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와노래

이난영과김시스터스(3부2)

훼브스 2020. 8. 2. 13:07

 

 

 

 

 

                             

목포 삼학도 와 이난영

 

 

 

 

 

 

김 시스터스

 

 

전 직장 동료였던 C는 유명 대학과 대학원을 나온재원이었다. 그는 내가 노래방이나 야유회에서 흥겹게불렀던 김 시스터스 의 “김치 깍두기”를 영 못 마땅 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하필 김치 깍두기냐? 노래 가사가 그렇게 없느냐.유치하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아니 김치 깍두기는 우리의 자랑인데 뭐가 어떠하단 말인가?”“김치 깍두기가 뭐 자랑거리인가? 외국사람들은 코를 틀어막는데”싸움 비슷하게 가다가 그만 게면쩍어 한다.그러나 현재 세계인들은 김치의 진가를 높게 평가하여 중국이나 일본에서호시탐탐 자기네 상품화 하려고 열을 올리고 있다.또한 드라마 배우 가수 가전 자동차 핸드폰 등 모든 분야에 있어 한류는 세계속의 중심에 있다.그룹지어 등산하산 중 계곡물에 탁족하며 흥얼거리는 김치깍뚜기와 열두냥 짜리 인생을 젊은이들은 흥미를 가진다.

“무슨 노래입니까??”“목포역에 가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온다. 그 유명한 이난영의 딸들이 숙자 애자 외사촌 민자인데 그들이 한류1호가 아니겠는가.흑백 텔레비전에 그들이 나오면 정말 흥에겨웠었지....“ 여기 이난영일가의 사연과 노래들을 여기저기서 모아 편집하여 올려 보겠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황금심-알뜰한당신,고복수-타향살이,이난영-목포의눈물

 

 

 

이난영! 1930년대 초부터

1950년대까지 최고의 가수 반열에 올랐던

이난영은 1934년 목포의 눈물로 선풍을 일으킨

이래 일생을 통해서 그 시대를 사시던 분들의 심금을

울려 주었고 그의 딸 김씨스터즈는 해방 후 가장

먼저 등장한 보컬 그룹이 되었습니다.

 

이난영이 1965년 4월 11일, 세상을

뜬 이래 오랫동안 타향땅 파주에 머물던 혼을

2003년에 목포에 있는 그의 생가에 소공원을 조성하여

 

 

 

 

41년 만에 고향 목포로 돌아와 노랫말 속 ‘

삼학도’에묻혔습니다.이난영 기념사업회는 2006년3월 ‘귀향’을 기념해  22~25일 목포시내 일원에서

다양한 추모행사를 갖고,경기도 파주의 공원묘지에서

옮겨온 유해를 25일 삼학도에 안장했습니다.

 

안장식은 이씨의 유해를 화장한 뒤

20년생 백일홍 나무 밑에 묻는 ‘수목장(樹木葬)’으로치러졌습니다.

 

안장지인 삼학도(대삼학) 삼학사 옆에는목포는 항구다 노래비가 세워졌고, 인근 780여평에는

이난영 공원’이 조성돼 그해 4월 11일 문을 열었습니다.

 

 

민족가수로 아로새겨진 이난영은

작곡가요 악극단을 거느린 대중가요의 대부였던

김해송과 결혼했고 한국전쟁 때 남편의

납북으로 생이별, 자녀에게 노래를 가르쳐

김시스터즈로 미국에 가 활동하게 했습니다

 

 

 

50년 전 미국에 불어온 한류

 

라이프지에 소개된 사진 1 -1960년 1월

 

김치깍두기/김시스터스

작사 : 김시스터스

 

작곡 : 김시스터즈

 

노 래: 김치깍두기 / 김시스터즈 

 

 

머나먼 미국 땅에 십년 넘어 살면서

 

고국생각 그리워 아침저녁 식사 때면

 

런치에다 비후스텍 맛 좋다고 자랑쳐도

 

우리나라 배추김치 깍두기만 못 하드라

 

코리아의 천하명물 김치 깍두기 깍두기

 

자나깨나 잊지 못할 김치 깍두기

 

2.)) 낯설은 타국 땅에 몇 몇 해를 살면서

 

고향생각 그리워 오나가나 식사 때면

 

런치에다 비후스텍 맛 좋다고 자랑쳐도

 

우리나라 된장찌개 고추장만 못 하드라

 

코리아의 천하진미 뚝배기에 된장찌개

 

자나깨나 잊지 못할 된장찌개드라

 

-라이프 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50년 전의 한국, 참 가난하고 살기가 힘들었다.
같은 동족인 북한에게 호되게 당한 침략 전쟁은
신생 대한민국을 제대로 걷기도 힘든 중병환자를 만들어 놓았다.

그때 한국 사회를 한 단어를 표현하자면 암울, 좌절, 무기력,
열등의식 등이었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은 그저 전쟁, 빈곤, 고아,
혼란의 단어부터 연상되는 

후진국중의
후진국으로 보고 있었다.



1957년, 닐리리 열창- 어쩐지 어머니 이난영 여사를
연상케 하는 한국적인 정서의 섬세하고 여성적인
창법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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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도와  김시스터즈- 청춘목장

숙자(17)  애자(15)  민자(17살)



1959년, 이 어둡고 우울한 한국에서 홀연 날아온 세 마리의


참새 같은 어린 자매들이 미국 사회를 뒤 흔들었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고 이 난영 여사와 납북된 작곡가
김 해송 씨의 사이에서 태어난 숙자 ,애자와 이난영 여사의
오빠 딸인 민자, 세 자매들로 구성된 김 씨스터스다.

맏이 숙자가 17살, 동생 애자가 15살, 민자가 17인
모두 성인도 안된
틴에이저들이었다.

 

남편이자 집안의 기둥이던 작곡가 김해송이 납북되자
이 난영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예능에 재능을 보이는
딸들을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목포의 눈물 가수 이난영 [오른쪽에서 두번째]와
납북된 작곡가 남편 김해송[ 오른쪽에서 세번째]
맨 오른쪽이 오빠 이봉룡.
김해송이 조직했던 KPK악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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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맏딸 영자가 리더였으나 키가 너무 커서

이난영 오빠의 딸인 민자를 대신 합류시켰다

 

김 씨스터즈는 1953년 국내 무대에 데뷔했다.

그러나 곧 주한 미군 무대로 자리를 넓혀갔다.
김 씨스터즈는 미군 무대에서도 최고 인기 가수가 되었다.


국내 무대와 미군 무대를 넘나들며 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이 자매들의 유망성을 
미국 라스 베가스 연예계의
한 메니저가 알아보고
미국으로 초청했다.

 

 

1959년 1월 9일 이들 어린 자매들은 가족과 떨어져서
사흘이나
걸려서 미국에 도착했다.

그들이 활약은 라스베가스의 호텔들에서였지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날아온 자매들이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 수준이었다면 그저 라스 베가스 업소들을 전전하다가
몇년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 시스터스들이 내놓은 재능은 그저 가창력
하나만이 아니었다.

춤도 잘 추었고 28개나 되는 수많은 악기들을 다룰 줄 알았다.

 


 

 

 

 

 

 

 

라이프 지 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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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이들 재능과 이국적인 동양의 매력을 교묘히
컴비네이션 시켜서
분위기를 휘어 잡는 비상한
엔터테이너적 재주도 있었다.
여기에 연습으로 하루를 다 보내는 성실한 자세도 밑받침되었다.

김 시스터즈는 자기들의 다양한 재주로서 한 시간 정도의
공연을
간단히 소화할 줄 알았다.

 

 

 

 

 

 

 

 

라이프 지의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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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베가스에서 싻이 튼 이들의 인기는 전 미국에 전파되었다.

미국 순회 공연도 자주 했으며 여러 TV에도 출연했었다.

김시스터스의 인기는 미국의 최고 인기 주말 쇼 프로그램인
에드 서리반 쇼우에 무려 22번이나 출연하게 했다.

권위 있은 라이프 잡지는 김 시스터스를 크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이 부른 찰리 브라운이 빌보드 인기 차트에 오르는가 하면
보브 호프의 월남전 위문단에 멤버로 참여하여 미군들을
즐겁게 하기도 하였다.

 

 

 

 

 

 

 

라이프 지 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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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스터의 대활약은 전쟁과 가난으로만 알려진 한국의
이미지를

비약적으로 향상 시켰을 뿐더러 암담했던
한국민들에게
기쁨과 자신감을 주었다.

 

 

 

 

 

 

 

 

라이프 지 사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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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컴이 발달 되지 않아 지금처럼 김연아의 보도처럼 열광적인


센세이션은 없었으니 신문마다 이들 자매의 활동을 보도했었다.
전국민의 열성적인 성원이 이들을 뒷받침했다.

 

 

 

 

 

 

 

 

라이프지 사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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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스터스의 인기에 힘입어 여러 한국인 가수들이
미국에 진출하였다.

윤복희[코리아 키튼즈]나 김치 켓츠나 패티 김과
김 시스터스 남동생들로 구성된 김 보이스가 줄을 이어 
미국에 데뷔했다.

 

 

 

 

 

 

 

라이프지 사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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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지 사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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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스터스야 말로 한류의 원조이다.

더구나 50년이나 지났지만 그 긴 세월동안 이렇게
어린 나이에 미국 무대에 등장해서
이 정도의 큰 사랑을
받은 한류 스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라이프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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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80년대까지 활동을 했었다.
70년도부터 한국에도 가끔 와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미국 활동중에 찍은 나중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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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들 모두 세월이 흘러 지금은 70을 바라보는 춘추가 되었다.

막내 동생 애자는 1987년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으나

언니 숙자 씨는 미국에, 민자 씨는 남편을 따라 헝가리에
생존해있다.

 

 

 

 

 

 

김해송은 '오빠는 풍각쟁이' '연락선은 떠난다' '한 많은 단발령'

등을 만든 유명 작곡가로 1930~40년대 우리 대중음악계의 천재

뮤지션으로 통했다.

미국의 재즈를 우리말로 부르는 등 한국 최초의 팝송가수로도

이름을 날렸으며, 광복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6·25전쟁 즈음 종적이 묘연해졌다. 납북되었거나 또는

월북했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그의 아내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1916~1965)이며,

 한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그룹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가 자녀들이다.

김해송은 1945년 해방 이후 '김해송 악단(KPK)'을 꾸렸다.

KPK 쇼에는 이난영, 장세정, 윤부길(가수 윤항기·윤복희의 아버지) 등

당대 스타를 비롯해 자신의 딸 둘(훗날 김시스터즈)과 조카

민자(작곡가 이봉룡의 딸)가 출연했다. 김시스터즈는 아버지가

납북된 이후인 1953년 미8군 무대에 데뷔했다. 1959년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해 미국의 유명 TV쇼인

에드 설리번쇼에 출연했고, 정식 음반도 발매했다.

 원조 한류 스타인 셈이다. 

 

 

 

 

The Kim Sisters - Try To Remember (1960)

 

 

김시스터즈 봄맞이 1960 .

 

 

김시스터즈 닐리리아 .

 

 

김시스터즈

 

Korean Kittens - Can't Buy Me Love (19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