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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장군(남한산성6부)

훼브스 2020. 8. 1. 14:21

이완 장군의 병자호란 동선령-토산전투 참전 기록-諡狀 역

 


 

 

병자호란 중 1636년 12월14일~25일 사이황해도 동선령과

토산 일대에서 원수 김자점이 지휘하는 조선군 병력과

청군 사이에 몇 차례 연속적인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동선령-토산 전투도 기본적으로는 조선군이승리하지

못한패전입니다.

하지만 산발적인 소규모 전투에서 조선군의 기습 공격이

여러 차례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청군이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한 사례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포위 당한 조선군 본대가 전멸 당하지 않고 결국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무력한 참패에 가까운 다른 여러 전투와는

구별되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죠.

 



동선령-토산 전투의 특징을 따져볼 때황해도 지역

군사뿐 아니라 중앙군 소속인 어영청 군대가

다수 참전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특히 어영청 군인의 활약 사례가 몇차례 확인된다는 점에서도

무척이나 주목되는 전투입니다. 어차피 훈련이

부족할뿐만 아니라 현역 근무경험도 없는 예비군에

가까운 조선의 속오군이 적의 정규 군대와 교전을

통해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점에서 쌍령전투의 패배는 속오군의 한계를

보여주는 전투라고 할지언정 조선 후기의

총체적인 군사력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지표는 될 수 없습니다. 

당시 조선군의 전력을 총괄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병자호란에서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할 전투는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소속 군대, 다시 말해 임진왜란을 경험한후 심혈을

기울여 확보한 조선 중앙군이 참전한 전투들이죠.

이를테면 동선령-토산 전투나 남한산성 수성전 같은

전투가 대표적일 것 같습니다.

이밖에 속오군이 주축이 된 지방군의 전투라도광교산전투나

김화전투도 분석해야당시 조선군의

전투수행능력에 대한객관적 평가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더구나 이곳 동선령은 몽골 침략기 몽골군과고려군

사이에 동선령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 곳입니다.

동선령에서 두 차례나 큰 싸움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이 곳이 전근대 교통로 상 매우 중요한 요지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그 점에서도

동선령-토산 전투는 흥미를 느낄만한 전투입니다. 

하지만 동선령-토산 전투 관련 기록은 매우 희귀한 편입니다.

병자록-병자일기-연려실기술 등에도 원수 김자점이

탈출한 후에도 어영군이 조직적인 사격을 가하자 청군이

후퇴했다는 정도만 적혀 있을뿐 구체적인 전투경과에

대한 설명은 드문 편입니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도 이 전투와 관련된

직접적인 묘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선령-토산 전투의 총지휘관은 원수 김자점이지만

그가 1651년 반역죄로 처형 당하면서 관련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종사관 신분으로 동선령-토산전투에 참전했다 훗날 영의정에까지

 오는정태화가 관련 기록을 남겼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의 문집에서는 아직까지 뚜렷한 자료가 눈에 띄지 않네요.

그 때문인지 유재성 선생의 병자호란사에서도

동선령-토산 전투는 기껏해야 5~6줄로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훗날 북벌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이완 장군의 신도비명이나 시장 혹은 정약용의 목민심서

병전조에의외로 동선령-토산전투와 관련된 자료가

많음을 확인했습니다.

시장이나 신도비명의 성격상 이완 장군을 영웅화시키는

측면이 있음을 감안하고 봐야겠지만 전투 경과에 대해

다른 자료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시열이 지은 이완장군신도비명은 이미 민추에서

번역한 적이 있고 목민심서도 번역이 된 책이지만내용이

훨씬 더 자세한 시장은 번역이 없는듯 해서 거칠게나마

이완시장을 번역해 봅니다.

저는 한문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므로

어느 정도 오역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右議政李公諡狀


1636년 11월 (공이) 수안군수에 임명되었는데 길에서 오랑캐의 변을 듣고 임소로 급히 달려갔다. 원수부(김자점의 원수부)에서 이미 (공을) 중군에 임명했으나 공은 집안의 사람과 대부인(어머니)을 모시고 산골로 피신시킨후 급하게 장사들을 동원하여 밤을 틈타 정방(원수부가 위치한 정방산성)으로 향했다. 이때 한 아전이 가는 길(참전)을 면하려 도모하므로 즉시 그 목을 베었다. 길에서 집안 사람을 데리고 산속에 들어가는 가는황주파총을 만나역시 목을 베고는 나무를 깎아 "장교로서 난리를 만나 도피한 자다"라고 써서 머리에 매달았다. 

(정방산성에) 도착한후 공이 김자점에게 "오랑캐의 기병은 수가 많고 정예하여 대적하기 힘드니 험준한 요충지에 매복을 해서 좌우로 습격하여 그 기세를 고갈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장수로 하여금 각 그 병사를 이끌게해서 길을 나눠 임금의 어려움을 구하고 원수부는 정예부대로 지름길을 통해 먼저 험준한 요새를 장악한후 한판 결전을 벌이다 불리하면 죽는 것도 또한 가하다"고 말했으나 원수 김자점이 결정하지 못했다.

공이 오랑캐 기병이 혹은 수십, 혹은 8-9명이 하나의 부대를 이뤄 (정방산성) 성 아래를 지나 가는 것이 끊기지 않는 것을 보고 원수 김자점에게 말하기를 "저것은 후기(정찰기병)이니 장차 대진(본대)이 이를 것이다. 동선령의 계곡은 길고 길은 좁으니 여기에 복병을 두고 대진이 이르렀을때 포와 화살을 일제히 쏘면 오랑캐를 모조리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포수(조총수) 500명으로 하여금 좌우로 매복하게 하고 약속해서 말하기를 "나의 호포(신호용 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사격하라" 고지신한후 공과 장사들은 (동선령) 고개 위로 출진하여 (적의 동향을) 살폈다. 적의 기병 300~400기가 먼저 이르니, 김자점이 (정방산성) 산위에서 북을 울리고 깃발을 흔들었다. 공이 사람을 보내 보고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선봉이니 더불어 싸워서는 안된다. 대진(본대)을 기다려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금일의 (가장 중요한) 일은 마땅히 한(청태종)을 포로로 잡는 것을 기약할 따름이고 달리 길이 없다"고 했으나 김자점이 듣지 않고 "오늘은 선봉을 죽이고 내일은 대진을 공격하면 된다"고 말했다.

공이 여전히 병력을 움직이지 않으니 김자점이 크게 노하여 그 군관을 보내 말하기를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머리를 짜를 것이다"고 했으나 공은 말하기를 "대사의 성패는 여기에 달렸있으니 죽을지언정 감히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다. 승리를 한후 군전에서 죽겠다" 고 하니 김자점이 더욱 노해서 군관에게 임금이 하사한 상방검을 주며 말하기를 "이모(이완) 이하를 모두 죽여라"고 했다.

공이 분노하며 말하기를 "대사가 이미 틀려버렸다"고 하고 앞으로 나아가 적을 유인하니 적들이 아군이 적고 약함을 보고 급하게 추격했다. 공도 또한 싸우고 또 후퇴하니 기병장 김응해가 적의 추격을 급박하게 받았다. 공이 화살을 쏘아 흰말위에 금갑을 입은 적을 쏘아 맞추니, 응해가 죽음을 면했다. 마침내 적이 계곡 가운데로 유인해 들어오니 호포(신호용 포)를 쏘고 복병이 일제히 사격했다. 적이 크게 비명을 지르며 계곡 중에 들어온 자 중에 탈출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공이 병력을 수습해 성(정방산성) 안으로 돌아오니 성 중에서 모두 개선을 축하했으나 공만 홀로 계획이 틀어진 것을 한탄했다. 

다음날 성에 올라 (적의) 대진을 바라보니 깃발이 온통 황색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저것은 반드시 한(청태종)이다. 어제의 전투를 만약 오늘에 했다면 어찌 한의 피가 계곡에 흩뿌려지지 않았겠는가"라고 했다. 김자점이 또 복병을 두고 기다리려하니 공이 말하기를 "어제의 남은 적이 반드시 달려가 대진(본진)에 보고했을 터이니 일이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고 했으나 김자점이 듣지 않았다. 

(아군) 병력들이 아직 매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오랑캐들이 병력을 좌우익으로 나눠 매우 극렬하게 수색한 후 통과를 했다. 공이 말하기를 "적이 이미 깊숙히 들어왔으니 우리는 후퇴하지도 못할 것이고, 또한 임금을 구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의 도리일 것인가"고 했다. 마침 남한(국왕이 피신한 남한산성)에서 (임금의) 교지가 왔는데 "달무리 진 외로운 성에 위태로움이 터럭 하나처럼 (가까이) 있거늘 경들은 무슨 마음으로 월나라 사람처럼 군부를 보는가"고 하니 마침 조정의 위태로움을 알게됐다. 공과 제장들이 모두 동쪽을 향해 통곡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종군할 것임을 군중에 맹세하고 공이 선봉을 차청해서 토산으로 행군했다.

밤이 되어 흰 기운이 서방으로부터 몰려와 아군의 진을 뒤덮으니 공이 마음 속으로 그것을 걱정했다. 하늘이 밝자 공이 선발부대를 이끄는데 김자점이 갑자기 공을 불렀다. 공이 길 왼쪽에 부대를 주둔시키고 홀로 달려가 일을 의논하는데 보고하는 자가 말하기를 "(함경) 남병사가 이끄는 군대가 왔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추적하는 청나라 기병이었다. 남병사 군대가 먼저 집결을 약속했기 때문에 장수와 아전들이 남병사의 군대로 오인한 것이다. 적 기병들이 군문으로 돌격해 들어오자 김자점이 산위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이 각자 도망가 흩어지는데 공은 (자신의) 부대와 이미 떨어져서 수하에 단 한 명의 병사도 없었다. 단지 원수 휘하의 취수(군악대) 몇명이 같이 있었을 따름이다. 산허리에 다다라 나팔을 부니 흩어진 병사중에 모여든 이가 50~60명인데 둥글게 진을 만들어 모두 밖으로 향하게 했다. 적이 (공을 김자점) 원수로 오인해서 10겹으로 포위하자 공은 명령을 내려 돌아가면서 총을 쏘게하니 적의 공격이 더욱 급해졌다. 군관 윤지륜이 용사였는데 포위를 뚫고 들어와 청하기를 "적을 공격해서 탈출하자"고 하니 공이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고 말했다. 공이 3발의 화살을 맞아 정신을 잃고 시체들 사이에 넘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주인 없는 말이 통과하다가 고개를 돌려 서니 공이 그 말등에 올라탔다. 

말이 날듯이 달려 산정상에 다다라 원수 김자점과 만났으니 모두 신의 도움이다. 군수물자가 모두 산 아래에 있었는데 적이 바야흐로 가져 가버리니 공이 말하기를 "적에게 군수물자를주는 것이어찌 아군의 물자로 쓰는 것에 비하겠는가"고 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말하기를 "능히 저것을 취하여 올 자는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 이때 어영군 100여명이 모두 단병무기를 들고 적에게 바로 돌입하니 적이 죽음을 각오한 병사임을 알고 군수물자를 버리고 달아났다. 

적이 병력을 나눠 포위를 하고 오가니 복병이 곳곳에서 불로써 신호하며 서로 응했다. 공이 원수 김자점에게 말하기를 "오늘 밤 만약 진을 옮기지 못하면 우리는 탈출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여러 장수들에게 방략을알린후 밤을 틈타 북을 울리고 오랑캐의 진영을 향하고, 이를 엄호하기 위해 산꼭대기에 등과 불을 켜서 하나의 진이 머무르는 것처럼 한후, 때로 복병으로 본진을 구하게 하면서 우리 부대로 동쪽으로 나가니 적이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 피가 흘러내려 삶과 죽음 사이에 있음에도 공이 계책을 생각하는 정신의 민첩함이 이와 같았다. 원수 김자점이 공의 상처가 심한 것을 보고 수안의 임소로 돌아가게 했다. 공이 대부인(어머니)의 거처에 돌아가서 행조(수도에서 이동한 조정)가 항복했음을 듣고 낮밤으로 통곡하면서 즉시 죽지 못함을 한스러워 했다.

十一月。除遂安郡守。道聞虜變。馳至任所。帥府已差中軍。公屬家衆奉大夫人避亂于山谷。急發將士。冒夜發向正方。有一吏謀欲免行。卽斬之。道遇黃州把摠率家屬入山間者。亦斬之。斫木書之曰。身爲將官。臨亂逃避。懸其頭而去。旣至。公謂自點曰。虜騎衆且銳。難與爲敵。設伏要險。左右襲擊。以遏其勢。不然則 使諸將各率其兵。分道勤王。而帥府銳師徑出先據阨塞。以決一戰。不利而死。亦可矣。自點不能決。公見虜騎或數十或八九爲隊。從城下過者。陸續不絶。謂自點曰。此是候騎。大陣將至矣。洞仙嶺谷長而路狹。伏兵於此。竢大陣至。砲矢齊發。則虜可鏖矣。遂使砲手五百。左右埋伏。約曰。聞吾號砲齊發。公亦與將士數百。出陣於嶺上以候之。賊三四百騎先至。自點自城上擂鼓揮旗。公使人報曰。此是先鋒。姑勿與戰。待大陣奮擊。不亦可乎。今日之事。當以擒虜汗爲期。他不足道也。自點不聽曰。今日殺先鋒。明日擊大陣可 也。公猶按兵不動。自點大怒。送其軍官曰。不從令者。斷頭以來。公曰。大事成敗。在此一擧。死不敢從令。戰勝之後。當就死軍前。自點益怒。以御賜尙方劍授軍官曰。李某以下。皆斬以來。公奮罵曰。大事去矣。遂前進誘賊。賊見我軍單弱。卽追之。公且戰且退。騎將金應海爲賊所迫。公射殪白馬金甲者一人。應海得免。遂與引賊入谷中。發號砲。伏兵齊發。賊大衄。入谷者無有得脫者。公收兵入城。城中凱歌相賀。公獨歎其失計。明日登城。見大陣蔽野而來。旗幟皆黃。公曰。此必汗也。昨日之戰。若俟今日。則彼汗豈不濺血於 谷中也。自點又欲設伏以待。公曰。昨日餘賊。必走報大陣。事必不濟矣。自點不聽。兵未及埋伏。而虜果分左右翼。極其搜索然後乃過。公謂曰。賊旣深入。而我不能遏截。又不能勤王。此豈臣子之道乎。會有旨自南漢出來曰。月暈孤城。危如一髮。卿等何心越視君父。於是始知行朝危急。公從諸將東向痛哭。以冒死赴亂之意。誓告軍中。公請爲先鋒。行到兔山。夜有白氣起自西方。遶我陣上。公心憂之。天明。公引所部先發。自點忽召公。公駐兵陣於路左。身獨馳來議事。有報者曰。南兵使領兵至矣。蓋虜騎猝迫。而南軍先有期會。故將吏錯認爲南軍矣。虜騎突入轅門。自點急走上山。諸將各自逃散。公旣離本陣。手下無一卒。只與元帥麾下吹手數人。至山腰吹角。散兵來集者。五六十人。爲環陣外向。賊認爲元帥。圍之十匝。公令軍士輪回發砲。賊攻之益急。有軍官尹至倫者勇士也。突圍以入。請與衝冒而出。公曰。此我死所。公中三矢。昏倒積屍中。忽有逸馬掠過。回頭却立。公騰躍而上。馬走如飛。得至山頂。與元帥會。蓋神助也。軍需皆在山下。虜方輸去。公曰。與其資敵。豈若以資我軍耶。令於軍中曰。能取彼者皆與之。於是御營軍百餘人。持短兵直趨。賊知其爲死士。棄而走。賊分兵若有圍住之狀。處處伏兵。以火相應。公謂自點曰。今夜若不移陣。我無脫去之路。指授諸將方略。乘夜鼓譟直向虜陣。爲掩擊之狀。山上懸燈燃火。一如留陣。時伏兵奔捄本陣。我師遂東出。賊不敢追。公雖在流血死生中。精神計慮之敏給如此。自點見公創甚。使歸遂安任所。公尋到大夫人所。及聞行朝下城。日夜憤痛。恨不卽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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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lyuen.egloos.com

 

 

 

 

 

 

1627년(인조 5)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약 2개월간 지속되었던 후금 조선 사이의 전쟁.

 

 

 

 

 

 

 

 

 

 

정묘호란 /정묘호란 때 후금의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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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정묘호란 당시의 장수복, 강화역사관

 

 

인조반정 후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표방하던 조선에 후금(後金:淸)이 3만 명의 대군을 파견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흥기했으며,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차지하기 위해 남하함에 따라 명과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러던 중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奴爾哈齊)가 '7대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의 변경요지(邊境要地)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은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은 1619년 강홍립(姜弘立) 등이 이끄는 1만 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심하(深河)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요동 등주(登州)의 명군과 연계하여 동남쪽 후금군을 괴롭히는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즉위 전부터 중국본토 침입 때 자신들의 배후를 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미리 정복하자고 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다.

따라서 조선과 후금의 충돌은 예상되는 것이었다. 또한 후금은 명과의 교전(交戰) 때문에 경제교류의 길이 막혀 야기된 심한 물자부족 현상을 타개해야 했는데, 마침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후 후금으로 도망간 이괄의 잔당이 조선의 병력이 약하고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지졸이라며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후금의 태종은 침략의 뜻을 굳히고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것 등을 구실로 1627년 1월 아민(阿敏) 등에게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평양을 거쳐 1월 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조신(朝臣)들은 강화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난했다. 한편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했는데,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講和)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했던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양국 사이에 3월 3일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약(和約)의 내용은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수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금과 강화해도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 화약은 비록 형제의 국(國)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군의 무력에 굴복한 일방적 조약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비록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정책을 계속 추진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할 군사력 배양에 주력하여 수어청의 창설, 어영청의 증강, 훈련도감의 증액 등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중강개시(中江開市)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君臣)의 의(義)'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絶和)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태종의 존호(尊號)를 알리고 신사(臣事)를 강조했다. 조선이 청과의 싸움을 결정한 후 같은 해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다.

 

 

출처: 브리태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