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蘇堤)로 갔다
중국 4대미녀중 서시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호수명이고
송나라때 소동파가부임하여 정비한곳이다 서호하면 酒池肉林이 생각난다.
월왕구천이 전쟁에서 패하자
범려를 시켜 오왕 부차에게 2명의 미인을 진상하여 호수를 만들게하고 술잔을
물에 뛰우고 나뭇가지에 술안주 고기를 걸고 여인들과 즐기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
패망하는데 부차는 죽음에 이르러 충신 오자서를 죽인것이 부끄러워 하얀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궁인에게 참수케 하여 최후를 마쳤다는 슬픈 역사의 습지이다.
유람선을 타고 보석에게 역사이야기를 들려주었다. 臥薪嘗膽의 어원을 말하며
다음은 서호와 서시에 얽힌
몇가지 사자성어 이다
抛塼引玉
벽돌로 처서 옥을 얻는다는 (포전)은 작은이익을 미끼로 던저 (인옥 )큰 보물 옥을 뺏어온다
는 뜻으로 기원전 3000년전 무렵 전국시대 당시 燭 나라는 풍족한 나라여서 주변 강대국
들이 호시탐탐 노렸지만 내륙깊숙한곳에 위치해 파병해서 공격할수 없는상황이었다
그래서 秦나라의 혜왕은 병법36계중 17계인 포전인옥을 생각하고
돌로 만든 들소5마리를 촉나라 가는 길목에 넣어두고 그속에 금덩이 들이 들어있는데 선물로 주겠다는
소문을 퍼뜨려 우뫼한 촉왕은 신하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길을 닦아 돌 들소를
가져갔다 마침내 때를 기다렸던 진의 혜왕은 길따라 군대를 진격시켜 촉을 멸망시키고 가져간
금덩이도다시 찾아왔다 트로이의 목마처럼 한 이전술은 월나라 범려의 작전으로 서호가 탄생하게 된다
월나라의 명신 범려는 월나라가 오나라에 패하여 굴욕적인 화친조약으로 臥薪嘗膽후
복수할 기회를 노렸지만 오나라의 명장 오자서가 있는한 뜻을 이룰수 없다고 판단하고
오왕 부차와 오자서를 이간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애인이 었던 중국 최고의 미녀
서시를 부차에게 보낸다 이로인하여 서시에 빠진 부차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서호에서
주지육림에 빠져 이를 간하는 오자서를 죽이고 결국 월의 침공으로 최후를 맞으면서
오자서가 부끄러워 얼굴에 힌천을 덮고 시종에게 명하여 자신의 목을 치게 한다
이는 작은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큰이익을 얻는다는 병법36계중 17계에 들어있는
抛塼引玉 의 미인계를 동원하였던 것이었다.
오자서는 전국시대 초나라사람으로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 평왕에게
죽임 당하는데 그사연이 비무기 라는 간신이 며느리로 간택된 미인을
진상하는데서 발단되어 그 부당함을 끝까지 상소했던 데서 시작된다
오자서는 천신마고 끝에 오나라로 망명 대부가 되서 제나라사람
손무의 도움을받고 합려의 출정명으로
초나라로 처들어가 이미 죽은 평왕을 부관참시 하였다.
허나 합려가 죽고 그아들 부차가 왕이되자 간신 백비의 농간으로
그리고 월의 명재상 범려의 미인계로 자진하여 죽고만다
죽음에 앞서 오자서는 말하기를
“내 무덤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만들때 목재를 쓰도록 하라
그리고 내가 죽거던 내눈을 뽑아 오나라 동문에 달아 월나라 군사들이
처들어 오는것을 똑바로 보게하라“
그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말을 전해들은 부차는 몹시 화가나서 오자서의 시체를 가져다가
말가죽 자루에 담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오나라사람들은 그를 가엽게
여겨 강 언덕에 사당을 세우고 서산이라고 불렀다.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은 ‘서시(西施)’라는 작품에서 그녀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西施越溪女 월나라의 빨래하던 아가씨 서시는
出自苧蘿山 저라산 기슭의 완사계(浣紗溪) 출신
秀色掩今古 빼어난 용모는 고금에 둘도 없고
荷花羞玉顔 연꽃도 그녀의 예쁜 얼굴에 부끄러워했었지
浣紗弄碧水 푸른 물결 일으키며 비단을 빨며
自與淸波閒 스스로 한가로이 맑은 물을 벗 삼았지
皓齒信難開 눈처럼 하얀 치아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沈吟碧雲間 나직이 부르는 노래 구름 위로 올라갔네
勾踐徵絶艶 구천이 이 절세가인을 불러들여
揚蛾入吳關 눈썹을 치켜세우고 오나라로 들어갔지
提攜館娃宮 오왕이 손을 잡고 관아궁에 올랐거니
杳渺詎可攀 아찔하게 높은 그곳은 어찌 올랐을까
一破夫差國 부차의 월나라를 물리치고 떠난 뒤로
千秋竟不還 천 년토록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네
궁녀들에게 단번에 일사분란한 군기를 불어넣어 오왕을 놀라게한 손무
오자서를 도와주고 孫子兵法(1편 시계편부터 13편 용간편 까지) 을 만든 손무는 손자
병법에서 운용의 기본적인 원칙부터 실전 응용 전술의 내용을 담은 최고의 병법서로
인간의 행동에대한 깊은 통찰까지 포함한 지침서이자 兵家 사상의 진수를담은 책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신이 詩로서 손무를 찬미한 노래가 있다
손무의 재주는 오자서를 빛냈도다
군법으로 두 총회를 참하고 삼군에 그 위엄을 떨쳤도다
한결같이 대군을 거느리고 귀신처럼 적군의 계책을 알아냈도다
강적 초나라를 크게 무찌르고 秦나라 군사에게 약간 꺽였도다
그의 지혜는 야비하지 않았으며 추잡한 계책을 쓰는 일이 없었도다
마침내 높은 벼슬을 사양했으니 망하고 사는 길을 알았도다
세상에 나와선 실력을 발휘하고 다시 산으로 돌아가자 천추에 그이름 날렸도다
그의 저서 손자병법 13편은 이로서 병가의 경전이 되었도다
酒池肉林 서호에 술을 뛰우고 나무가지에 고기를 달아 서희와 놀아 정사를 팽개친 오왕
吳越同舟 오나라 와 월나라가 견원지간 처럼 싸우다가도 이민족이 처들어오면 한배에 탄것처럼
함께 싸워 물리친다는뜻
指鹿爲馬 동일된 진이 망하게 되는 과정에서 환관이 득세 말을 사슴이라 해야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다는말
兎死狗烹 교활한 토기를 잡으면 사냔개는 잡아먹는다는 범려의 편지
鳥盡弓藏 나는새가 잡히면 좋은 활은 거두어 지는것이다 범려의편지
長頸吳喙 월왕구천은 목이길고 새처럼 입이뾰족하니 어려움은 함께 할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수 없습니다
同病相憐 초로부터 오로방명하게된 오자서가 똑같은 처지의 백비를 오왕에게 천거 하며
탄생하게된 말 허나 백비의 모함에걸려 오자서는 자살하게 만든다
아래글 출처 http://blog.naver.com/bongchim114/50138988550
와신상담 [臥薪嘗膽]
臥 : 엎드릴 와薪 : 섶나무 신嘗 : 맛볼 상膽 : 쓸개 담
필(邲)의 전투에서 대패한 진(晉)나라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초나라가 점차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진나라와 초나라 간의 패권을 다투는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는데 결국 송나라가 나서서 두 나라를 화해시키고 나서야 전쟁을 그만두었다. 이리하여 중원의 정세가 평온해지자 남방에서 오나라와 월나라가 싸우기 시작했다. 오나라 왕 합려는 오자서와 손무의 보필로 구거(桕擧)의 싸움에서 초나라를 대패시켰는데 오나라군이 초나라 도성 정도를 진격할 때 월나라군이 오나라로 진격했다. 이로 인해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합려는 즉시 군대를 돌려 오나라로 돌아와 월나라군에게 반격을 가했다.기원전 496년, 월나라 왕 윤상(允常)이 병으로 죽자 아들 구천(勾踐)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합려는 월나라가 국상을 치르는 틈을 타서 군대를 진격시켰다. 두 나라 군대는 휴리(携李)라는 곳에서 크게 싸웠는데 결국 오나라군이 대패하고 합려는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합려는 임종시에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의 원수를 절대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왕이 된 부차는 기필코 월나라를 패망시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오자서를 상국(相國)으로, 백비(伯嚭)를 태재(太宰)로 삼아 월나라를 진격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복수를 하기 위해 부차가 밤낮으로 군사를 조련한다는 소식을 들은 구천은 이듬해에 선제 공격을 했다. 대초(大椒)라는 곳에서 결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월나라군이 대패했다.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친 구천은 오나라 군사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었다.
월왕 구천의 검 [춘추시대]
고대 병기 중에서도 특이한 보물로, 출토 당시에도 여전히 빛이 났다. 굉장히 날카로워서 머리카락도 벨 수 있다. 몸체에는 흑색의 무늬가 있고 ‘월왕 구천 자작용 검(越王勾踐自作用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검은 고대 중국의 검 주조 기술이 높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구천은 부인을 죽이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고 했다. 그런데 대신 문종(文種)과 범려(範蠡)가 맹목적인 결전은 오로지 죽음뿐이라면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오나라 백비에게 뇌물을 먹여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 어떠냐고 설득했다. 구천은 그 말을 따라 몰래 백비에게 미녀들과 금은보화를 보냈다. 탐욕스러운 백비는 뇌물을 받자 매우 기뻐했으며, 부차에게 월나라 구천을 살려주라고 권유했다.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천을 살려주기로 했다. 단, 구천이 오나라로 와서 속죄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범려
구천은 부차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나라 대사를 문종에게 맡긴 후 부인과 대부 범려 등을 데리고 오나라로 갔다. 부차는 아버지 합려의 능묘 옆에 돌집을 하나 짓고 구천 부부와 그의 대신들을 몰아넣었다. 그러고는 죄수옷을 입히고 말을 먹이는 고역을 시켰다. 그리고 외출을 할 때면 범려를 밟고 수레를 탔으며, 구천에게는 말고삐를 잡게 했다. 구천은 이렇게 2년 동안 오나라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 했다. 문종은 백비에게 미녀와 금은보화를 또 보내어,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내도록 부차에게 진언해 달라고 부탁했다. 백비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법이 거의 없는 부차였다. 2년 동안 구천이 진심으로 속죄했다고 생각한 부차는 백비의 말을 듣고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냈다.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이 원수를 기필코 갚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무명옷을 입고 잡곡을 먹었다. 잠도 초가집에서 잤으며 돗자리 대신 섶나무를 펴고 잤다. 식탁 위에는 쓰디쓴 쓸개를 달아놓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쓸개를 맛보고는 “구천아, 회계의 치욕을 잊었단 말이냐?” 하고 외치곤 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고 분투하도록 거듭 자신을 격려했던 것이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긴 유래이다.월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본 오자서는 근심이 커졌다. 그는 “구천이 지금 쓸개를 맛보며 국민들과 함께 복수를 벼르고 있습니다.” 하고 부차에게 여러 번 간언을 했다. 그러나 부차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오자서를 멀리했다. 2년 후에 부차는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온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경하했지만 오자서는 도리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제나라를 친 것은 작은 승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큰 심복지환을 남겨놓는 것인 줄을 왜 모르십니까?”이 말에 대노한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살하라며 보검 한 자루를 주었다. 오자서는 그 보검으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얼마 후, 구천은 문종에게 조정 일을 보게 하고 자신은 범려와 함께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오나라를 습격했다. 오나라군은 크게 패하고 오나라의 태자도 전사했다. 기원전 473년, 구천은 재차 오나라를 진격해 부차를 고소산(姑蘇山)에서 포위했다. 이렇게 해서 월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구천은 부차에게 회계 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섬인 용동(甬東)을 봉해주었다. 부차는 간신 백비의 말만 듣고 충신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다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을 베어 자살하고 말았다. 구천은 국왕의 예로 부차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백비는 죽여버렸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은 춘추시대 말기에 일어난 큰 사건이었다. 기원전 475년에 이르러 중국은 전국시대에 진입했으며, 봉건사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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