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와노래

공녀들의한(찔레꽃1부3)

훼브스 2020. 8. 2. 06:57

 

 

 

 

 

조선왕조에서 제일 무능한 임금은 인조임금이다

 

등거리 외교를 잘 펼치던 광해를 인조반정으로 내치고

 

실리를 버리고 명분을 앞세워 망해가던 명을 도우려다

 

백성을 지옥 속에 처넣고 만다.

 

 

 

 

매년 징발된 수천명의 처녀 조공은 조선의 유교이념을

송두리채 짖밟고 말았다

 

 

여기에 우암 같은 분도 한목 거들어 계속 싸울것을 주장하다가

항복한 임금을 모시지 못하겠다 하여 낙향을 하였다 그당시 시

대 배경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지도자가 무능하면 나라를 도탄에 빠트리는 것은 현대도 마찬가지다.

 

청나라 심양까지 걸어서 끌려가던 공녀들 그들이 잘못이 있다면

인조 같은 무능한 지도자를 만난 시대를 원망해야 할것이다.

 

그들이 끌려가며 배가 고파서 찔레꽃 순를 따먹으며

울부짖으며 엄마를 부르던 어린 소녀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옵니다.

 

 

 

 

 

 

 

무망루

 

 

인조가 군사들을 지휘했던 수어장대 인조와 북벌의 꿈을 실연시키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고 세운 무망루를 보면서 나라가

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한 공녀(인간 진상)들이 생각난다.

 

壬辰倭亂은 7년씩이나 처절한 사투를 벌려 물리친 반면 丙子胡亂은

1년만에 치욕적인 항복을 한다 그까닦을 말한다면

이괄의 난부터 시작된다

 

 

인조반정 군사쿠테타의 주역

이귀.이괄 김자점등이

세검정에서 칼을 갈고 모의하여

창의문을 부수고 들어가 광해를 내친  장소 洗劍亭

세검정이란 지명은 이에 유래했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 영조-정조 부친 이광사가 당쟁으로 사사 되어 그배경으로 평생

 

과거를 포기 야인으로 살았다)은 조선후기 역사가 인데 練藜室記述를 저술하였다

 

삼성출판사 이민수역에 보면(연려실기술 제24권 인조조 고사본말 仁祖朝故事本末)

 

이괄은 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으로 무과에 합격 글또한 잘하여 

명성이 있었다.

 

계해년 (1623)에 북병사(北兵使)로 임명되 부임전에 김류 이귀등이

 

反正 거사를 말하고 끌어들였으나 반정논의에 늦게 참여했다 하여 2등으로

 

낮추었으므로 이괄이 매우불평하였고 !!!!! 반란을 하게 된다...

 

이괄은 인조2년 1624년 한성까지 진격하여  인조는공주까지 몽진하였다

이괄은 반정거사 당일에 김유가 늦어 총지휘를 맏아해서 반정의 1등공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2등공신이 되어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만군사로 처음엔 서울입성하는데

환영도 받았다 한다 관군에 패하게되자 이괄과 한명윤 은 자기만 살겠다 배반한

부하장수 기익현과 이수백에게 경기도 이천에서 기습공격으로

 

참수되어 공주에있는 인조에게 목이 받쳐졌다

 

공주까지 몽진하였으나 九死一生 관군의승리로 진압되자 많은

 

 

반란 조선군과 부관이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후에청)으로가서

 

남침을 꼬드겨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조장하였다 이에 서인들의 배금사상과

망해가는 명을 도우려다 9년만에 丙子胡亂1636 인조14년 2차남침이 일어난다

 

그렇게 쉽게 패한 까닦엔 이괄의 난에 후금에 갔던 조선군의 배반으로

길안내와 약점이용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공녀들이 조공되는데 그참상은 대몽항쟁에 패한뒤 공녀를

원나라에 바치게되어 고려공민왕때 이곡이 올린 상소문에서 그잔혹함을

볼수 있다

 

그후 明시대 조선의 태종 세종도 공녀를 보냈고 청때 병자호란으로

끌려간 부녀자들은 나라에서 돈이없어 개인들이 돈을 가지고 청으로

가서 노예로 사는 공녀들을 귀국 시키고 이경석이 청에가서 대거 귀국시키는데 

還鄕녀 그들은 어느새 화냥년

이되서 모진 고통속에 살게 된다 그들도 살아가야 하기때문에 술 팔고

했을것인데 그들이 낳은 자식은 호로자식이라 아여 극도로 천시당했다 하였다

 

이로서 크나큰 사회적 문제와 혼란에 빠진

나라에서 아이디어를 짠게

지금의 홍제천(서울시 서대문구 은평구 사이)에서 목욕하면 모든 것이

전처럼 깨끗하여 진다 하였다는 공녀들의 모진 삶을 엿볼수 있다.

우리의 사대부들은 힘이없어 지켜주지도 못한 주제에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지천과 홍지문 오간수문 사진들

조선조에서는 물이 얼마나 깨끗하였을까?

이곳에서 목욕하면 신원이된다 하여 한많은 공녀들이 목욕을 하였으나

그나마 양반님네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하니 그들은 어찌되었을까??


 

평보가 찍은 무의도의 찔레꽃

 

공녀들은 끌려가며 허기진 배고픔을 찔레꽃 새순 을 따먹었나보다

머나먼 중국땅으로 걸었으니 그 아픔이 어떠 했을까?? 짚신을 신은채

길섶에서 자게되고 고향의 부모님을 그리며 얼마나 울었을까??


 

 

 

엄마 일가는 길가 하얀찔레꽃

찔레꽃 하얀잎은 맛도좋지

배고픈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이노래는 공녀라는 이름으로 원나라로 끌려가며

 

비통함을 노래한 찔레꽃 이란 노래다

 

고려여인들은 대몽항쟁중1231-1257 25년동안 20만명이 끌려갔고

전쟁이 끝나고도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 고려충렬왕1275-공민왕4년 1355년

80년동안 50여차래나 원나라에 2000명이나 되는부녀자가 공녀로 끌려가

노리개감이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세종때도 7차래 114명 후기에도 7차래 27명이 공녀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말 대학자 이곡(이색의아버지)은 1335년(충숙왕4년)공녀 폐지

상소문을 원황제에게 올렸다

“여자들을 모아들여 공녀를 선발하는데 이쁜여자도 있고

미운여자도 있습니다 사신에게 뇌물을 주고 욕심이 채워지면

이쁜여자도 놓아주고 다른데서 구합니다

 

이러다보니 한 녀자를구하기위해 수십집을 뒤져야 합니다

오직 사신의 말만 통할뿐 누구도 어지지 못합니다

황제의 명으로 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들이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소리가

끝나지 않습니다 혹은 여식을 가둬놓기도 하고 이웃마을에 숨겨놓기도

합니다 그런 친족들을 묶어놓고 매질하며 주리를 트는 꼴이란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일입니다

 

공녀로 뽑혀 떠나는 날이면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난간에 길게 엎어짚거나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이 여럿입니다

 

근심걱정으로 기절하거나

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자도있고

대들보에 목을 메기도 합니다

 

이런 애절한 상소문을 접한 원나라 황제는 고려여성 헌납을 받지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곡의 상소문에 따르면 고려인의 수난은 계속되다가

1356년(공민왕5년)에 중단된다

 

가정공은 고려와 원나라의 성리학의 종장으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원나라에서는 그의명성과 외교능력을 소유한 이러한 애절한 상소문이

받아들여진것이다 훗날 고려의 백성들은 가정공의 공덕을 기려 곡도와 감사제를 지내며 공덕을 기리는 풍습까지 생겼다

 

가정공의 17대손 휘 경재 문강공(文강公)이 세운 신도비에 공녀폐지에

대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있다 고려사절요 제25권 金宗瑞

 

 

 

 

조선군의 비밀통로멀리 성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아름답다

 

 

 

 

 

남문의 정경

 

 

 

 

 

한국의 실학사상(삼성출판사) 서론에 각론하기를 흔히 전통유학은 전근대적 유물로서

 

우리나라 근대화의 저해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것은 전통유학이 지닌 시대착오적

 

요소 때문임은 다시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이 지닌바 소위 번문욕례(繁文縟禮)라거나

 

가부장적 종속윤리라거나 형이철학적 理氣 철학이라거나 한결같이 현실개혁의 저해요인

 

으로 간주되고있는것이다. 라하였다

 

내가 생각하기를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신주단지 모셔 피신시키는게

 

사람의 도리였으니 아니그렇겠는가?

 

기울어가는 명을 돕자고 주장하던 척화파 와

 

개혁과 등걸이 왜교를 펼쳤던 광해(광해는 영창을 살해한 도덕적결함)를 몰아내고

 

왕이되어서 명분만 앞세웠던 인조는 진달래 활짝핀 아름다운 저 성문을 지나 지금의

 

송파구 까지 가서 항복하는데 산성일기에는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시자,

 

 

 

저들이 인도하여 단에 오르셔서 서향하여 한의 오른쪽에 앉으시게 하였다. 

 

 

한이 남향(임금은 남향하여 앉는다)하여 앉아서 술과 안주를 베풀어 놓고 임금께 돈피

 

 

(모피) 두벌을 주니 임금께서 그  중 한벌을 입으셨다. (산성일기중에서)

 

 

 

항복을 하고 君臣관계를 맺고 그의 공덕비를 세운게 현존 송파구 삼전동 289-3번지에 

 

 

있는 삼전도 비다 난세에 명재상 이경석(白軒 李景奭)이 쓴 비석은 그동안 매몰 복원 등

 

 

 

많은 풍파 끝에 지금자리에 보존되어 있다

 

 

 

사진출처:

 金圭鳳 ... 김규봉의 사는 이야기

김규봉의 사는 이야기 

 

현실 정치에 있어서도 대의명분에 치우처서 실리를 버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기사화된 용인시의 경전철 같은 버려도 써도 년간 수천억원의 적자를 면치 못한다

 

하는것들은 아직도 우리가 명분에만 치우치는 우를 범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옛 공덕있는 광주고을 수령들의 공덕비 

성곽을 돌며 역사이야기로 여사님들은 흥미를 가진다

춘곡의 말이 생각 나서 그들에게 전해주었다

 

"역사란 미래의 대한 교훈이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역사인식을 잘못하여 우를 범하는 때가 많다" 

 

 

 

 

 




찔레꽃 / 이연실
엄마 일 가는 길엔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아프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내게 오셨네
 엄마 엄마 나 죽거든
앞산에 묻지 말고 뒷산에도 묻지 말고
양지쪽에 묻어 주
비 오면 덮어 주고 눈 오면 쓸어 주

 

 

내 친구가 찾아와도
엄마 엄마 울지 마
 울 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기럭 기러기 날아 갑니다
가도가도 끝도 없는 넓은 하늘을
엄마 엄마 찾으며 날아 갑니다
 가을 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