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장가계의풍습과역사 장가계1차(중국여행20부)

훼브스 2020. 7. 28. 14:43

 

三族의 원주민

 

 

봉우리들이 하늘에 닿을듯한 비경 장가계는

한국인들이 제일 많이 찾는 곳이다.

이런 비경에 신선들이 살았을 법도 한데

여기엔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 

 

 

 

 

 

장가계 시의 임구는 2006년 기준으로 약 160만명

으로 20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그중 69.5가 토가족 백족 묘족등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토가족이 61로 주를 이룬다

 

토가족의 독특한 풍습은 결혼 할 때 부모의 은공을 생각하며

한달간을 울고 지낸다

 

혼담이 오가기 시작하면 남자는 결혼할 여자 집에 찾아 가서

장래의 장인, 장모에게 인사를 한다.

예비 신랑이 짊어지고 온 대나무 바구니를 내려서 안방으로 들여보낸다.

여자는 살짝 안방으로 들어가서 바구니를 열어본다.

그리고 바구니 안에 들어 있는 돼지족발을 손에 들고 자세히 살펴본다.

만일 족발에 아무런 표시가 없을 경우,

남자 쪽에서 아직 결혼 날짜를 정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반면에 발굽 근처에

구멍이 뚫려 있으면 택일을 재촉하는 의미다. 여자 쪽은 서둘러

결혼 준비를 해야 한다.

여자가 사정이 있어 그해에 결혼할 수 없거나 한동안 부모 곁을 떠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자가 돌아갈 때

족발과 꼬리를 답례품과 함께 바구니에 넣어 보내면 된다. 남자가 집에 돌아가

풀어보면 곧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남자는 다음해까지 기다려야 한다.

결혼이 결정되면 신랑 집에서는 먼저 점쟁이한테 가서 결혼 날짜를 받는다.

날짜가 정해지면 신부 집에서는 목수에게 나무 침대를 만들도록 하는데

일체의 비용은 신랑 측에서 부담한다.

 

잘 울수록 칭찬 받는 토가족 신부결혼을 약 한 달 앞두고

토가족 처녀들은 울기 시작한다.

이는 발등 밟기와 더불어 토가족의 가장 전통적이고 오래된 풍습이다.

우는 데도 방법이 있는데 그냥 우는 것이 아니고 노래에 곡을 붙여가며 운다.

 

짧게는 열흘, 길게는 두 달가량 계속 운다. 그래서 토가족 여자들은

목소리가 쨍 하고 톤이 높단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생후 한 달 이후, 15세까지 계속 울린다.

12세가 되면 동네에서 잘 울기로 소문난 아주머니를

전문 선생으로 모시고 우는 방법을 가르친다.

일종의 과외공부이다.

 여자는 결혼 전에만 우는 것이 아니라 시집간 첫날 시부모 앞에서도

구성지게 울어야 한단다.

이렇게 토가족이 울음에 집착하는 이유는 얼마나 많이 울었냐

에 따라 결혼 후의 명성이나 시집살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댁에서는 구성지게 잘 울고 눈이 퉁퉁 부어올라야 며느리를 잘 보았다고 소문이 난다.

이로써 집안사람으로 인정하고 재산 상속을 해주고 곳간 열쇠를 준다.

 만약 눈이 많이 부어 있지 않으면 3년을 더 연습할 때까지 곳간 열쇠를 내놓지 않는다고.

울음 노래의 가사를 보면 부모와 울기, 형제자매와 울기, 중매꾼 욕하기 등

여러 가지 내용이 있다.

가사의 양이 천 줄도 넘는데 우는 것이 얼마나 절절한지 토가족 처녀가

결혼을 앞두고 울기를 시작하면 철석간장도 녹아내린다고 한다. 아무리 모계사회,

여성상위 사회라 할지라도 결혼에 대한 여자들의 불안감은 모두 같은 모양이다.

아니면 토가족만의 특별한 울음에 대한 철학 때문일까.

 

 

 

 

강시라고 몸이 뻣뻣해져 죽은 귀신을 말하는데 영화에 나오는 손을

앞으로 뻗고 콩콩 뛰는 귀신은 장가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土家 는 흙에서 나서 흙에서 성장하고 죽는 것을 말하는데

토가족은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집근처에 시체를 묻고 3일간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축제를 연출한다 한다

 

 

 

 

 

장가계가 그렇듯 토가족은 전답이 거의없는 산악지대여서

항상 먹을것이 부족해서 엣날에는 산적이 많았다 한다

그들은 외부로 부터의 침입에 대항해 맹렬하게 싸워

자신들을 방어하였는데 그래서 전투력이 능했다 한다

 

이러한 민족성을 이용해 명나라 시조 주원장이 중국 통일 할 때

많은 토가족들을 징집하였다한다

이들이 전투중 많이 전사하였고 그들의 풍습대로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와 땅에 묻어주어야 하는 관계로 그들은 많은 노력이 필요 했다

 

그 무렵 천문사에 귀곡자라는 도사가 살았는데 그도사의 제자들이

속세로 내려와 돈을 받고 이 시신들을 운반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제자들은 시체에 짐승의 혼을 불어넣어 걷게 하고 노란 종이에

빨간 주사라는 물질로 부적을 써서 붙였다고 한다

3명이 한 조가 되어 한 명은 길잡이로 맨 앞에서고 중간에 한명은

강시들을 감시하며 가고 나머지 한 명은 시신들의 맨 뒤에 서서

짐승들의 접근을 막으면서 고향까지 왔다고 한다

 

 

 

 

 

 

 

 

장가계 얽힌 역사

     

기원전 256년부터 195년에 살면서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漢高祖)

본명이 유방(劉邦)이고,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 사람으로

진나라 2세 황제 때 기병(起兵)하여 함양(咸陽)

빼앗아 한왕(漢王)이 되었다.

동 시대에 기병한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에게 늘 밀리다가

  해하(垓下: 안휘성 봉양부 영벽현)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그를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도읍을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

잡고 나라 이름을 한()이라 부르니 한은 곧 중국을 말하는

대명사처럼 되었다. 한족(漢族), 한문(漢文), 한자(漢字) 등이 그것이다.

 

한고조를 도와 진나라와 초패왕 항우를 격파하고 중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량(張良: 戰略), 소하(蕭何: 內政), 한신(韓信: 作戰指揮)

세 사람을 한고조 삼걸(三傑)이라 부른다.

한고조 삼걸 중 장량(張良) 자를 자방(子房)이라 하고 시호가 문성(文成)인데

그 선조는 한()의 사람이다. 진시황(秦始皇)이 한을 멸하자

이를 보복하고자 창해역사(倉海力士)를 시켜 박량사(博良沙)에서

진시황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변성명하여

하비(下邳)에 숨어 살 때 황석공(黃石公)이라는 한 노인으로부터

태공망(太公望: 강태공)의 병서(兵書)를 얻어 전략에 능하게 되었다.

 

초패왕 항우와의 결전 해하싸움에서 장량은 옥피리로 슬픈 곡조를 불어서

이를 들은 항우의 정예 호위군 8,000명이 모두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고

도망가게 만드는 심리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장량에게는 삼만호의

식읍까지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병을 핑계로 한고조를

떠났는데 사람들은 적송자(赤松子: 신선)를 따라 갔다고 말한다.

 

한고조가 중국을 통일한 후 그 부인 여후(呂后)의 모략으로 한고조

삼걸의 나머지 두 사람 소하, 한신(고조 11)이 한고조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임관40주년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2002. 9. 9-16 간에 실시한

 중국여행 때 911일과 12일에 장가계 산수를 구경하였다.

 

여행 일정표에서 장가계란 말이 있어서 지명 치고는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려니 했는데 여행 중에

가이드의 설명과 안내간판 및 팜플릿에서 그 이름이 한자로는

張家界이고, 위 한고조 삼걸의 하나였던 장량(張良)과 관련이

있음을 알고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선친께서 하시는 한고조의

천하통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는데 그 이야기

속에 장량이 자주 등장했었다.

그 중에 기억 나는 한가지-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을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어느날 그 동안 함께 고생한 신하들을 위안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한창 흥이 고조에 달했을 때 한고조가

 

대저 장막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겨

천리 밖의 전선에서 승리를 걷우게 하는 참모적인 재능에는

내가 자방(子房: 장량의 자)만 못하고

 

(夫運籌幄之中 決勝千里之外 吾不如張良

부운주유막지중 결승천리지외 오불여장량),

국가를 다스려 백성을 어루만지고 군량을 전선에 공급하여 양도를

한 번도 끊이게 하지 않은 내정이나 병참적 기량에서는 내가 소하만 못하고

 

(鎭國家撫百姓 給餉不絶糧道 吾不如蕭何

진국가무백성 급궤향불절양도 오불여소하),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실전적인수완에서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連百萬之衆 戰必勝攻必取 吾不如韓信

연백만지중 전필승공필취 오불여한신)

그런데 왜 나는 황제가 되고 경들은 내 밑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 때 장량이 나서서

 

그것은 폐하께서 이런 저런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믿고 일을 맡기고,

그들로 하여금 열성을 다하여 일 할 수 있도록 하는

더 큰 재주(지도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중국 호남성 서북쪽 한 구석에 위치한 장가계(張家界)

38,000만년 전에 바다였던 곳이 융기하여 해발 1,500m

고원지대가 만들어졌는데 장구한 세월에 걸쳐 퇴적암(堆積岩) 중 역암(礫岩),

사암(沙岩), 석회암(石灰岩) 등 약한 부분이 깎여 나가고 단단한 이암(泥岩)

부분만 남아서 78,000개의 각가지 물형석(物形石)과 기암봉(奇岩峰)들을

만들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곳을 신선들이 산다는 낙원(파라다이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불렀고, 지금은 다른 곳에 도원(挑園)

따로 있다 하여 무릉원(武陵源)이라 부른다고 한다.

 

바로 이 곳에 한고조 삼걸의 한 사람 장량의 묘가 있다.

원앙(鴛鴦)계곡 입구, 그러니까 지난 8월 달에 준공했다는

백룡전제(百龍電梯: 높이 335m의 세계제일의 엘리베이트)에서 가깝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장량은 한고조가 중국 천하를 통일한

다음 미리 앞날을 내다보고 자기에게 주는 삼만호 봉토도

사양하고 병을 핑계하여 은퇴한 후에 바로 이 곳에 와서

신선처럼 살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지역의 주인으로 행세하던

토가족(土家族: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지만

 이 곳에서는 지금도 장가계시 인구 150만의 66%98만명)

거부반응 이 거세었으나 장량은 수차(水車)를 고안하여

그들의 농사에 큰 보탬을 주는 등의 노력으로 차츰

토가족의 신임과 숭앙을 받게 되었다 한다.

소하, 한신 등을 모함하여 죽이게 한 여후는 장량도 없애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고조에게 장량이 반역할 것이라고 모함하여

정벌하도록 꾀어 한고조는 장량도 채포하고 토가족도

정벌할 생각으로 이 곳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용감한 토가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장량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결국 한고조도

이들을 정복하지 못하고 체면상 이 곳이 장량 일가의 땅(張家界)’으로

인정하고 물러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지명이 장가계(張家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장량은 전쟁에서도 앞 일을 잘 내다보고

전략을 세웠지만 개인의 앞날도 잘 볼 줄 아는 명철(明哲)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도 그의 혜안(慧眼)을 존경하여 많은 시조에서

그를 칭송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몇 가지만 싣는다.

 

 

장량을 칭송한 시조

 

張良(장량)六鞱三略(육도삼략) 그 뉘게 배웠던고

金椎一聲 (금추일성)四海(사해)가 봉기하니

祖龍(조룡)의 놀란 魂魄(혼백)半生半死(반생반사) 하거라.

 

장량의 육도삼략(전략)은 그 누구에게서 배웠던고

진시황을 친 쇠방망이의 한 소리에 온 세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진시황의 놀란 혼백이 반은 살고 반은 죽었도다.

 

鷄明山(계명산) 玉蕭(옥소) 부러 八千弟子(팔천제자) 흣튼 후에

三萬戶(삼만호) 辭讓(사양)하고 赤松子(적송자)를 좇아 노니

아마도 見機明哲(견기명철)子房(자방)인가 하노라.

 

계명산에서 옥피리를 불어서 항우의 팔천 군사를 흩어지게 하고

그 공으로 내리는 삼만호의 봉토도 사양하고 신선 따라 노니니

아마도 기회를 볼 줄 아는 밝은 현인은 장자방인가 하노라.

 

古今(고금) 人物(인물) 혜어보니 명철보신(明哲保身) 그 뉘런고

張良(장량)謝病僻穀(사병벽곡)하야 赤松子(적송자)를 조차 놀고,

氾蠡(범여)五湖烟月(오호연월)吳王(오왕)亡國愁(망국수)

扁舟(편주)에 싣고 오니

아마도 이 둘의 高下(고하)를 나는 몰라 하노라.

 

고금의 인물을 살펴보니 총명하게 처신한 사람이 누구인가

장량은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은퇴하여 곡식을 먹지 않고 신선을 따라 놀았고,

범여는 오호의 은은한 달빛 아래 놀면서 오왕(부차)의 망국한은 조각배에 싣고 오니

아마도 이 두 사람의 높고 낮음을 나는 모르겠구나 끝

 

 

장가계의 사계절(四季節)

 

 

봄(春)

 

 

 

 

 

 

 

 

 

 

 

 

 

 

여름()

 

 

 

 

가을(秋)

 

겨울(冬)

 

장가계 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