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만리장성 슬픈전설 야래향(중국여행21부)

훼브스 2020. 7. 28. 14:47

 

 

 

 

 

20121113

 

만리장성으로 가는 차내에서 가이드의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이글은 가이드가 설명한 것을 인터넷에 조회 편집해서 작성한 것입니다

춘추전국 시대부터 북방 흉노족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쌓은 것을 진시황이 하나로연결했다는  만리장성 당시 북방의 유목 민족들은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로 더 이상 북쪽으로 진출 할 수 없게 되자 남쪽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몽염은 221년 제나라를 멸망시킬 때 큰공을 세워 네사에 임명되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그에게 대군을 주어 흉노와 융족 등의 북방의 기마병들을 견제하게 되었다이때 몽염은 30만 대군을 가지고 흉노족을 쓸어버렸는데 이때 빼앗긴 땅을 흉노는 목돌 대선우가 나오기 전까지 회복하지 못하였다 유방이 흉노족에 압도적으로 발린 걸 생각하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이후 몽염은 점령한 하남 지역에서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몽염은 30만 병력을 이끌고 북쪽의 융적(오랑캐)을 쫓은 뒤 장성을 쌓았다. 장성을 쌓으면서 지형과 산세의 기복에 따라 요새를 만들었다. 임조(간쑤성 민현)~요동(랴오둥)까지 1만 여가 되었다.”(<사기> ‘몽염열전’)만리장성이라는 말은 바로 이 <사기> ‘몽염열전에 기록된 몽염이 쌓은 1만 여 리에서 탄생했다. 기원전 213년 시황제의 명에 따라 만리장성을 축조한 몽염은 시황제가 급서한 뒤(기원전 210) 2세 황제 호해와 환관 조고의 계략에 말려 자결을 명받았다.

 

역사가 사마천의 평가는 가차없다.사마천은 내가 몽염이 건설한 만리장성을 둘러보고 왔다면서 이렇게 장탄식한다.산악을 깎고 계곡을 메워 지름길을 통하게 했다. 백성의 힘을 가벼이 여긴 것이 분명하다. 백성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해야 할 몽염 같은 이름있는 장수가 도리어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공사를 일으켰구나. 그러니 몽염이 죽는 것은 마땅하다.”(<사기> ‘몽염열전’)사마천은 백성을 고달프게 만든 만리장성 공사에 앞장 선 몽염은 죽어도 싸다고까지 극언한 것이다.몽염? 죽어도 싸다전국시대의 혼란기에서 겨우 안정을 찾은 진나라 백성들이 느껴야 했던 고초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림잡아 100만명에  이르는 진나라 사람들이 만리장성 수축에 동원됐다. 일꾼들의 고초는 차치하고 물자와 식량을 실어나르느라 노약자와 여성들까지 총동원됐다. 게다가 세금까지 무겁게 거뒀다.지금처럼 크레인 같은 건설장비도 없었다. 높은 산과 험준한 계곡과 골짜기 등에서 힘없는 백성들은 속절없이 죽어나갔다.진나라의 가혹한 형법은 조금이라도 꾀를 부리는 백성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망하지 않으려 장성을 쌓았지만 거꾸로 성을 쌓음으로써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을 몰랐다”(<회남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기>회남왕전을 봐도 참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몽염을 파견해서 장성을 쌓아 동서 수천리에 이르렀다. 비바람과 눈보라에 몸을 맡긴 병사와 장수는 언제나 수십만이었다. 죽은 자도 헤아릴 수 없으며시체가 천리이고, 피가 흘러 전답을 이루었다. 반란에 가담하려는 백성이 10가구에 5가구나 되었다.”즉 장성 수축에 따른 가혹한 노역에 이기지 못한 백성들이 진승·오광의 난’(기원전 209)에 속속 가담했음을 고발하고 있다.

 

 

맹강녀와 만리장성에 서린 눈물 나는 슬픈 전설 맹강녀는 본디 제나라의 시골 처녀였습니다. 17세에 서운이라는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신랑 서운은 부역을 모면하려고 3년 동안이나 산중에 숨어 다니다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관헌들이 결혼식장에 덮쳐 와서, 서운은 기어코 노역부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신부 맹강녀는 신방조차 차려보지 못한 채 신랑을 빼앗겼건만 한 번 끌려간 신랑은 영영 돌아올 줄을 몰랐습니다. 두 번째의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세 번째의 엄동설한이 다시 닥쳐왔건만, 서운은 언제까지나 돌아올 줄을 몰랐습니다봄옷 하나만 입고 끌려간 남편이 이 엄동설한에 얼마나 추울까.’맹강녀는 혹한에 떨고 있을 남편 모습이 자꾸만 눈에 떠올라 보여서 마침내 솜옷 한 벌을 지어가지고 남편을 찾아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태산준령을 수없이 넘어, 여러 달 만에 만리장성 공사 현장에 도착했습니다.만리장성 공사현장에는 여러 만 명의 노역부들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맹강녀는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내 남편이 3년 전에 이곳에 끌려왔는데, 여러분 중에 혹시 서운이라는 내 남편을 아시는 분 안계십니까?” 하고 애타게 물어보았습니다.그러나 서운이라는 청년을 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작 한다는 소리가, “3년이 지났는데도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일지 모르오. 여기서 날마다 돌을 다루는 관계로, 살아서 돌아가는 사람보다도 돌에 치어 죽는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까요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맹강녀는 미친 사람처럼 남편을 찾아 헤매었으나, 남편의 모습은 아무 데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그리하여 몇 달을 두고,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공사 현장을 정신없이 헤매고 있었는데, 하루는 성벽 옆을 울면서 지나가고 있노라니까, 별안간 아무 까닭도 없이 멀쩡하던 성벽 한 모퉁이가 굉장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깜짝 놀라 눈길을 돌려보니, 무너진 성벽 속에서 사람의 뼈가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맹강녀는 무너진 성벽 속에서 사람의 뼈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 대뜸 자기 남편의 죽음을 연상하였습니다.

'혹시 남편의 백골이 백골들 속에 섞여있는 것이 아닐까.그렇다면 백골이나마 거두어다가 장사를 지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백골은 모두가 똑같아서, 남편의 뼈를 가려 낼 길이 없지 않은가. 맹강녀는 누구의 백골인지도 모르는 뼈를 어루만져 보며 한없이 울다가 문득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설(俗說) 하나를 연상하였습니다. 그 속설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백골은 상태편의 피를 빨아 들인다.’ 고 하지 않았던가.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맹강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백골에 핏방울을 떨어뜨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피를 흘려보아도 피를 빨아 들이는 백골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단념할 수가 없어서 성벽을 파헤쳐가며 백골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시험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 중 사흘 만에, 맹강녀는 마침내 피를 빨아들이는 백골을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다른 뼈들은 피를 떨어뜨려 보아도 그냥 흘려버리기만 할 뿐이었는데, 그 백골만은 핏방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뼈 속에 흡수되어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아아! 이 뼈가 바로  나의 남편의 백골이구나!”맹강녀는 남편의 백골을 가슴에 부둥켜 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백골이나마 고향땅에 묻어주려고 남편의 뼈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건만, 워낙 피를 많이 흘린 데다가 길은 멀고 날씨는 추워서, 맹강녀는 마침내 산해관 근처에서 남편의 백골을 품에 안은 채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마을 사람들은 두 부부의 슬픈 이야기에 감동된 나머지, 그들을 장사지내고, 그곳에 맹강녀의 사당까지 세워주었다고 합니다아무튼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백성을 그렇게 괴롭히고, 그것만으로 부족하여 아방궁까지 증축하여 영원토록 권력과 영화를 누리려 하였지만, 49세에 독살 당하니 권력도 영화도 덧없는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천록비결이라는 책에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라는 말이 나온 것은, 분명히 앞을 내다보고 한 말이었습니다. 아니,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망진자호야가 아니라 망진자시황제자신야(亡秦者(始皇帝自身也)’라고 해야 옳았을 지도 모릅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지 못하면 과거의 전철(前轍)을 다시 밟습니다.

 

 

 

맹강녀 사당[孟姜女廟]정녀사(貞女祠)’라고도 부른다. 이 사당은 산해관에서 동쪽으로 6Km 떨어진 망부석촌(望夫石村) 산기슭에 있다. 맹강녀 사당은 맹강녀가 만리장성에서 통곡하다(孟姜女哭長城)”는 민간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사당은 두 개의 전각으로 나누어진다. 앞의 전각에는 맹강녀상(孟姜女像)이 있고 좌우에는 동남동녀가 서 있다. 전각은 관음전이다. 전각 뒤에는 망부석(望夫石)이 있다. 돌 위에 두덩이[]가 있는데 맹강녀가 남편을 그리워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사당 앞 동남쪽 4Km에 두 개의 암초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맹강녀의 무덤이라고 한다

 

 

 

 

 

 

 

 

 

 

 

 

 

 

 

 

 

 

 

 

 

 

 

 

 

 

 

 

 

 

 

 

 

 

 

 

 

 

 

 

 

 

 

 

 

 

 

 

 

 

 

 

 

 

 

 

 

 

 

 

 

 

 

 

 

 

 

 

 

 

 

 

 

 

 

 

 

 

 

 

 

 

 

 

 

 

 

 

 

 

 

 

 

 

 

 

 

 

 

 

 

등려군(鄧麗君)

 

 

등려군은 중화민국 가수였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에서는 甜蜜蜜(첨밀밀)로 잘알려져 있다

천안문 사태때 시위에 참가하여 추방되기도

하였다

 

 

야래향 가사/등려군

那南风吹来清凉
나 난뻥 춰이라이  칭량

那夜莺啼声细唱
나 예 잉티썽 씨창

月下的花儿都入梦
웨쌰더 화얼 떠우 루멍

只有那夜来香
즈 유 나 예라이 썅

吐露着芬芳
투루저 뻔빵

我爱这夜色茫茫, 也爱这夜莺歌唱
워 아이쩌 예써 망망, 예 아이 쩌 예잉 거창

更爱那花一般的梦
껑 아이 나 화이반더 멍

拥抱着夜来香闻这夜来香
융뽀우저 예라이썅 , 원쩌 예라이썅

夜来香我为你歌唱 ,夜来香我为你思量
예라이썅 워 워이니 거창, 예라이썅 워 워이니 쓰량

啊~啊我为你歌唱
아 ~ 아~ 워 워이니 거창

我为你思量
워 워이니 쓰량

a~la~la 라라라
夜来香 예라이썅
夜来香
夜来香

남풍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그 밤 꾀꼬리는 구슬피 웁니다
달 아래 꽃들은 모두 잠이 들었는데
오직 야래향만이 향기를 내뿜습니다
아득한 밤의 어둠을 사랑하고
밤꾀꼬리의 노래도 사랑하지만
야래향을 품에 안고 꽃잎에 입맞춤하는
그 꽃같은 꿈은 더더욱 사랑합니다
야래향 나 그대를 위해 노래합니다
야래향 나 그대를 그리워합니다
아아.. 나 그대를 위해 노래하고 그대를 그리워합니다
야래향 야래향 야래향

 

 

 

등려군(鄧麗君) - 야래향 夜來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