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버려지면서도 원망도 없이
순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은행나무 밑 개천에서는
젊은 오리들이 번식을 위한
투쟁이 이어집니다.
암컷은 날개 짖하며
이리저리 도망을 다닙니다.
숫컷은 폭력으로 제압합니다.
욕심을 채운 숫컷은 유유히
제갈길 가는데
암컷이야 물속으로 자벽질 하고
깃털 고르며 몸을 씻습니다
젊은 날은 오리처럼 살았을까요?
젊은 날의 초상입니다.
은행나무위의 외가리도
버드나무위의 외가리도
은행나무위의 직박구리도
갈대숲의 참새도
바쁘게 움직입니다.
둥지 만들어 가정을 꾸미고
자식을 낳아
먹이를 주어야 하니까요
절은 날은 그들처럼 살았을까요?
휴식이 없었습니다
자식낳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켜 시집장가 보내고 나면
남은 것은 초라해진 얼굴 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은 황혼은
아름답게 빛을 냅니다
은행나무 잎처럼 !!!
은행나무
너는 언어의 비늘이다
아침에 제일먼저 바람을 받아
잘게 썰어서 한짐씩
내 뜨락에 쏟아놓고
더 멀리도 가까이도 갈수없는거리
첫 사랑 속 태우던 그먼시간
모두 모아 물소리로 셀레고 있다
은행남무/이외수
은행나무 아래
은행나무 아래는
친구 기다리기 딱 좋아요.
친구 생각하며
팔로 은행나무 껴안아 보기도 하고
은행나무 그늘에 앉아
친구 이름
바닥에 쓰기도 하고
친구에게 주려고
노란 은행잎
한 잎 두 잎 줍기도 하고
(이준관·아동문학가, 1949-)
+ 은행나무 아래서
낙엽 저 순명을 다한 것들의 사뿐한 낙하!
나는 지구의 중심을 새로이 걷는다
(이시영·시인, 1949-)
+ 은행나무 아래에서
별이 키우는 나무라서
잎새 떨어질 때 자유스런가
끊임없이 내년에는 내년에는
다짐이야 놓지만
다시 한 번 푸른 잎 가슴에 두고
연가 시집 갈피에 꽂혀
고운 손가락 구경이나
기다리면서 기다리면서
(임영봉·시인, 1959-)
은행나무 아래서
금빛을 쏟아내며
낱낱이 흩어지는 상처
바람을 견디던 자리
손풍금 소리,
고여 넘친다
유리알, 부서지는 속
환히 트이는
그날의
숲.
꽃피던 한때를 더듬는다
눈이 마주치는
멀리 아픔도 잠그고
한 잎씩 묻어나
눈에 밟히는
긴 오수(午睡)
속눈썹 짙은 친구야
예서 우린 노래나 하자.
(한분순·시인, 1943-)
은행나무 아래서
길을 가다
은행나무 아래 멈춰 섰다
떨어진 노란 잎 하나 주워 들자
손끝에 찌릿하게 전해오는 전기
가을이 지는 신호다
어디로 가야하나
떨어진 낙엽들 속에 서성이는
허기진 그리움의 주소는
여전히 미확인 상태
가야한다
손끝의 온기 식기 전에
애정이 목마른 그대 찾아
가을이 지는 소리
전해야 한다
찬바람 불어
손끝이 시려 와도
놓지 못하는 나뭇잎 하나
쓸쓸함이 우르르 떨어지는데
아, 어디로 가야하나
(김춘경·시인, 서울 출생)
은행나무 아래서
비 개이더니
은행잎 새로 돋습니다
시절 좋아진다는데
오늘도 흐지부지한 인력시장
우리는 맨날 요 모양이냐고
몇 사람 갈곳 없어
되돌아와 은행나무에 등 기댑니다
지난가을 은행잎 쏟아지고
내 모가지 떨어졌습니다
수북히 쌓인 은행잎
서둘러 쓸어 치운 나라
한뎃잠으로 뒹굴던 모가지들도
깨끗하게 치워졌습니다
좋은 시절 은행잎 새로 돋습니다
내 모가지 떨어진 자리
누군가 새로 모가지 달겠습니다
(김해화·시인, 1957-)
은행나무 길
누가
저토록
녹색의 변신을
찬란하게 보일 수 있을까.
누가
저토록
탐욕을 털어 버리고
의연히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
누가
저토록
처절한 추락을
황홀하게 수놓을 수 있을까.
누가
저토록
진지한 삶의 의지를
하늘 끝까지 뻗어 갈 수 있을까.
(유응교·건축학자 시인)
은행나무
신사 한 분이 서 계신다
노란 옷을 입고 아무 말없이
빗방울을 맞으며
온몸을 촉촉이 적신 채 흠뻑
명상에 취해 계신다
노랗게 물든 이파리를 바르르 떨며
된서리가 내리면 냉기를 받아
온몸에 주사선처럼 보내고
찬바람이 불면 미련하게 맞서지 않고
조용히 뿌리로 그 기운을 전송한다
은빛 살구나무라 불리기도 하며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고 님에 대한
애간장을 태워
썩은 내음이 대명천지에
진동한다는 설도 있고 보니
밀알 한 알이 썩어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듯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자신을 망가뜨렸구나
은행나무 아래서 은행처럼 단단한
지혜를 발견하였구나
(반기룡·시인)
은행나무
은행나무가 산기슭에 우뚝 서서
삼백년 소리로 온 마을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모두 노랗게 물들어라!
막 붉게 타던 놀이 깜짝 놀라
그만 노랗게 물들었다.
나도 잎새의 흔들림 따라
출렁출렁 흔들리면서
노랗게 변해졌다.
깊은 산사
종소리 멀리 날아
산새들 돌아오고
시간이 가지와 가지 사이에서
달을 부르고 별도 불렀다.
(서인숙·시인이며 수필가, 1931-)
은행나무
은행나무가 산기슭에 우뚝 서서
삼백년 소리로 온 마을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모두 노랗게 물들어라!
막 붉게 타던 놀이 깜짝 놀라
그만 노랗게 물들었다.
나도 잎새의 흔들림 따라
출렁출렁 흔들리면서
노랗게 변해졌다.
깊은 산사
종소리 멀리 날아
산새들 돌아오고
시간이 가지와 가지 사이에서
달을 부르고 별도 불렀다.
(서인숙·시인이며 수필가, 1931-)
은행나무
백년쯤은 우습게 한 자리에서 사는 고목
나무의 인내와 슬기는 어데 있을까
새떼들은 편한 대로 옮겨 사는 길도 있는데
바람 타고 수태하는 사람의 먼 그리움과
괴로움의 교차는 타고난 운명이냐
바람, 서리, 폭풍까지도 다 받는 관용은
고루 나부끼는 잎사귀의 자유스런 노래서 오나
거목의 은행나무 그늘에서 오수를
즐기는 태평한 농부는 무슨 꿈을 꾸는가.
(이용호·시인)
은행나무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 추억들 읽어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고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곽재구·시인, 1954-)
은행나무
잎잎이 기록된 푸른 햇살이여
이제 안녕!
펄럭이던 해와 바람의
일기장에서 삭제되었다
낡고 지루한 사랑과의 이별은
조이던 스카프를 풀어낸 헐렁한 목이다
파장한 장터의 풍경처럼
내 손금을 벗어난 전생처럼
슬하는 오히려 풍요롭다
파산한 내 집을 구경하는 나는
낯선 관객이다
(오명선·시인, 부산 출생)
용문사 은행나무
천년을 살아온 은행나무
늙음이 힘들어 많은 가지 꺾어
상처 투성이 얼굴로
벌거벗고 서있다
천년 나이에도
미소 잊지 않고
덤덤히 서서 수많은 사람
오르내리는 모습 보며 웃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눈 비 바람 맞으며
수많은 전란 겪으면서
삶의 애환을 보아온 너
봄이면 새싹으로 기쁨을
여름이면 넓은 그늘로 쉼터를
가을이면 열매로 보시를
겨울이면 참선으로 가르침을
용문사와 생을 같이하여
스님들의 성찰 보며
육신의 괴로움 초월하니
살아있는 부처님 헌신이시요
(박태강·시인, 1941-)
은행나무
어제는 밝은 햇살 아래
무심한 듯 졸린 듯
잔잔하던
저 푸른 잎새들
오늘은 보슬보슬
봄비 속에
온몸 살랑대고 있네
춤추고 있네
겨우내 참았던 그리움이
꽃비 맞아 불현듯 잠 깨었을까
마음속 가득 짙푸른 그리움
고스란히 드러내고
그 동안의 안부를 묻는 듯
짧은 팔 한껏 뻗어
서로에게 가까이 가려고
안달이 난
지척인 듯 머나먼 듯
마주보고 서 있는
두 그루
은행나무
(정연복·시인, 1957-)
은행나무
바람 불어도
노랗게 물든 잎 허비하지 않는다
수많은 발자국,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도
정 주지 않고
사랑 주지 않는다
오직 한 사람
운명의 발자국 멈추어서거나
고독에 젖은 눈빛 그 존재를
확인 한 후
긴 세월 간직하고 있던 나뭇잎
아낌없이 떨어뜨린다
그대는 내가 쓸쓸히 걸어갈 때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 허비한
한 그루 은행나무였다
(손희락·시인)
은행나무
우리 동네 은행나문 굳고 큰데도
어쩌면 열매 한 톨 안 달리고
건너 마을 은행나문 그리 안 큰데
해마다 우룽주룽 열매 달리나?
우리 동네 은행나문 수나무고요
건너 마을 은행나문 암나무래요.
아하하하 우습다 나무 내외가
몇백 년을 마주보고 살아온다네.
(권태응·시인, 1918-1951)
은행나무 부부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반칠환·시인, 1964-)
은행나무 夫婦
두륜산 진불암 들머리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 다정하게 살지요
백년을 하루같이 살아온
은행나무 부부는
여름이면 푸른 잎사귀 팔랑거려
이마의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고
겨울이면 가지마다 하얀 눈꽃 피워
더운 가슴 위에 살짝 얹어줍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어도
바람결에 서로의 마른 몸을 부벼주며
사랑으로 사는 늙은 은행나무 부부는
이따금 암자의 찻물 데우는 연기에도
지그시 눈을 감고 잔가지 파르르 떨며
묵언의 대화를 나눕니다
재재거리던 새들도 날개를 접고
화사한 꽃들도 얼굴을 숙이는 가을날이면
그 늙은 은행나무 부부는
제 생을 빛내던 수천의 황금 동전닢들
다 가난한 흙 속의 벌레들에게 주고
그예 풍장(風葬)의 주검처럼
앙상한 뼈로 서서
그저 겨울 햇살 한 줌에도
아미타불처럼 환하게 웃지요
(김경윤·전남 해남 출생)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황금빛이었다
그 찬란한 빛이 지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나무는 잎을 떨구었고,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나가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인가
너 없이도 가을이 가고 있었다
밤마다 너의 얼굴이 스쳤다
잠을 설친 내 아침은 늘 피곤했다
그때마다 나는
커피자판기 안으로 피곤을 구겨 넣듯이
동전을 밀어 넣었다
동전만 넣으면 새로 나오는 커피처럼
내 희망도 그렇게 쑥쑥 뽑아질 날이
있을 것인가
(김현주·시인, 전북 전주 출생)
은행나무병
빚이 많은 나는 은행나무만 봐도
가슴이 조여온다
나무가 내미는 연초록 이파리가
지폐였으면 한다는
어느 시인의 詩처럼 저 나무가
나의 통장 잔고였으면 한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내 몸은
나락으로 흩어지고 떨어진다
자주 울리는 전화의 발신처는
신용카드회사이거나 은행
그럴 때마다 내 몸은 미처 바꾸지 못한
無料貨幣처럼 쭈그려 든다
끈질기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달아날 수 없는 마음이 검게 탄다
-왜 그렇게 살았냐
딱딱한 은행전화번호는
끝없이 신호를 보낸다
이 현실을 탈출하고픈
나는 극장으로 숨어들었다
눈을 감고 밀리언즈*를 본다
기차가 초록들판을 달린다,
나도 달린다
불안증세가 나아졌다, 영화는
나를 편하게 끌고 달렸다
영화에서 돈가방이 떨어졌다
사람들 눈치도 보지 않고
맨 먼저 그 가방을 들고튀었다
-오늘 고객님이 약속한
입금일입니다
불이익이 없도록 즉시
입금 부탁드립니다
기다렸던 은행원이 극장
출구에서 끈질기게 따라온다
또 숨이 막혀 온다
(김혜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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