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좋은날 정릉에 갔다
비운의 강씨 비각 앞엔
낙엽이 쌓여있다
벤치위에 앉아
사색하는 머리위로
낙엽지어 내리는 나뭇잎은
500년 전
두 왕자와 공주의 죽음을
말하듯 슬픈 사연으로
비틀대고 있었다
간신히 낙엽
복효근
벌레에게 반쯤은 갉히고
나머지 반쯤도 바스러져
간신히 나뭇잎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는
죄 버려서 미래에 속한 것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먼 길 돌아온 그래서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듯
언제든 확 타오를 자세로
마른 나뭇잎
낙엽
구르몽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도종환
헤어지자
상처 한 줄 네 가슴 긋지 말고
조용히 돌아가자
수없이 헤어지자
네 몸에 남았던 내 몸의 흔적
고요히 되가져가자
허공에 찍었던 발자국 가져가는 새처럼
강물에 담았던 그림자 가져가는 달빛처럼
흔적 없이 헤어지자
오늘 또다시 떠나는 수천의 낙엽
낙엽
낙엽
이생진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 때가 좋은 때다
그 때가 때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하는 것을
울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낙엽
이오덕
낙엽이 떨어지네
날아가네
공중을 한 바퀴 돌면서
"안녕히, 안녕히"
손짓을 하고
이제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는
아기들처럼
먼 길을 떠나는
수많은 낙엽들은
제 할 일을 다한 기쁨
제 갈 길을 가는 기쁨
우리 다시 더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 숨쉬며 손잡자고
모두 다 즐겁게
떠나가네
먼 하늘에
사라지네
낙엽
이호우
임 가신
저문 뜰에
아껴 듣는 푸른 꿈들
잎잎이
한을 얽어
이 밤 한결 차가우니
쫓기듯
떠난 이들의
엷은 옷이 두렵네
낙엽
이희승
시간에 매달려
사색에 지친 몸이
정적을 타고 내려
대지에 앉아 보니
공간을 바꾼 탓인가
방랑길이 멀구나
낙엽
정양
어디로 종적도 없이
떠나보았느냐
하던 일 가던 길
다 버리고
인적 없는 초겨울
첩첩 산중을 보았느냐
볼 테면 보고 말 테면
말라고
첩첩 산중 우수수수
낙엽은 지고
보고 싶은 늬 이마 빡 묻어
하던 일 가던 길 모두
낙엽으로 쌓여 있다
낙엽
헤세
꽃마다 열매가 되려 하고
아침은 저녁이 되려 하니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 말고는
달리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눈부시게 아름답던 여름까지도
가을이 오자
조락(凋落)을 느끼게 하네
나뭇잎이여
바람이 너를 유혹하거든
그냥 가만히 달려 있거라
네 유희를 계속하며 거역 치 말고
그대로 가만히 내버려둘지니
바람이 너를 떨어뜨려
집으로 불어가게 하여라
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화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끼리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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