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8월16일 오후
정문들어 서자 보이는 루이14세동상
투어버스는 백사유 궁전으로 향합니다
가이드의 유머 섞인 말에 의하면 베르샤이유 궁전 하면
프랑스 사람들은 못알아 듣는다 합니다
백사유 라 해야 정당한데 자기도 들은 이야기 라며
백사유가 베르사이유로 한국에 알려지게 된동기는
60년대 후반 국무총리를 지낸 충청도 출신의 어느인사가
프랑스 백사유 궁전을 보고 귀국길에 베르사이에∼유 라고
발음 한데서부터 잘못되었다 합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은 연간 10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는 세계 최대의 명소 중 하나 입니다.
프랑스 절대 왕정의 전성기인 루이 14세부터 루이 16세에 이르는
200여 년간의 프랑스 왕실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백사유 궁전은 루이13세가 수렵을 위하여 세운 간소한
별장이 1662년경 루이14세의 명령으로 1690년 까지 확장
완성하였습니다.
화려한 궁전은 길게 가로로 걸처 580m에 이른다 합니다
“왕의거실”을 비롯하여 “궁전예배당”거울의방“전쟁의방”등
은 그 화려함과 사치스런 치장은 입을 다물수가 없었습니다
모든궁전의 내부를 금으로 치장하는데 몇톤의 금이들어갔다
하더군요
1783년 미국독립전쟁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조약체결이 “겨울의방”
에서 행해 지는 등 국제적 행사의 무대가 되었다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내장품 들이 대부분 탈취 되었으나
궁전내부의 성당은 혁명군도 신자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소장품들은 프랑스 정부가 복원중이라
했습니다
화려한 궁전내부 는 물론 정원의 광대하고 화려함에
놀라게 됩니다.
우리일행은 미로처럼 얼켜있는 궁전을 헤메이다가 겨우 궁전 정원을
찿을수 있었습니다
입장할 때 그야말로 長蛇陣 구불구불 끝도없는 줄서기로 2시간이상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퇴장 할 때쯤에는 요란한 경고음이 들리며 구급차가 왔는데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실신했다 합니다.
아무튼 그 놀라운 규모 뒤에는 권력 앞에서 궁전건설의 노무를 당담했던
서민들의 애환과 탄식이 들려오는듯 했습니다
끝도없는 정원을 바라보며 사치는 파멸을 자초하는 것 이라 생각하며
쓸쓸함이 여행의 피곤과 함께 밀려 왔습니다
그때쯤 일행인 여성분들과 친우 춘성은 퇴실 하자고 보채고 있었습니다
관람하기위해 끝없이 줄을 섭니다
정문 입니다
궁전 배치도 입니다
일층에서 보는 궁중 예배당
천장 그림
2층 에서 보는 예배당
루이14세 그림입니다
한국어로 된 팜프렛을 팔던지 무슨 동물이 동물을 등에 태우고 있는데
무슨뜻인지 언제 만들었는지 ??
이그림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자녀들 같은데...
루이14세 동상??
"튀렌" 프랑스의 군사지도자 원수(1643-)
루이14세때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 중 한사람으로
30년 전쟁 때인 1625년 군인생활을 시작한그는 그후 프롱드난(1648-53)과
프랑스가 스페인령 네달란드를 침공했을때(1667) 제3차 네델란드 전쟁(1672-)
때에 프랑스 군대를 지휘했다
후에 나폴네옹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고 평했다
궁전내부에서 보이는 정원
궁전쪽에서 보는 정원
아폴론의 샘에서 보는 궁전
평화를 상징하는 정문석상 손위에 비들기가 내려 앉았는데
석상은 자연스럽게 보는 모습 입니다 운이좋아서 찍을수 있었습니다
생물과 무생물이 조화되서 평화를 연출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루이16세가와 앙리 앙투아네트가 차래대로
처형된 콩코드 광장에는 기증받은 오벨리스크가 서 있습니다
슬픈 광장입니다 .프랑스 학자가 상형문자를 해독해내서
그 감사의 표시로 선물 받았다 합니다.
이하 글은 옮겨와 편집한것입니다
베르사이유 궁 내 거울의 방 Galerie de Glaces
베르사이유 궁전 내 루이 14세의 침실
루이 14세의 초상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리 테레즈 공주,
루이 왕자(왼쪽), 루이 16세(오른쪽)
프랑스 대혁명 하면 제일먼저 루이16세의
부인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황비가 떠오릅니다
여기 그녀의 기록을 간략하게 적어 볼까합니다
루이16세(1774-1792)는 영국의 미국진출을 견제 하려고
미국독립전쟁(1775-1785)을 과도하게 군비를 지원하여
재정궁핍에 빠지게 되는데 결국 바스티유 감옥까지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한 민중봉기에 지금의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15번째 자녀로 태어난 그녀의 결혼 전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 결혼한 후의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입니다 .그녀는 결혼 전에 독일어 이름을 사용했고프랑스로 온 결혼 후에는 프랑스어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
우리가 그녀를 기억하는 건 프랑스 혁명과 함께 무능했던 왕 루이 16세의 왕비로 배고픔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빵이 없다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하세요"라 말했던 백성의 민심을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왕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일생을 우리가 자세히 모르는 것 처럼후대에 전해내려오면서 많은 왜곡과 오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이 말은 그가 세상물정에 얼마나 어둡고 국민들이 처한 상황에 무지하며 무관심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곤 합니다.
프랑스 국민들이 먹을 빵이 없어 굶주림에 고통 받는다는 말을 듣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와 같이 말했다고 알려져왔습니다 .
그러나 실제로는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 왕가 출신 마리 테레즈 왕비의 말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마리 테레즈가 “빵이 없다면 파이의 딱딱한 껍질을 먹게 하라” 말했다는 겁니다
프랑스 백성들을 만나나는 마리 앙투아네트 백성들의 절규가 인상적입니다
프랑스 왕가를 상징하는 부르봉 가문 출신의 루이16세와 당시 세력이 매우 약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마리 앙투아네트.
둘의 결혼은 조국 오스트리아를 지키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선택'하고
그녀에게 '강요'한 결혼었습니다.
프랑스의 많은 사람들이 이 결혼 동맹으로 합스부르크 공국이 얻을 이익이 더 크다고 보고 있었고, 부르봉 가문의 후계자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에서 나온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족들
우여곡절 끝에 오스트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오게 된 그녀.비록 읽기와 쓰기 등 학문적 분야에선 조금 부족했으나
그녀의 성격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본성이 상냥하고 친절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해요.
예쁜 용모에 착하고예술을 애호하지만, 산만하고 쓰기와 읽기 능력이 부족한 편인 14살 소녀.
어느 집에서건 쉽게 볼 수 있던 철없는 소녀가 유럽의 중심이던 프랑스왕실로 시집오게 된 거죠.애시 당초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왕비를 반대했던 프랑스의 귀족들은 그녀가 프랑스에 불행을 몰고 오리라는 악의적인 선전을 퍼트렸습니다.
그 때문에 그녀는 혼외정사를 하며 정부를 갈아치우는 음탕한 여자라는 소문,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 그녀가 낳은 왕자가 루이 16세의 소생이 아니라는 소문 등 갖가지 나쁜 소문에 시달렸습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을 비롯한 일당이 추기경과 보석상을 속이고 왕비를 사칭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일명 ‘목걸이 사건’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남편 루이 16세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 소심하며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데다가, 취미도 사냥하는 것 외에 자물쇠를 만들거나 돌을 다듬는 것 정도라 발랄하고 활기찬 성격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7년만에 태어난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에게
“가여운 어린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지만 난 너를 사랑한다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것이 되었겠지만 너는 내 것이고 내가 보살필 거야
너는 나와 기쁨을 함께 하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 “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말이죠.
너무 외로웠기 때문일까요?그녀는 점차 호화로운 파티와 무도회를 자주 열고 의복, 장신구, 보석에 많은 비용을 들였으며,밤마다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파티장인 프티 트리아농을 호화롭게 개보수 하는데 막대한 국고를 쏟아붓기도 합니다.
당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던 프랑스왕정과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로 상징되는 "무능하고 사치스러운 세상물정 모르는 왕실"에 분노하고
식료품 가격 폭등, 거듭된 자연 재해, 국가 재정 파탄으로 사회 불안과 불만이 고조된 프랑스 시민들은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을 일으킵니다.
파리 시민들은 10월에 베르사유를 습격했고 왕실 가족은 튈르리 궁에 유폐되었습니다. 왕실 가족은 1791년 6월 20일 왕당파 세력이 강한 몽메디로 도주하려 했지만 바렌에서 붙잡혀 실패했고 이후 탕플에 유폐되었다가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되게 됩니다.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루이16세
마리 앙투아네트는 10월 15일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요.
그녀는 처형되기 전 새벽, 시누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깁니다.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 당신의 오빠(루이16세)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기에 나는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확고부동함을
보여줄 수 있기를바랍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나로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겁니다
그녀의 처형은 마치 프랑스 인들의 분노를
(혹은 루이16세의 수준 미달의 국정운영을)외국인 왕비에게 돌려
뒤집어 씌우는 듯한 분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녀가 사형장으로 향할 때 파리 시민들은
“오스트리아 여자가 지나간다!” “뻔뻔스러운 앙투아네트가 여기 있다!”
라고 열광했죠.
기요틴 단두대의 처형대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처형 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의 발을 살짝 밟고 사과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그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죽음앞에 초연함과 의연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실 당시 왕비들은 거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정치적으로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냐에
대해선 이야기가 많지만
실제 그녀는 상냥하고 동정심이 많은 편이었고,
그저 궁 밖의 세상을 전혀 몰랐던 평범한 왕족일
뿐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봅니다.
역사는 역시 '승자'의 기록인가 봐요.사치와 허영의
상징, 마리 앙투아네트 어쩌면 지극히 순진해서 세상 이치를
모르던 철없는 소녀는 아니었을까요?
'서유럽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브르박물관과니케상 (서유럽여행7부) (0) | 2020.07.24 |
---|---|
몽마르트언덕과생드니(서 유럽여행6부) (0) | 2020.07.24 |
에펠탑과세느강유람선 (유럽여행4부 ) (0) | 2020.07.24 |
나폴레옹의개선문 (유럽여행3부) (0) | 2020.07.24 |
영국관광의아쉬움 (서유럽여행2부) (0) | 2020.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