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비취계곡 황산(중국여행26부)

훼브스 2020. 7. 28. 15:22

 

 

4일 비취계곡에 가다 

 

영화 와호장릉 촬영지에 갔다

계곡을 오르는데 지팡이 하나에 1천원씩주고 보석과

나누고 황산까지 사용하였다 대학생 남여 40명이 탐사 여행중 길을 잃어 한달간

사경을 헤메이다 구조되어 북경으로 돌아간뒤 그중 20쌍이 결혼하게 되어 알려지게

되었다는 곳이다

 

 

 

 

 

 

 

 

 

 

 

 

황산시외 주택들

 

 

황산 비취계곡에 암각되어있는  왕유의 시 산속의 가을저녁

 

 

 

空山新雨後(공산 신후우)

天氣晩來秋(천기만래추)

明月松間照(명월송간조)

淸泉石上流(청천석상류)

 

빈 산에 비가 가 갓온후

날씨가 어느덧 가을이구나

밝은달 솔사이로 비추고

맑은 샘은 돌 위로 흐른다.

 

 

 

왕유의 다른 시

 

 

과향적사(過香積寺)

 

 

不知香積寺(부지향적사)

 

향적사를 알지 못해

 

數里入雲峯(수리입운봉)

 

구름 낀 봉우리로 몇 리를 들어갔네

古木無人徑(고목무인경)

 

고목은 우거져 사람 다닐 길도 없는데

 

深山何處鍾(심산하처종)

 

깊은 산 어디선가 종소리 들리는구나.

 

泉聲咽危石(천성열위석)

 

샘물 소리는 높은 바위틈에서 울리고

 

日色冷靑松(일색냉청송)

 

햇빛은 푸른 솔에 비쳐 차갑기만 하구나.

 

薄暮空潭曲(박모공담곡)

 

땅거미 지는 빈 못 가에서

 

安禪制毒龍(안선제독룡)

 

좌선으로 독룡을 억누르네

 


 

 

 

 

 

 

 

 

王維長江積雪圖

 

 

 

 

 

獨坐幽篁裏(독좌유황리)

 

彈琴復長嘯(탄금부장소)

 

深林人不知(심림인부지)

 

明月來相照(명월래상조)

 

그윽한 죽림(竹林) 속에 홀로 앉아

 

거문고 뜯고 다시 휘파람 분다.

 

아무도 모른다.

 

이윽고, 달이 빛을 안고 찾아온다.

 

그윽한 대나무숲 속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다가 다시 길게 휘파람을 불어본다.

 

갚은 숲속이라 사람들은 몰라도,

 

밝은 달이 찾아와 서로 비추어본다.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왕유 王維 [699?~761?]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왕유의 자연관과 작품 세계

 

 

 

 왕유 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아름다운 자연 관조(自然觀照)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자연의 미묘한 움직임 속에서 그처럼 미()를 포착한 시인도 드물다.

 

 도연명(陶淵明)의 관조가 다소 침울한 것이었음에 비해, 그의 것은 훨씬 명랑하다.

 

자연을 신뢰하고 그것에 순응(順應)하는 태도를 풍류(風流)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풍류시인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반항적인 이단자적 기질이 조금도 없는

 

그는, 육조(六朝) 이래의 화려하고 섬약(纖弱)한 시의 전통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것을 그대로 계승함으로써 자기를

 

건설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만일 이 시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서로 앞을 다투어 자라나 있는 울창한 죽림과

 

그 속에서 거문고를 안고 앉은 작은 사나이가 교교한 달빛을 받고 있는 모습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존재하는 것은

 

자연뿐으로, 사람도 자연의 일부로서 거기에 참가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자연에 귀의(歸依), 동화(同化)하는 생활을 풍류(風流)라 하여,

 

이는 동양 예술에서 중요한 하나의 경향을 이루어 왔다. 자연과 인간을 대립시켜서

 

생각하는 서양에서는 주로 인간에게만 관심을 쏟으며,

 

그들이 자연에 주목할 경우에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전제(前提)가 따른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왕유의 시에서처럼 자연을 훨씬 친근한 것으로 여긴다.

 

 

 


 

영화 와호장릉 촬영지 대학생 남여 40명이 탐사 여행중 길을 잃어 한달간사경을 헤메이다 구조되어 북경으로 돌아간뒤 그중 20쌍이 결혼하게 되어 알려지게 되었다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