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2019 .4.20)
강진만 생태공원을 거처 식사후 언제나 존경하는
정약용의 대표작 목민심서를 집필하던 곳
늘 가보고 싶었던 다산 초당을 갔습니다
일정상 백련사 경내엔 들어가지 못하고
동백숲 울창한 길을 돌아 산고개 넘어 다산초당
영정이 모셔져 있는 그곳 평소 검소함이 생활철학
였던 그분의 초당은 정갈하고 고상한 멋이 풍겨옵니다
백과사전에 발췌 올겨보았습니다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습니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6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입니다.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다산생가(구 경기도 광주)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하였고
그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습니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 직접
병풍바위에「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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