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여행

크메르왕조연대표(캄보디아여행12부)

훼브스 2020. 7. 19. 23:45

 

 

 

 

 

 

앙코르 와트의 오른쪽 회랑에는 벽면 전체가 크메르왕국의

모든 국가운영 체게가부조되어 있다

사형수의 집행 죄와벌 전투 건축 생활전반에 대한

부조가 그려 져있다

 

 

 

 

 

 

 

 

 

 

 

 

 

 

 

 

 

앙코르톰의 벽면 또한 코끼를 타고 전쟁하는 모습과

약방 시장 생활상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의 강력하고 인도차이나 전역을

아우르는 힘이 찬란했던

문화가 함축성 있게 표현되어 있다

크메르 왕국의 왕조의 연대표를 빌려와 올려본다

 

 

 

 

 

 

 

 

 

 

 

 

캄보디아 민속 촌에 표현된 앙코르 왕국의 영화 (아래)

 

 

 

 

 

 

 

 

 

 

 

 

 

 

 

자야바르만 7

 

자야바르만 2 ---앙코르의 건국왕,프롬끌렌

수리야바르만 2---앙코르의 정복왕, 앙코르왓트

자야바르만 7---앙코르의 위대한 왕, 앙코르톰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부강하고 찬란한 예술을 꽃피웠던 앙코르 왕국의 600년.
그 자긍심이 있기에 오랜 외세 통치와 수백만명의 대학살이란 애닳픈 시기를 굳건히 견뎌올 수 있지 않았을까?
앙코르 와트의 신비를 이루기까지 왕대기(王代記)를 조명코자 하지만
앙코르 왕국은 사기(史記) 기록에는 무관심했던 듯
전해오는 기록은 대개 사원에 새겨진 부조나 인근 국가의 사기를 참조한다는 점이 아쉽다.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
802∼850년
자야바르만2 세는원래 하(下) 첸라국의 푸스카락 왕자(Puskarak)로서 쟈바 왕국(인도네시아)의 침공에 패하여 볼모로 잡혀갔다. 굴육의 세월을 보낸뒤 서기 800년에 귀국, 인드라푸라(Indrapura)에 수도를 둔 앙코르 왕국을 건립한 시조이다. 서기 802년, 그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절대적 왕권 수립을 위해 수도를 마헨드라 산(Mahendra Mt., 현재 시엠림 인근의 프놈 꿀렌 산)으로 재천도하면서 쟈바나 챰(베트남) 왕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 왕국의 왕으로 선서하면서 스스로 쉬바 신의 화신(化身)임을 공포하며 천상천하를 다스리는 데바라쟈(Devaraja, 神王)라 칭했다. 이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통치 기반으로 신성통치를 통해 종정일체(宗政一體)를 단시간에 활성화 시킬 수 있었다. 동시에 신격화된 왕의 숭배를 쉬바 신을 모시는 것과 동일시하여 곳곳에 쉬바 신전을 건립했다. 아직 왕국의 기반을 제대로 다지지 못했을 때, 그는 원활한 식량 조달을 위해 세 번에서 다섯 번 정도의 천도(遷都)를 한 것으로 추정하며 마지막으로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 즉 오늘날의 롤루오스(Roluos)로 천도했다. 이곳은 메콩강 지류가 흐르고 드넓은 평야를 갖고 있어 양식 조달에 유익했기 때문인데 그의 결정은 600년 앙코르 왕국의 부를 가져다 주는 반석이 되었다. 그는 이곳을 무척 사랑하였고 훌륭한 왕으로서 업적을 남긴 채 사망했다.
 ▣자야바르만 3세(Jayavarman III)
850∼877년
자야바르만 2세의 아들로서 부왕이 닦아둔 반석 위에 왕국의 명운을 잇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수도는 여전히 하리하랄라야이며 상(上) 첸라국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으며 왕국을 보호했다.
 ▣인드라바르만 1세(Indravarman I)
877∼899년
자야바르만 3세는 후계자가 없어 그의 외가쪽 친척 중 당시 출중한 인물에 용감무쌍하기로 유명했던 인드라바르만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상 첸라국을 제외한, 인근의 영토를 속속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농경을 주 산업으로 하는 그들에게 치수(治水)는 숙원의 사업이었다. 인드라바르만 1세는 치밀한 계획 하에 롤루오스 강물을 끌어들여 인공적으로, 최초의 거대한 저수지

인드라타타카(Indratataka)를 지어

관개수로를 연결, 연중 안심하고 다모작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백성들로부터 진정한 쉬바 신의 화신인 데바라쟈(神王)로 추앙 받았다.
그는 예술적 재능도 겸비하여 제대로된 건축물로서 왕국의 위엄을 갖추었다. 왕가의 장례전을 겸한 쉬바 신전 프레아 꼬(879년)와 바콩(881년)을 건립했다.
I
 ▣야소바르만 1세(Yasovarman I)
899∼910년
인드라바르만 1세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야소바르만 1세는 어릴 적부터 왕위계승자로서 철저한 교육을 받았으며 용맹하고 머리가 좋아 전략전술의 귀재로 알려진다. 또한 그는 대단히 파워풀한 결단력의 소유자로서 평지에선 적의 방어에 어려움이 있음을 통감하고 공격에도 끄득 없는 산 위(현재의 프놈 바켕 산)에 과감히 방어 성채 형상의 새수도 야소다라푸라(Yasodharapura)를 지어 천도했다. 덕분에 겨우 11년간 재위에 있었지만 막강한 챰(베트남) 왕국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했고 현재의 라오스 남쪽과 태국 쪽 그리고 버어마 지역에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기염을 토했고 왕국에는 보석, 코끼리, 황금, 황소 등 공물로 넘쳐났다고 전해온다. 
그는 왕국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으며 밖으로는 적과 투쟁하면서 안으로는 백성들을 위해, 부왕이 그러했던 것 처럼, 수도 야소다라푸라(프놈 바켕) 동편에 거대한 인공 저수지 야소다라타타카(Yasodaratataka, 현재의 동 바라이)를 지어 백성들이 연중 고루 물 걱정 없이 농사에 전념토록 배려했다. 저수지의 크기가 2km x 7km 이니 대단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또 수도에서 저수지까지 도로를 닦아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는 건축에도 주력했는데 새수도가 있는 바켕 산위에 프놈 바켕 사원을 건립했으며, 비록 자신이 버린 수도지만 선왕대인 롤루오스 시대의 왕으로 기록되길 기원하며 부왕이 축조한 인드라타타카 저수지 내에 롤레이 사원(Lolei)을 건립했다.

건축 얘기에 앞서 특기할 것은, 선왕조는 쉬바신 신봉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지만 야소바르만 1세는 비쉬누, 브라흐마 신은 물론 부처까지도 믿어 그의 건축물은 더 이상 쉬바 신전으로만 존속하지 않았다.  프놈 바켕 신전에는 쉬바 이외에도 33인의 신들을 새겼으며 프놈 끄롬 신전에는 비쉬누, 쉬바, 브라흐만을 동시에 모셨고, 프놈 복산의 신전에는 브라흐마를 모셨다. 소위 종교개혁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치세에 100여군데의 수도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하르샤바르만 1세(Hashavarman I)
910∼923년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
  
야소바르만 1세의 아들로서 정상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921년 그의 숙부가 왕에게 대항하여 코 케르(Koh Ker)에서 새 왕국을 건설, 대립했다. 이런 내분이 있은 뒤 일년 후에 야소바르만 1세는 사망했다. 그의 치세에 박세이 챰끄롱 사원이 준공되었다. 
 ▣이사나바르만 2세(Isanavarman II) 923∼928년
하르샤바르만 1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의 치세에 어느 귀족에 의해 프라삿 크라반 사원이 건립되었다. 
 ▣자야바르만 4세(Jayavarman IV) 928∼944년
하르샤바르만 1세와 이사나바르만 2세의 숙부로서 왕정에 반기를 들어 코 케르(Koh Ker)를 수도로 삼아 새 왕조를 열었다. 그의 사후 아들 하르샤바르만 2세가 즉위했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 (Rajendravarman II) 944∼968년
하르샤바르만 2세 사후 자야바르만 4세의 조카인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즉위하여 치열한 왕권 쟁탈전을 거쳐 중앙 왕국까지 통일하여 명실상부한 단일왕통치체제롤 재확립한다. 그는 초강력 통치력을 자랑하는 왕으로 코 케르를 버리고 중앙왕국의 수도인 야소다라푸라(프놈 바켕)로 천도한 뒤 내부 분열을 말끔히 정비하고 강력한 왕권 중심 통치를 구현했으며 동시에 외국으로 눈을 돌려 태국, 라오스, 베트남까지 정벌, 부강한 크메르 왕국의 기초를 다졌고 선조대에서부터 그토록 괴롭혀오던 상(上) 첸라국까지 통일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절대적인 데바르자(神王)로 군림하면서 사원을 건립, 신들에게 바쳤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 오늘날까지 앙코르 예술의 창시자라 불리울 정도로 아름다운 사원들을 많이 남겼다. 그의 치세에 확립된 앙코르 건축사상과 조각상에 대한 기본적인 구도는 앙코르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을 정도로 정점에 달한 예술혼을 보여주는데 동 메본(East Mebon), 프레아 룹(Preah Rup), 뱃춤(Bat Chum) 그리고 부조예술의 정점이라 칭송받는 반티아이 스레이(Banteay Srei)가 브라만 승려인 야즈나바라하에 의해 건립되었고 왕실 전용 휴양지 및 농업용수 공급의 목적으로 스라 스랭(Srah Sreng)도 축조했다.       
         
▼앙코르 예술의 보석이라 칭송받는, 반띠아이 쓰레이, 정교한 부조가 일품이다.
 
 ▣자야바르만 5세 (Jayavaman Ⅴ)
968∼1001년
라젠드라바르만 2세의 아들로서 어린 나이에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왕이 닦아둔 기반을 활용하여 왕권을 잘 유지했다. 그의 치세에 타 케오(Ta Keo) 사원이 건립되었다.
 ▣우다야디트야바르만 1세((Udayadityavarman I) 1001∼1002년
자야바르만 5세 사후 그의 친척이었던 우다야디트야바르만 1세가 등극하지만 1년이 채 못되어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 그가 죽었는지 아님 속세를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며 어떤 기록도 남아 있다 않다. 갑작스런 왕의 증발로 정국은 혼돈의 극치로 치닫았으며 여기저기서 스스로 왕이라 자처하며 새 왕국 건립을 선포했다. 숱한 왕들 가운데 가장 막강한 파워를 유지하던 두 왕만 소개한다.
 ▣자야비라바르만(Jayaviravarman) 1002~1011 여러 왕국으로 분열
우다야디트야바르만 1세의 증발 후 권좌를 잡아 중앙 왕국을 이어나간다
 ▣수르야바르만 1세(Suryavarman I) 1002∼1050년
어머니가 인드라바르만 1세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코랏(Korat)을 수도로 삼고 수르야바르만 1세라는 왕도 등극한다. 그는 크메르 동북부 지역(현재의 태국)을 다스리던 영주로서 전쟁 때마다 뛰어난 전략으로 승리, 통솔력을 인정받던 참이었다. 이렇게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왕들 가운데 판도는 어느정도 윤곽을 드러내며 이 두 왕이 자웅을 겨누게 된다. 1006년 두 왕은 크게 격돌하여 수르야바르만 1세가 중앙 왕국의 수도 야소다라푸라를 빼앗는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자야비라바르만은 4년을 넘게 버티며 대항했지만 결국 완전히 손을 들 게 되고 이 나라에서 왕이라 자처하는 자를 모두 처단한 뒤 지역 간의 분열ㄹ 재정비하고 범국가적 단합을 주도했으며 앙코르 왕국 최대의 인공저수지 서 바라이(West Baray, 8km x 2.2km)를 지어 백성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케 하여 신임을 얻었다. 샴(태국)의 피가 섞였다고도 전해지는 그는 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샴을 정벌하는 등 그의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확보했다. 이렇게 강력한 통치력으로 국내외적으로 안정을 도모하고 부국부강의 기반을 다졌다. 주목할 것은 그는 샴의 영향을 받아 불교도이란 점이다. 오랫동안 힌두 신화와 융합된 데바르자(神王)으로서의 지위 변동에 따른 소요와 불안감을 교묘히 해소하여 비쉬누 신의 화신인 붓다(부처)와의 조화를 꾀해 크메르 왕국에 불교를 자연스레 유입시켰다. 덕분에 훗날 앙코르와트에는 힌두교와 불교가 융합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치세에 건립된 사원으로는 남쪽 끌리앙이 있으며 서메본은 완공을 보지 못했다.
 ▣우다야디트야바르만 2세(Udayadityavarman II)
1050∼1066년
차기 왕재로 교육을 받아 왔으나 10대의 어린 나이에 부왕의 서거로 왕좌에 올랐다.  때문에 어린 왕을 얕보며 1051년과 1055년에 두 번 도합 세 번이나 반역이 일어났지만 명장 상 크레암(Sang Krearm)에 의해 격퇴되어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 신흥 세력들이 다투어 분열하면서 크고 작은 왕국을 건설하는 바람에 중앙왕권이 도전을 받는 혼란기를 오래 감내해야했다. 그런 와중에도 부왕의 업을 이어 영토 확장에 주력하여 부왕의 치세보다 더 큰 영토를 확보했다. 또 신에 대한 헌신과 왕권의 신성화를 위한 사원 건립에 주력하여 부왕대에 시작한 서 바라이와 서 메본(West Mebon)을 완공시키고 현재 앙코르 톰 내에 있는 바푸온(Bapuon)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하르샤바르만 3세(Harshavarman III)   1066∼1090년  
우다야디트야바르만 2세는 후사를 두지 못한채 사망하여 그의 동생 하르샤바르만 3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의 통치 시절 업적은, 그동안 내외란을 겪으면서 파괴되었던 사원들을 죄다 복구했다는 점이다. 그의 치세에는 비교적 안정을 되찾았고 대단히 부유한 시절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신분제도를 확립하여, 브라만승려급, 왕족급, 상인급, 그리고 일반 서민의 4계급 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는 안정을 추구했으나 1074년에 챰 족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나라가 황폐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의 위기를 맞았다가 훗날 평화조약을 맺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곧 중국의 협공 요청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되어 민심이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왕족 출신의 지방 호족 한사람이 스스로 왕임을 자청하며 왕국을 세우니 그가 자야바르만 6세이다. 왕국은 다시한번 내분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같은 시기 하르샤바르만 3세는 느립틴드라바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만다.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
▣느립틴드라바르만(Nribtindravarman)  1080~1113년
전쟁 중의 혼란을 틈타 하르샤바르만 3세를 치고 권좌를 빼았았다.
▣자야바르만 6세(Jayavarman VI) 1090∼1108년
전쟁으로 민심이 소란스런 틈을 타서 왕족 출신인 마헤타푸라 지방의 호족이 새 왕국을 열고 자야바르만 6세라 칭한다. 그는 반역으로 왕위에 오른 느립틴드라바르만을 치기 위해 군대를 끌고 진격, 대립한다. 그는 중앙 왕국을 포위한 채 나름대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나 중앙 왕국의 힘도 만만찮아 그가 사망할 때까지도 점령하지 못한 채 이런 상황을 지속해야했다. 그러나 중앙왕국의 수도에서 멀지 않은 쁘레아 비헤이(Phrea Vihae)까지 영토를 확보하여 비헤이에 성채를 지어 중앙 왕국을 계속 압박하니 중앙왕국으로서는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다라닌드라바르만 1세(Dharanindravarman I)   1108∼1113년  
자야바르만 6세의 사후 그의 형인 다라닌드라바르만 1세(Dharanindravarman I)가 왕위에 오르고 중앙왕국에선 느립틴드라바르만의 조카가 훌륭한 장수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두 왕국은 첨예한 대립을 보이면서 공방전을 펼치다가 1113년, 운명의 대격전을 펼치게 된다. 이 전투에서 다라닌드라바르만 1세는 용맹스런 느립틴드라바르만의 조카에게 패해 목숨이 끊어진다. 그가 바로 앙코르와트를 건립한, 앙코르 왕국의 번성기를 추구했던 수르야바르만 2세이다.
 ▣수르야바르만 2세(Suryavarman II)
1113∼1150년
전쟁 승리후 수르야바르만 2세는 새로운 사명감을 띄고 느립틴드라바르만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새 왕국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분열된 땅을 모두 정벌, 앙코르의 중앙 왕국으로 거듭 태어난다. 통솔력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웠던 그는 대단히 강력한 중앙통치권을 발동하여  국내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후 베트남, 태국, 라오스는 물론 멀리 말레이시아 반도 끝까지 정벌하여 부강을 과시했다. 또 기존의 불교 사상을 버리고 다시 힌두교로 귀의했으며 영웅적인 자신의 치세를 빛낼 신전 건립에 몰두했는데 바로 오늘날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앙코르와트의 건설이 그것이다. 비쉬누 신에게 바친 이 신전은 실제로는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한 최대의 걸작물로서 신전 건립에 재정을 지나치게 낭비하여 국가 재정의 결핍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외 건축물로는 챠우샤이 테보다(Chau Say Tevoda), 톰마논(Tommanon)이 있으며 반테이 삼레(Banteay Samre)는 준공만 한채 사망했다.
  ▣다라닌드라바르만 2세(Dharanindravarman II) 1150∼1160년???  내분, 왕위쟁탈전 
 1177년 챰(Cham)
 의 대침공.
 
찬란한 위업을 이루었지만 자식이 없었던 수르야바르만 2세 사후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라닌드라바르만 2세가 즉위했다.
 ▣야소바르만 2세(Yashovarman II) 1160????~1165년
이 왕의 통치 시절 롤루오스 지역 내의 사원들이 복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트루부바나디트야바르만의 반역으로 명이 끊어졌다.
 ▣트루부바나디트야바르만(Trubuvanadityavarman) 1165∼1177년
권좌를 차지했지만 1177년 챰족(현재의 베트남)이 침범,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패하여 피살 당하므로서 국가는 큰 혼돈으로 빠져든다.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81∼1219년
자야바르만 7세. 바로 혼돈의 시기가 창조해낸 영웅이다.

수르야바르만 2세의 사촌이자 지방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자야바르만 7세는 1177년 메콩 강을 통해 침입한 챰 족의 대대적인 제2차 공격에 맞서 태국과 협공하여 수전(水戰)에서 크게 승리, 오히려 챰 국까지 역공하여 1181년 챰의 수도 비자야(Vijaya)까지 함락하고 챰 왕을 사로잡아 구국영웅으로 칭송 받는 틈을 타 비어있는 중앙왕국의 왕으로 즉위한다.
그는 더 이상의 외란을 방지코자 식민지 관리에 철저를 기하며 조공을 받았는데 당시 식민지로는 태국, 라오스, 베트남을 비롯 인도네시아의 발리에 본거지를 둔 쟈바 왕국까지이고 중국의 원나라에서 온 사신 주달관의 당시 기록을 봐도 그 광활한 영토와 부는 역사에 길이 기록된다.

앙코르 톰 내 프라삿 수오르 쁘랏의 열두 개 탑 아래 놓였을 조공품들을 상상할 수 있다면 왕국의 부가 어느 정도였을런지 짐작 가능하다.  

안으로는 천재지변에 무관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관개수로를 정비하여 그 길이가 수백킬로미터에 달했으며 높은 제방으로 둘러싸인 저수지(Jayatataka)를 만들어 물을 가둬 연중 활용케 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수많은 병원을 지어 국민의 편의에 기여하는 등 국가 안정에 주력했다.

◁앙코르 톰 내의 신상. 바위를 쌓아 얼굴을 그려내는 기술이 뛰어나다. 수많은 얼굴은 모두 그 모습이 다르다. 실제로는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고 한다.
또 전쟁으로 파괴된 바푸온(Bapuon) 사원 보수를 비롯, 타 프롬(Ta Prom), 반테이 크데이(Banteay Kdei), 닉 핀(Neak Pean), 스라 스랑(Srah Srang), 프레아 칸(Preah Khan), 바욘(Bayon), 크롤 코(Krol Ko), 프라삿 수오르 프랏(Prasat Suor Prat), 앙코르 톰의 코끼리 테라스와 문둥이왕 테라스 등 수많은 사원과 부속 시설들을 보수, 건립했다.

특기할 것은 그는 대승불교 신도여서 국교를 불교로 개종, 스스로를 기존의 힌두신의 화신이 아닌 관음보살의 화신(化身)으로 비유하는 등 불교적으로 장식했다. 자야바르만 7세 시대가 앙코르 아니 캄보디아 역사를 통털어 최대 번영기라고 할 수 있지만 연이은 숱한 신전 건립과 1200년 앙코르 톰(Angkor Thom)으로의 천도(遷都) 비용을 감당치 못해 국가 재정이 결핍되어 급속도로 멸국의 길로 치닫는다.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둥병(으로 추정되는)에 걸려 사망하는데 그의 걸작품 바이욘 신전 내 부조에 죽어가는 왕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인드라바르만 2세(Indravarman II)
1219∼1243년
 ▣자야바르만 8세(Jayavarman VIII) 1243∼1295년
 ▣인드라바르만 3세(Indravarman III) 1295∼1307년
사양길에 접어든 앙코르 왕국 건너 태국에선 아윳디야에 수도를 둔 샴 국의 기운이 뻗어가고 있어다. 샴은 지속적으로 앙코르 왕국을 위협한다.
 ▣인드라자야바르만(Indrajayavarman) 1308∼1327년
 ▣자야바르만 프라메스바라(Jayavarman  Pramesvara)
1327년
앙코르 왕국은 샴국의 압박에 못이겨 결국 앙코르를 버리고 톤레삽 호수 너머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긴다. 왕국을 짓고 사원을 건립하는 등 새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지만 결국 샴의 지배를 받게됨으로서 앙코르 왕국은 두 번다시 재기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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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돔 시아누크 국왕의 젊었을때

 

왕궁 앞에서

 

캄보디아에서 5,000 리엘 지폐

녹색 배경에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

 

 

노로돔 시아누크(1922년10월31일-2012년10월15일)

캄보디아 의 전 국왕, 정치인이다.

2004107일 퇴위할 때까지 캄보디아의 국왕이자

노로돔시하모니  캄보디아 현 국왕의 부왕이었다.

노로돔 수라마리트 왕과 시소와스 코사막 왕비의 아들로 태어나

시하누크 국왕은 1941년 이후로 가장 많은 직위를 가져,

1941년 출판된 기네스북에 올랐던 적도 있다. 왕이자, 주권 왕자이자 대통령,

수상, 국회의장 등 망명정부의 수반으로서 가장 많은 직위를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직위가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고, 맨 나중에 가지고 있었던 직위는

 캄보디아의 합헌 군주였다. 시하누크 전 국왕이 실질적인 권한을 통치한

기간은 캄보디아가 독립한 1953119일부터

1970318일 론 논과 국회가 그를 폐위시킬 때까지 였다.

그는 또한 여러 편의 영화 제작을 맡은 감독이기도 하였다.

 

 

부왕 시아누크의 영결식장의 노르돔 시하모니

 

 

노르돔 시아누크 영결식  

 

추모하는 소녀

 

노르돔 시하모니 현 국왕

 

캄보디아의 영부인이자 캄보디아 적십자총재인 분 라니

여사가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으로부터 썸닷호칭을 수여받았다.

(썸닷 호칭은 우리말의 각하정도로, , 총리, /하원 의장에게만 수여되는 호칭임)

지난 7일 제 150회 세계 적십자에 날에 참석한 훈센 총리는

분라니 여사의 썸닷호칭 수여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며,

농부의 아들과 딸이 썸닷호칭을 받게 된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왕 노로돔 시하 모니 폐하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전 국왕의

캄보디아의 여왕 노로돔 시아누크 Monineath의 아들이다.

시하 모니 국왕의 선택은 훈 센 총리와 국회 의장 프린스 노로돔 라나리드

(새로운 왕의 동생), 왕위위원회의 모두 회원들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는 목요일 1953514일 태어난 1029 일 프놈펜에서 선정 된 프놈펜에서

국왕 노로돔 시하 모니 폐하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의

캄보디아의 여왕 노로돔 시아누크 Monineath의 아들이다.

시하 모니 학사 남아 하나가 요구 될 것 인 경우에 그가 직접

후계자가없는 것을 의미 아이를,이 없습니다.

캄보디아의 왕이 왕위위원회에 의해 선택되어 그러나,이 문제가되지 않습니다.

노로돔 시하 모니는 크메르어, 프랑스어, 체코 어, 영어와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 난 후 첫 번째 체코 말하기 군주이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노로돔 학교에서 다음 프놈펜에서

데카르트 고등학교에서 초등 교육 (캄보디아)

1962년부터 1967년까지 프라하의 고등학교에서 기본 및 보조 학교 (체코 슬로바키아)

1967-1971 :  프라하 국립 음악원에서 무용, 음악, 연극 과정

1970 :  고등학교 증명서 ( "매우 좋은"자국) - 프라하

1971 :  프라하 국립 음악원의 고전 무용의 첫 번째 상금 과정

1971년에서 1975년까지 높은 무용, 음악, 연극 과정, 프라하의 음악 예술 아카데미

1975 :  프라하의 음악 예술 아카데미 졸업

1975 :  캄보디아 예술 학교의 개념 및 관리에 대한 논문의 저자

1,975에서 1,976 사이 한국의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 영화 촬영의 높은 연구

1976년에서 1979년까지 크메르어 그의 부모와 함께 루즈와 그의 동생, HRH 프린스 노로돔 NarinDrapong의 죄수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자신의 개인 비서로 해외 망명 아버지에게

1981년에서 2000년까지 마리우스 프티파 음악원에서 고전 무용 및 예술 교육학 교수,

가브리엘 포레 음악원과 파리의 도시 WA 모차르트의 음악 학교

1984-1988 :  "데바"발레 그룹의 프랑스 크메르어 댄스 협회 사무 총장 및 예술 감독 회장

1988-1993 :  크메르어 영화 회사 "Khemara 그림"의 사무국 장 및 예술 감독. 꿈과 4 요소 :

 HM 노로돔 시하 모니, 다음 왕자는이 작품 (발레 - 필름)을 생산하고있다

1992년에서 1993년까지 캄보디아의 최고 국가위원회의 회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선정 유엔 캄보디아의 상임 대표 ​​할 수

1993년부터 2004년까지 유네스코 캄보디아 왕국의 대사

2004 :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나라의 고등 평의회의 회원 (Francophonie)

199421 Sdech KROM 쿤의 반열에 HM 왕 고가 (위대한 왕자)

20031017 국왕 높은 관여 의원 임명

2004831 SAMDECH 프레아 BAROMNEATH의 순위에 HM 왕 고가

20041014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8월 아버지를 성공하기 위해

캄보디아의 왕이 왕위 협의회의 회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선출

언어 크메르어, 프랑스어 체코 어를 유창하게 구사, 좋은 영어와 러시아어

 

 

 

 

 

 

캄보디아 프놈펜 왕궁

 

 

 

노을 지는 앙코르 와트

 

 

 설화에 전쟁의 참혹한 의미를 담은 그림

 

프놈펜의 현대 건물

 

프놈펜은 인구가 170만 명의 캄보디아 수도이다

프놈펜 빼고는 30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큰도시가

없을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의 중심인 쥬도라 하더라도

몇만에서 몇천에 불과 하므로 도시인구의 절반이

프놈펜 에 살고있다고 보면된다

 

프놈페의 큰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