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이화원 북경(중국여행34부)

훼브스 2020. 7. 28. 19:16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화원에서 찾을수 있다

청일전쟁 당시 해군으로 들어갈 엄청난 군자금을 빼돌려

 

인공호수 를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인위적인 만수산을 쌓고

 

불향각(彿香閣)을 짖고 일설에의하면 남편 함풍제가 죽자 밤마다

 

남자들을 불러들여 즐기고 아침엔 목을처 몸뚱이와 분리해 버렸다 한다

 

 

중국의 2대여걸로 당나라때 측전무후는 황제에 자리에 올랐었고

 

두 번째  자신의 엄청난 사욕으로 패망의 길을 재촉하여

 

당시 중국인민과 국가를 파탄으로 이끌었던 서태후의 여름별장 이화원이

 

 아름다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어 엄청난 관광객을 유혹하여 외화벌이로

 

 

중국인민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화원은 북경시 서북 교회에 위치 도심서 약19㎞ 떨어진 청나라 황실 원림

 

과 행궁이었다 원명은 청의원이며 1764년에 건조되고 부지 290헥타르중 그중

 

수면이 220헥타르 이다 원내는 궁정구. 전산.전호구.후호구.3개 경치구로 나뉜다.

 

전당.누각.정자가 도합 3.000칸으로 황제와 황후가 정치 활동을

 

하며 휴식 유람하던곳으로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1888년에 서태후가 해군경비 500만냥 배근을 유용하여 재건 10년만에 완공

 

이름을 “이화원”으로 고쳤다.

 

아무튼 곤명호를 확장시킨 건륭제나 인민의 혈세를 유용 이화원을

 

재건하였던 서태후 그들은 사후 하찬게 여기던 섬나라 일본에게 엄청난

 

패전으로 이어저 종단엔 남경 대학살 이라는 중국최악의 모멸을 당할것을

 

조금이라도 예견 하고 있었을까??

 

 

 

 

 

 

 

 

 

 

 

 

 

 

 

 

 

 

 

 

 

 

 

건륭제가 수해방지를 위해 세운 銅牛.등에 황제가 썻다는 글씨가있다

 

 

 

불향각(彿香閣)

 

만수산 전산 비탈21m 높이의 거색기반 위에 건축.남쪽은 곤명호를 마주하고

북쪽은 지헤헤불전을 등지며 불향각을 중심으로 각 건축군이 매우 정연하고 대칭되게

양날개로 펼쳐지면서 서로 호응하여 마치 한 마리의 박쥐모습을 하고 있다

1860년 불향각은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그후 원형대로 복원하였는데

이는 라마교의 건축양식이다

 

 

 

 

 

 

 

 

 

 

 

 

 

 

 

 

 

 

 

 

 

 

 

 

 

곤명호에 떠있는 인공섬의 다리는 17공교로 17개의 아치형 교각과 돌난간 위에

544마리의 사장상이 조각된 총150m의 다리로 544마리의 사자상의 표정은 하나도

같은게 없다한다.

 

 

 

 

곤명호의 육대교

 

 

 

건륭황제 가 어머니를 위해 비를 피할수있는 산책길을 만들었다 하는데

서태후가 자주이용하였다 한다

이름하여 장랑:말그대로 긴복도 요월문에서 시작하여 석장정까지 총길이는

728m 로 각종그림이 그려져있고 중국고전원림중 최고로 기네스북에 등제되어

있다고 한다

 

 

 

 

 

 

 

 

 

 

 

배은문

 

 

 

 

 

 

 

 

 

곤명호 북안 낙수당앞에 자리한 수목지친은 물가 앞에 부두가 있고

 

5간의 穿堂殿 식의 건축물로 낙수당의 정문이다 자의태후(서태후)가

 

水路로 이화원에 행차할 때 이곳에 도착해서 묻으로 올라 낙수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만리장성에서 평보가 20여분을 조난상태로 가이드를 애태우게 하였더니

 

다음 코스 이화원을 가는데 넓어서 단체행동에서 이탈될수 있으니 잘 쫒아

 

다니라고 당부 하였는데 나이 지긋한 신사분이 실종되었다

 

어느 전각 앞에서 기다리라 하고는 가이드가 그분을 찾으러 간 다음

 

다른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데 전각앞에 거대한 자연수석을 보면서

 

여가이드가 설명을 하는데 저돌로 말할것 같으면 엣날 명조때 수석을

 

좋아하는 선비가 돌을 발견하여 집으로 옮기려 하자 돈이 너무많이들어

 

버렸는데 어느날

 

건륭제가 행차중 보고 어머니 침전앞으로 옮길것을 지시하는데 어머니가

 

반대를 하였다. 고심하던중 어느 신하의 기지로 행운석으로 설명되어 정문을

 

부수고 전각 문마다 다시고쳐 돌을 전각앞으로 옮겨 진열하였는데 그때부터

 

청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제 설명을 들은후에 사진을

 

찍을 사람은 찍어라 하였다

 

사람을 찾아왔던 가이드가 벌써 두 번째 일행이 이탈하므로 짜증을내며

 

가로되 지금이라도 가이드를 바꾸고 싶으면 바꿔라 하메 심히 서로

 

불편하였다

 

그가 다시 돌에 대해 설명하는데 다른 여자 가이드와 틀리는

 

부분이 있어 들어본즉 정문누각을 부수고 돌을 옮긴게 아니라

 

담을 허물고 옮긴것이며 돌도 부정의돌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한바퀴돌면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데

 

너무나 틀려서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리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낙수당 가운데 있는 복잡하게 생긴 돌의

 

이름은 “청지수”(푸른색의 靈芝버섯 처럼생긴 커다란괴석 이라는뜻 세계 최대 원림석)라는

 

큰돌로 낙수당앞에 버티고있다

 

이돌은 명대 미만종이라는 당대 부자가 북경교외에서 발견해 집으로 옮기던중 수백톤이나

 

나가는 돌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겨울을 기다려 수로를 파고

 

물을 얼려 밀고 오는 것으로 이돌을 옮기다가 가산을 탕진해 敗家石 이라

 

불리던것을 건륭황제가 어머니를 설득해 가져와 낙수당 앞에 진열한 뜻은

 

곤명호를 쉽게 볼수 없게 만들고 수목자친을 넘어서야 호수의 경관과

 

뱃놀이를 할수있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배치는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해당돼서 중요한 내전을 보여주지 아니하고 약한기운이 직접들어오는

 

것을 방지해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중국전통 원림의 양태라

 

할수있다

 

 

 

 

 

 

 

 

 

 

 

 

 

 

 

 

 

 

 

 

낙수당 樂壽堂

 

대형 사합원으로 서태후의 침전이다 대전은 붉은 기둥에 회색 지붕으로

 

조형이 특이하고 웅장하다 낙숙당의 중앙에 있는 방이 서태후가 기거하던곳이다 서태후가

 

하루식사 하는데 드는비용이 은60량에 달했다고 하는데 은 60량은 당시 쌀 45가마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요리사만 84명이었고 그밖에 다과나 유제품 등을 만드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무려 120여 명이

 

서태후의 입맛을 시중들었다 하는데 나라의 크고작은 변란과 국제적인 이슈에도

 

동요하지 않고 유람과 호가호식 하였으니 !!!

 

 

 

 

인수전앞의 사불상

 

사불상은 궁전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로 용의머리

 

사슴의뿔 사자의꼬리 말의발을 가지고 있다

 

 

 

 

용의 다섯 개의 날카로운 발톱은 하늘로 향해있다

 

원래 전통 도가의식은 마주보고 학이 좌측 용이우측에 배열하는게

 

맞는데 서태후의 방자한 생각은 뒤바뀔수도 있다는 광서제를

 

무시한 배열이라 가이드가 설명한다.

 

 

 

 

 

 

인수란 논어의 인자수에서 나오는 말로 “어진자는 장수한다”는 말이라 한다

 

인수전은 원래이름은 근정전으로 황제가 이화원에 머무는동안 정무를 집행하고

 

신하들의 알현을 받는 전각이 였으나 서태후가 정권을 잡은이후 청나라 정치중심이

 

자금성에서 이화원으로 옮겨지면서 인수전이라고 불리어졌는데 그뜻은 서태후의

 

만수무강을 빈다 라고 해석한다

 

 

 

 

북경 시내에서 출발 서태후가 다녔던 수로를 따라 이화원까지

 

다니는 유람선

 

 

 

 

 

돌로 만들어진 배 청안방(淸晏舫)

곤명호 한쪽엔 돌로 만든배가 있는데 건릉황제가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다고

하나 이또한 서태후의 작품이라는 설이 많다 돌배를 만든 이유는?????

 

기원전 350년전 春秋戰國時代 혼란기 공자에 이어 맹자 로이어지는 순자 가 나타났다 맹자와 순자는 공자의 유학사상을 좀더 체계화 시켜 중국사상에 확고한 위치를 확립한 인물이다

순자의 가르침중에

 

군자주야 서인자수야 수즉재주 수즉복주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임금은

배와 같은 존재요, 서민(백성)은 물과 같은 존재다. 물은 배를 띄울수 있기도 하고,

물은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물은 백성을 뜻하고 배는 임금을 뜻하여 백성은 君主를 떠받들지만 君主가 악정을

펼치면 뒤집어 엎기도 한다는 경고의 난세의 교훈을 순자가 말씀하셨는데

 

서태후는 오만방자하여 “어디 너이들맘대로 군주를 엎을수 있겠느냐” 라는

의도로 돌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화원은

1998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제되었다

백과 사전을 참고하면!!

 

1.1153년 금나라 완안량 황제가 행궁을 설치한 것이 시초

2.원나라 때 완서우 산과 쿤밍호를 만듬

3.1764년 청나라 건륭제가 개축하여 청의원(淸漪圓)이라는 이름붙임

4.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에 프랑스 영국 연합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5.1888년 청나라 서태후가 해군예산 30만은을 유용하여 재건하고

이화원이라는 이름은붙임

6.1900년 의화단 운동당시에 일본과 서양8강 연합국군에 의해 공격당함

7.1902년 서태후가 다시 파괴된 부분을 재건함

 

 

 

 

 

 

 

건륭제상(1711-1799) 이름은 홍력이고 청나라가 입관한후 네 번째

황제이다 1735년 즉위하였는데 25세 때에 연호를 건륭이라고 하였다.

 

재위하는 동안 여러번 군대를 파견하여 서북변강을 공고히 하였으며

조국통일을 보호하고 유지하였다 농업생산을 중시하고 황무지를 개간

하였으며 일생동안 여러번 동순(東巡) 서순 북순 남순 을 진행하였고

 

특별하게 한족문화를 중시하였으며 과거시험을 열어 건문성세를 이루었다

 

 

 

 

 

 

 

 

자의태후(서태후 1835-1908) 청나라 남편인 함풍제가 죽은다음

당시6살난 同治帝가 즉위하자 자의황태후로서 섭정하기 시작하였다

동치제가 19살 나이로 죽자 친여동생의 아들 조카인 光緖帝를 내세워

섭정하였으며 동치 광서 두조대에 정치적 실권을 계속장악 하고

죽기전 마지막 황자 푸위를 유언으로 황제자리에 앉혔다

그녀는 48년동안 집권을  하였으며 74세때 이질로 세상을 떠났다

 

 

 

 

 

 

 

 

 

 

 

서태후가 이화원으로 행차할때면 어린 광서제를 데리고와서 옥란당에 가두고

 

감시했다고 하는데 바닥에 군데 군데 패인 자국은 답답한 황제가 건물안에서

 

계속 왔다 갔다하고 발을 구루며 차기도 해서 난 자국이라 한다.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는 일찍 죽는바람에 친여동생의 아들(서태후 조카)을

 

불과 4살나이에 황제가 고분 고분 말을 잘들을 거라고 생각 하고 방옥란당에

 

가두어 키우다 시피했지만 광서황제도 나이가 들고 머리가 크면서 점차 달라지게 되는데 청,프 전쟁에서

 

져서 베트남을 빼앗기고 청.일 전쟁에서 져

 

조선 마져 일본에 넘어가는 상황에서 독일이 산동성 자오저우만을 강제로

 

점령해 버렸다.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 1858-1927) 는 청이 식민지가 될것이라 걱정한다.

 

여러차래 그는 상소문을 올려 개혁할것을 주장한다 수구 대신들의

 

집요한 방해공작 끝에 광서제가 알게되고 1889년 중요한 변법자강책(變法自疆策)을 지지하고

 

개혁에 힘을 보태게 되나 당시는 인사권도 없는 허수아비

 

황제로 서태후가 실권을 쥐고 황제는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강유위는 광서제의 지지하에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나 표트로대제의 개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국회를

 

만들었으나 서태후가 해산시키고 쿠테타 음모를 밀고한 원세계에게 당해 강유위의 동생과 많은 동조자들

 

이 몸과목이 분리되어 처형당하고 강유위는 일본으로 망명한다.

 

이로서 광서제는 옥란당에 유배되고 중국은 가유위의 예언대로 제국주의

 

열강들이 청의 철도 부설권과 광산개발권등 각종 이권을 빼앗기고 빌린땅

 

이라는 뜻의 “조차지”를 만들어 중국땅을 자지해 버렸다.

 

서태후는 참으로 어이없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