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홍회

우즈베키스탄에가다(김영신여행기)

훼브스 2020. 8. 1. 17:14

 

 

 

2017년 4월 13ㅡ18

 

우리들의 영원한 친구 안박사 부인

영신여사 께서 우즈베키스탄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영신여사의 여행담을 적어보겠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비행기한번 타고 고속철로 이동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이방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오히려 자기들하고 기념사진을 찍자고 청할정도로

친근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한국에 대하여 큰호감을 가지고 동경하고

있다 합니다 우리나라에 가고자 하는 인력들이

많이 있어 일정한 테스트를 거처야한다 합니다

공항에 도착할때 한무리의 우즈벡인들이 한국으로

간다며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무스림이 대부분인데

같은 수니파로 분리되는 IS의 극다주의와는 달리

평온하며 종교적 신앙심으로 범죄가 없는 순박한

사람들이라고 영신여사는 전하였습니다

 

우즈벡에는 고려인 한족들이 다수가 살고있는

나라이기에 더욱 친근감이 들었는데

친구들 7명이 어울린 즐거운 여정은 흥미로 가득하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약칭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내륙국이고, 수도는 타슈켄트입니다. 이 나라의 주민 다수는

우즈베크인이며, 이들 대부분은 이슬람교 신자입니다.

공용어는 우즈베크어이지만,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어

사용자도 일부 있습니다.

인구 3천만명의 나라

현재는 독립국가연합의 일원입니다

 

 

 

 

 비행기에서 보는 우즈베키스탄의 설산

 

타슈켄트(Tashkent, Uzbekistan)

 

다슈켄트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입니다

심켄트와 사마라칸트 사이길 상에 알타이 산맥

끝자락 서쪽에 관계시설이 잘 되어있는

평원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치르치크강과 그곳의 지류 각각의 합류에

위치하며 깊은퇴적 사토의 침전상 15m위에

세워진 도시라합니다

 

이스람과 그리스정교까지 거기에 러시아까지

혼합된 다양한 모습의 문화를 동시에 체험

할수 있는 인구 213만명의 아시아 유럽을 잇는

중요 공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슬람식의 음식에 보드카를 곁들이는

이들의 식사풍경은 이채롭다 합니다

 

다슈켄트라는 명칭은 투르크어로돌의나라라는

의미가 있으며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장수

가 된 고선지 장군이 점령했던 石國이 바로

다슈켄트라 합니다

 

독립광장(Indepence Square.Mustakillik Maydoni)

 

다슈켄트의 어느거리나 이 티므르 광장으로 통합니다

    

 

 

 

 

 

 

 

 

 

 

 

 

 

무스타킬릭 Mustaaqillk 은 우즈벡어로 독립이라는 뜻으로

공원으로 조성되어서 현지인들도 많이 찾는 장소 일 뿐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흥보 영상이나 국가에도 꼭 등장하는

장소중 하나입니다

무스틱 칼릭 광장에는 지구본 모양의 기념탑과 밑으로

아이를 안은 어머니상이 있는데 처음엔 피에타상인가?

생각했지만 행복한 표정이라 죽은 예수를 안은 성모상은

아니다 생각했습니다

 

 

 

 

1966년 다슈켄트 대지진당시 파괴된 유적들

 

 

재건된 현재의 다슈켄트

 



다슈켄트의 지진 기념비(Earthquake Memoral)

 

다슈켄트는 1966년 리히터 지진계로 7.5

기록하는 대지진이 일어나 당시 생존자들은 지옥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000회 이상의 여진으로 25만채의 가옥과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기록하였습니다

지진직후 19개의 소련연방은 다쉬켄트 재건작업에

참여해 단일기간에 우즈베키스탄으로 많은사람들을

이주시킨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다쉬켄트 샤라프 라시도프 프로스팩트에 자리한

지진기념 동상앞에 영신여사는 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많은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지지만 기념비는 복구와 재건을 상징하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했습니다

구소련연방이 남긴 유물이라 합니다

이지진으로 다슈켄트의 많은 유적 유물들이

파괴되어 지금은 오히려 주변 사마르칸트나

구하라 같은 곳이 더 볼거리가 많다고 합니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뒤 레린동상이 철거되고

현 지구본모양의 기념탑이 세워졌다 합니다

 

타슈켄트 중심지에 있는 레린광장 레린동상도

독립과함께 철거되고 민족영웅 아미르티므르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합니다

 

아미르 티무르(133649˜1405218)

중세시대 중앙아시아 이슬람제국을

이룩한 제왕으로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중국 일부분

부터 러시아 이란 인도 아라비아반도 동유럽 북아프리카

까지 영향을 미치며 대제국을 건설한 우즈베키스탄의

국민적영웅입니다

 

 

아무르티무르 박물관 Amir Timur Museum

 

 

 

 

 

 

 

 

 

 

 

 

 

 

 

 

아무르티무르 박물관 (Amir Timur Museum ) 전시품

 

다슈켄트에 아무르티무르공원옆에 아므르

박물관이 있습니다 새롭게 지어진 박물관 내부에는

우즈벡의 전통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벽에는 아무르티무르의 일생을 그린

일러스트가 많이 장식되어 있는데 여러명의 화가의

작품으로 각기 다양하게 티무르의 일생과 그모습을

그려내 전시되고 있습니다

 

 

 

 

다슈켄트의 나보이 극장 (Alisher Navoiy Balet ve Opera Teatri)

 

우즈벡시인의 이름을 딴 나보이 Navoy 극장은

2차 대전때 극동전선에서 소련군에게 붙잡힌

일본군 포로들의 노역으로 지었다는 극장은

크래식한 요소와 중앙아시아적 요소가 결합한

건축양식으로 넓리 알려져있습니다

다스켄트에 오는 일본인들은 반드시 들러본다고

합니다

세계정상급 오페라와 발레공연 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선보인다고 합니다

 

타슈켄트의 철수 바자르  (Tashkent withdrawal Bazar)

 

 

 

타슈켄트의 철수 바자르

 

바자르 Bazar

 

우리나라의 재래식 시장에 해당되는 곳으로

다슈켄트 시내에만 13군데의 바자르가 있다합니다

지붕만 있는 노천시장으로 수백수천의 상인들이

저마다 좌판을 벌여 놓고 손님을 부름니다

이곳은 삶의 향취가 물씬 풍겨나는 대단히 흥미

있는 곳으로 터키의 그랜드바자르와 흡사하다

특히 꾸일루크 바자르는 고려인 상인들이 가장

ajsgdms 곳으로 김치나 고춧가루 등을 살수 있어서

한국사람들의 관심을 가장끄는 곳입니다

 

침간산(덴산산맥 MT.Chimdgin)

 

 

 

 

 

 

 

 

 

 

 

 

 

 

다스켄트에서 북쪽으로 1시간반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침간산(덴산산맥 MT.Chimdgin)

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휴양지입니다

 

 

침간산 휴양지에 선

가이드 마리나는 고려인 입니다 아름다웠습니다

32살인데 우리풍습처럼 아이는 친정엄마가

키워준다고 하였습니다

 

 

 

 

 

사마르 칸트 (Samarkand)

 

우즈베키스탄의 대표 관광도시 사마르칸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더욱더 주목받고 있는 레기스탄광장

주도인 다쉬켄트에서 고속철로 4 시간 걸립니다

 

사마르 칸트 (Samarkand) 동양 민족의 문화재로,

아름다움과 건축 양식이 독특하고 중세의

건축 기념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마르 칸트는 중세의 이미지와

많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도시는 바뀌었지만 모자이크 패턴으로 장식 된 돔,

탑 및 웅장한 건물 아치는 여전히 태양 빛을

발하고 눈을 끌고 있습니다.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포함 된 사마르 칸트의

명소와 기념물은 오래된 책의 페이지와 마찬가지로

사마르 칸트의 역사와 문화의 도시

교차로를 이야기합니다.

 

실크로드 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이름 사마르칸트는

당나라 장안에서 로마까지 이어진 오아시스 실크로드의

중간 거점도시로 숱한 사람과 물자를 이어주던

문화의 십자로같은 곳이었습니다

 

로마와 나이가 같다는 도시는 작은 오아시스 마을에서

시작 교역에 소질을 보였던 소그다니아의 중심으로

발전했고 징기스칸 시절을 거처 티무르제국의 수도로

그 전성기를 구가했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도시 전체에

14.15세기 티무르제국의 역사유적이 산재해 있습니다

 

 

 

 

레기스탄 광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세 개의

신비의 건축물( 울르그멕 마드레샤. 타라카리 마드레샤.

쉬르도르 마드레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세 건물사이에 광장이 있어서 왕에 대한 알현식

공공집회가 열렸던 장소로 레기는 장소 스탄

˜의 땅이라는 모래의 땅이라는 뜻이라 합니다

 

 

 

 

 

전면 타라카리 마드레샤

 

 

좌측에 있는 울르그멕 마드레샤

 

 

우측에 있는 쉬르도르 마드레샤

 

 

 

 

 

 

 

 

화려한 모자익 타일 문양

 

 

 

Registan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 중 하나이며,

중앙 아시아의 진주라고합니다.

이 광장은 

Ulugbek madrasah (1417-1420),

Sherdor Madrasah (1619-1636)

Tillya-Kari Madrasah (1646)와 같은

아름다운 건축 앙상블의 일부로 중세

건축물의 독특한 기념물로 인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비비하눔(Bibi-Khanum)'


 

 

'비비하눔(Bibi-Khanum)'이란 티무르가 사랑한 중국인

왕비의 이름으로, 인도로 원정을 떠난 티무르를

깜짝 놀래켜 주기 위해 이 거대한 사원을 지었다고 합니다.

티무르가 돌아오기 전까지 완공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는데

그때 왕비를 남 몰래 사랑하던

건축가가 왕비가 자신에게 입맞춤을 해준다면

완공시켜주겠다고 했다. 합니다

그래서 건축가와 입맞춤을 하게 되었는데 왕비의 볼에

건축가의 입맞춤 자국이 남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티무르는

거대한 모스크를 보고 기뻐했지만 왕비의 입맞춤

자국에 화가 나 건축가를 사형시켰고 왕비에게는

차도르를 쓰도록 했다.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그후 왕비는 완성된 미나레트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도, 하는 실재하지 않은 이야기 라고도 전해져옵니다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아무르 티무르대왕 영묘 구르아미르(Gur Amir)

 

 

 

 

 

아미르 티무르 (Amir Timur)의 가족 금고와

그의 상속인 인 구르 - 에미 르 묘소 (Gur-Emir Mausoleum)

사마르칸트의 남서부에 1404 년에 세워졌습니다.

이 무덤은 델리의 후마윤 (Humayun) 묘소와

아그라의 타즈 마할 (Tadj Mahal)이라는 세계 건축물의

유명한 두 기념물의 원형 이었습니다.

 

 

황금으로 치장된 화려한 영묘의내부

 

이름대로 ‘절름발이’ 주검 확인
이 무덤의 실체가 밝혀진 것은 500여년이 지난 1941년 6월 21일 옛 소련 고고학자들에 의해서였습니다. 관들을 해체해 보니, 주검 한 구는 다리가 불구였고, 다른 한 구는 목이 잘려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티무르는 이란과의 시스탄 전투에서 오른손과 오른다리에 부상을 입어 평생 절름발이였다. 합니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바로 ‘절름발이’란 뜻의 티무르 입니다. 이로써 불구의 다리를 지닌 주검이 티무르인 것으로 확인되고, 잘린 목의 주인은 손자 울루그벡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발견을 놓고 뼈있는 일화가 나돌았습니다.발굴 현장에 허술한 옷차림의 세 노인이 나타나 책 한 권을 펼쳐보이면서 관에 손을 못대게 했습니다. 책에는 “티무르 무덤에 손 대지 말라. 손을 대면 전쟁이 일어나리라”란 경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발굴단은 실없는 망언이라며 노인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그 이튿날(22일) 독일의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그 뒤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은 무덤에 손댄 탓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어쩌면 티무르에 대한 절대적 숭배에서 비롯한 수호의식이거나, 전쟁을 피하려는 간절한 염원의 반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Afrasiab Painting)

 

 

 

 

 

아프라시앞 궁전벽화로 가서

감개가 무량하였습니다 사마라칸트의 중앙아시아와

한민족의 교류가 확인되는 순간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위키백과에서는 벽화속의 두명은 고구려 특유의 복식인

조우관( 鳥羽冠 새의 깃으로 장식한모자)을 쓰고

환두대도(環頭大刀둥근 고리가 달린 큰칼)를

찬 벽화의 모습은 고구려 사신들이

당나라를 견제하기위해 연개소문이 보낸 밀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권영필교수님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와국 과학자들의 학술에의하여

아래글을 올려봅니다

 

사마르 칸트는 중앙 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에있는 도시입니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실크로드 (Silk Road) 중간 지점에

지리적으로 위치한이 도시는 고대 시간 동안

수년 동안 번영을 누렸다.

이 도시는 당시 동서양 사람들이 무역과 철학, 비즈니스 및

예술을 교환하기 위해 만난 소그드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1965 년 Afrasiab Hills에서 오래된 궁전이 발견 된

새로운 벽화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벽화는 역사가들이 소그드 왕국의 655 년에 바르만 왕의

통치 기간 동안 생산 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외국 대사로 보이는 사람들의 그룹을

보여주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습니다.

 역사 학자들은 서쪽 벽 오른쪽에있는

2 명은 고구려 왕국 (기원전 37 년 - 668 년)으로

고대부터 아시아 전역의 국제 관계 역사에 관한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고 제안했다.

고구려의 고대 국제 관계는 주로 동아시아, 즉 일본과

중국에 국한되어있는 것으로 보아왔다. 고구려가

중앙 아시아에서 5000 킬로미터 떨어진 한 나라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왔다.

그러나이 벽화 발견은 고대 고구려와 세계를 연결 짓는

세계적 유대 관계를 재평가 할 기회를 연구원들에게 제공한다.

 

고구려에서 왔다고 생각되는이 두 인물은 고대 한국인이

착용하는 옷에 대해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깃털이

 달린 모자와 끝 부분에 둥근 머리가 달린 검입니다.

김학조 동북아 역사 재단 사무 총장은 "대부분의

역사 학자들은 고구려의 강력한 외교관이자 총장 인

연 개솜 (603 ~ 666)이 당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사신 (Sogdian) 왕국에 사신을 파견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907), 라이벌 국가. "

최근 이 그림은 동북아 역사 재단과 사마르 칸트의

아 프라 ab 박물관과 협력하여 다시 살아났습니다.

현재 용산구 국립 중앙 박물관 3 층 중앙 아시아

회의실에서 2014년 12 월 23 일부터 역사적인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부하라 (Bukhara)

 

부하라 시가지(City of Bukhara)

 

 

고대 이스람 색채가 뚜렸이 남아있는 아름다운도시

 

중앙아시아에서 고대의 이슬람 문화의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도시로 전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이

이 고대도시를 보기위하여 몰려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념물은 도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흔히 이곳을 우즈베기스탄의 보물이라고 부르며

역사적으로 사연이 많은 다양한 건축물들이

관광객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사마르칸트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때 거대한

실크로드 상업의 중심지였다 합니다

또한 과거에는 이슬람 세계를 통틀어 배움의 열기가

가장 높은 도시로서 약 350게의 이슬람 모스크와

100여개의 신학교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명성은

17세기 중앙아시아 대정복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합니다

 

 

 

라비 하우스(Lvabi-khauz)

 

고대 도시 부하라 중심부에 자리잡은 라비하우스 는

1620년대에 조성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호수?(큰연못?) 이주변으로는 다양한

식당과 카페가 있어 현지주민과 관광객이 붐비는데

이 라비하우스를 둘러싸고 세 개의 유명한 건물주에

쿠켈다쉬메드레세(Kukeldash Madrassah)

호수와 앙상불( Ensemble)을 아루는 16세기 초기

건물로 샤이반(Sheybanids) 왕조의 지배동안 세워졌다

합니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큰 이슬람 학교이며 320명 이상의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하고 130여개의

휴즈 라 (hujras)를 가지고 있습니

그리고 나디르 디만베기 베드레세 (Nadir Devan Begi Khanaka)

라비하우스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겨울 모스크입니다

 

 

 

 

쿠켈다쉬메드레세(Kukeldash Madrassah)

 

 

나디르 디만베기 베드레세 (Nadir Devan Begi Khanaka)

 

 

 

호자 라수르딘 동상

 

호수가 광장주변에 세르반데스의 동키호테처럼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털털하게 보이는

호자 라수르딘 의 동상입니다

호자는 튀르크민족과 페르시아 민족들이 서로

자기네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현자입니다

그의 일화중 하나는

어느날 그가 아내와 잠을자고 있는데 아이가 앵앵

울기시작 했습니다

자고있던 아내가 호자에게 달래라고 말했습니다

호자가 ?”라고 대답하니 아내가 저애의 반쪽은

당신거잖아요! 그러니 애좀달래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호자는 지금 울고있는 반쪽은 당신의 반쪽이고

내 반쪽은 자고 있다

라고 말했다 합니다

호자가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은 어느지역이나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타고 다녔느지는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당연히 제대로 타고 다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꾸로 타고 다녔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있는 동상은 제대로 타고다니는 형상입니다

당나귀도 고개를 숙이며 끌려가는 듣한 생동감있게

보이며 술주정뱅이처럼 아니 우리의 봉이 김선달처럼

해학이 넘처나 있습니다

 

 

 

 

 

 

카페 에서

우즈베키스탄 음식문화(Uzbek food culture)

 

우즈베키스탄의 주식은 빵과 양고기입니다

우리가 먹은 것은 사마라칸트넌느(Samakand noni)

어쉬/플럽(osh/plov) 사쉴럭(ahashlik)

만트(manti) 너른(norin) 국시(kuksi)등으로

아주 맛이 있었습니다

푸른접시에 청결함이 묻어나는 음식은

사막으로 둘러쌓인 오아시스 유목민을 원조로한

그들만의 독특한 맛이 있지만 고려인들이 다수가

있어서 그런지 음식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사마라칸트넌느

(Samakand noni)

 

사마라칸트의빵은 우즈벡에서도

알아주는 최고의 맛을냅니다

 

 

 

어쉬/플럽(osh/plov)

 

고기 쌀 당근을 볶다가 물은넣어 끓인 우즈벡

대표 음식

 

 

사쉴럭(ahashlik)

 

쇠고기 양고기 닭고기 감자등을 꼬치에 끼워

직화로 구운요리

 

 

만트(manti)

샤워크림(요구르트)을 끼얹어 먹는 만두

 

 

 

 

너른(norin)

 

채썬 밀가루 반죽과 잘게썬 말고기로 만든

타쉬켄트 특산품요리

 

 

 

 

 

국시(kuksi)

고려인들이 만든 찬 국수요리

 

 

민속공연

 

부하라 이스마일 샤마니영묘 (Mausoleum of Ismail Samani)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 혹은 이스마일 샤마니

(?-907) 샤만왕조의 지배자 아미르입니다

이스마일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만호다의 자손이며 중앙아시아 타지크족의

선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기에

수많은 전란에도 파괴를 면하고 오늘날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두 건축물이 있습니다.

사마니 묘당과 마고키 아타리 사원입니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건물이라는

사마니 묘당은 몽골 침략 시 도시가 무참히

파괴되었으나 1925년 흙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9세기경 이슬람 초기의 건축양식이어서

세계의 고고학자나 건축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사마니 왕족의 묘당으로 지어졌는데 건물은

사각형 몸체에 반구형 돔을 얹은 구조입니다.

벽돌들은 요철 모양으로 각각 다른 기하학적

무늬를 넣고 쌓아올려 명암을 나타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부서지지 않도록 흙과 낙타 젖을

짓이겨 만든 벽돌이라고 합니다.

돔형 천장은 우주를 상징하고 땅을 상징하는

바닥은 네모나게 했습니다.

천장 아래에 작은 창을 내어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벽면의 문양이 계속해서

바뀌게 했습니다.

황금색 또는 푸른색으로 내부를 비추는 빛의

신비스러운 조화를 느끼게 했습니다.

특히 달빛에 보면 더욱 아름답다고 하니

당시 건축가들의 미의식에 놀랄 따름입니다.

이 건물을 보면 시간에 의해 마모된 흔적들을 품고

우뚝 서 있는 작은 거인처럼 느껴집니다.

한 민족의 문화가 타민족에 의해서 멸망되면

과거의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문화를 키워나갑니다.

그렇게 중첩되면서 쌓여온 문화가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실크로드의 문화요람과 같은

지역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매일신문]

 

아크 요새(아르크 성 Ark citadel)

 

 

 

 

 

 

 

 

 

 

아크 요새(아르크 성 Ark citadel)는 부하라의

가장 오래된 기념비입니다.

AD1000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기록에 따르면 Bukhar-khudat Bidun이 이곳의 성곽을 건설한 후에

궁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거의 완성될즈음 갑작스런 붕괴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 부하라 제국은 실패의 원인을 찾아 일곱개의

돌기둥 위에 다시 건설을 하였습니다.
이 성채는 궁, 부속 건물들, 성벽으로 이루어졌으며

34,675 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재는 두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원래 서쪽에 한개만 있었던 것이

1921년에서 1923년까지 2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고대에 이곳은 부하라 지배자의 거주지로 내부에는

왕궁뿐만 아니라 사원, 수용소, 사무실, 조폐소, 창고, 공장,

마구간, 무기고 심지어는 감옥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곳 내부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서는 다양한 공예품과 거주지로 쓰였을당시의

생활상을 볼수 있는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역사와 함께 이곳은 계속해서 재건축을

거듭하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주요 부분은 17세기에서

20세기에 지어진 것입니다.

이곳은 특히 곳곳에 아름다운

아치로 꾸며진 복도와 정원이 많아서

산책하기에 매우좋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요새는 서사시 영웅 Siyavush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잘 생긴 젊은 남자와 통치자 Afrasiab의 딸은 사랑에 빠졌다.

합니다  

그러나 소녀의 아버지는 Siyavush에게 황소의 피부에 궁전을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가 공주와 결혼하고 싶다면.

그러나 Siyavush는 교활했습니다; 그는 끝을

연결하는 얇은 띠로 피부를 자르고 궁전을 세웠다 합니다.

20 세기 초에 통치자, 공예품 상점, 창고, 무기,

, 카펫 등의 궁전이있었습니다. 삼천 명이 여기 살았습니다.
 
현재에는 1987 년부터 존재해온 수문학과 서예학과,

근대사 및 민속학과의 부라하라 스테이트 뮤지엄이 있으며

여기에는 36,000 개의 전시품과 "글쓰기 기념물"전시회,

그리고 부하라학과 자연은 1951 년 이래로 기능을 발휘해 온

박물관 중 가장 오래된 부서 중 하나입니다 

 

 

 

 

부하라의 마고기 앗타리 사원

 

불교와 조로아스타교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원입니다

 

 

 

마고기 앗타리 모스크에서 관광온 현지인들

서로 다른 인종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들 과 함께  

 

 

 

 

 

놀라운 무용수, 우즈베키스탄 음악의 향연,

사막의 바람에 흔들리는 화려한 의상들.각 지역마다

약간 다른 음악과 자체 의상이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인구는 약26백만명 정도입니다

100여개의 민족이 모여 사는데 주된 민족은

우즈벡족이 약70% 러시아 위그르 타타르 고려인

들이있습니다

오랫동안 소련의 통치를 받아왔기에 러시아인도

많이 살았는데

대체적으로 미인들입니다 영신여사는 그들의

미모를 극찬합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소녀

 

우즈베키스탄의 무용수

 

 

 

 

Jurte - 전통 가옥이나 텐트는 여전히 여기 저기에 보일 수 있으며,

5 Karakal 사막 한가운데서 40 ° C 이상의 열을 방출하는

환영 쉼터입니다.

음영이 짧고 요일이 매우 덥습니다.물은 사람이

필요로하는 정말로 중요한 유일한 것입니다 -

그리고 태양빛 보호.

 

 

사막의 낙타

 

부하라 여행자의 숙소 (카라반 사라이)

 

실크로드 모래폭풍의 사막을 낙타를타고

이동하는 카라반들은 도중 도적과 배고품을

이겨낼 쉼터가 필요했습니다

2000년 동안 장대한 역사의 교역로

향료냄새를 풍기며 비단을 싣고 사마르칸트

로가는길 사마라칸트는 실크로드에서 최고로

번화한 도시였고 수많은 문화의 요람이었습니다

동서양의 실크로드를 오가며 무역상을 하던 상인들이

쉬면서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도적의

무리로부터 지참한 상품과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성곽을 만들고 경비병을 세웠다 합니다

 

 

 

 

Muynak (우즈베키스탄) : Muynak은 한때 아랄해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소연방은 관개 용으로 Aral Sea를 배수 해 Muynak을 파괴하고

바쁜 항구의 희생자들을 사막의 황무지에 앉혔습니다

 

 

 

 

 

 

 

 

 

티무르 제국

 

  

 

 

14-15세기 티므르제국 영토

 

 

 

 

여러곳을 발굴과 문헌을 토대로 만든 티므르 흉상

 

 

 

 

우즈베키스탄 샤흐르 사브즈의 동상

우즈베키스탄에는 3개의 큰 티무르동상이

있는데 다슈켄트의 동산은 말을 타고 있고

사마르칸트의 구르예미르 영묘 앞에는

앉아있는 동상 그리고 샤흐르 사브즈의 동상이다

 

 

 

 

 

 

 

 

 

 

 

14-15세기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는 러시아 인도 이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등 짖밟고 마침내 단하나 남은

강국 오스만제국을 공략하여 앙카라를 점령한다

 

 

티므르제국 을 일으킨 티무르는 풍운아적인 기질을

가지고 동양적 중동적

위선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다 즉 우정어린

항변 화해 포옹 그리고 끊이지 않는 코란구절을 인용뒤

이은 배반 급습 무자비한 처형이었다

 

그 한예로 7년동안 관용을 베풀던 바그다드에서

반란조짐이 있자 티므르병사 한명이 바그다드인 목2개씩

가져오라 명하여 성벽에는 삽시간에

2만의 목이 쌓였다 한다. 이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근2000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산채로 차곡 차고 쌓고

진흙과 벽돌을 함께 섞어 탑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룬 티므르제국

그는 잔인 무도하면서도 냉혹한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반면

문화 예술의 보호자라는 양면성을 보였다

 

단하나 눈앞에 남은 제국 오스만의 술탄 바야지트1세는

오스만의 국력을 정점에 이르게한 인물이다.

 

아버지 무라트1세의 위업을 이어받은 세르비아를 점령

항가리 보스니아그리스를 경략했으며 십자군도

격파한 인물인데 그에게 티므르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너처럼 왜소한 군주가 나와 감히 비교할수 있겠는가??”

바야지트의 답변은

“너를 타브리즈와술타니아 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킬 것이다” 였다

이답을 들은 티므르는 1400년8월 소아시아로 진군하였다

오스만영내 요새 시바스를 공략 3주만에 함략시켜

포로중 무스림은 살려주고

아르메니아계 4000여명의 군인 들은 산채로 묻거나

우물에 던져버렸다

 

바그다드를 점령한 티므르는 1402년 6월 앙카라로

진군 1402년7월20일 앙카라 치부카바드에서

양군 100만명이 동틀력부터 밤중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패한 술탄 바야지트1세는

도망하다가 아들과함께

붙잡혀 살려주나 화병으로 1403년 사망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침공은 티므르에겐 소풍에 불과했다

만약그가 명(중국)을 치려고 가다가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오스만제국이나

콘스탄티노풀 모두 티므르제국의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BC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하여

사마르칸트 부근의 지역족장의 딸과 결혼하게돤다

쿠산제국하에 불교가 전파되고 실크로드를 통해

보다 거친 세계와의 평화적인 접촉을 하게되고

도시는 점점 커지게 되어 풍요를 누린다

AD6세기 서투르크족이 이스람교와 기록된 알파벳을

전하면서 스템비역을 휩쓸게된다

그들이 보다 푸른 초원으로 이동하게되자

징기스칸과 그의 무리가 이나라를 정복할때까지

페르시아가 다시 점령하게된다

14세기에 무자비한 전사 티무르족이 일어 나면서

우즈베키스탄은 다시 번성하게되고

사마르칸트는 도시의 예술적인 후광에 힘입어

화려한 이슬람의 수도가된다

이즈음 일부 몽골족이 우즈벡이라는 이름을

쓰게된다

14세기에 그들은 사실상 티무르제국을 정복하면서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1510년 까지 그들은 아무-다리아강에서 사르-다리아

강까지 모든 것을 통치하게되고 그후 통치를 계속

하게된다

18세기초에 카바의 왕이 투르크인과 카자크에

대항하여 거대한 국토를 방어하기 위해

러시아의 피터대제에게 원조를 요청하게되고

중앙아시아에대한 러시아의 흥미를제공한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카바를 향에 진군해오자

카바왕은 러시아의 도움을 원하지 않게되고 거의

전군을 학살하게 된다.

 

몇 차례의 사소한 침략과

별도로 1839년 당시 영국의 확장을

막으려고 애쓰던 짜르 니콜라스 1세가

대규모 러시아군 원정을 보내게 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25년후에

러시아군이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엄청난

이동을 하게 되고 1875년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1917년 러시아 혁명후에

소련 공산당은 대부분의 중앙 아시아가

스스로 국가로서가 아니라 민족적인

투르크나 페르시아인이라고 정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투르키스탄 자치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언하게 된다. 192410

우즈베키스탄이 선언되지만 다음 수십년동안

그 규모나 크기는여러차례 변하게 된다.

시골의 우즈벡인에게 소련의 통치는

자신들의 농장을 강제적으로 집단화하여

면화 경작지로 대규모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했다.

지식인들에게 그것은 또한 무서운

숙청을의미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격렬한 반공산주의

민중운동은 면화 농장과 공식언어로서

우즈벡어 사용에 대해 거리낌없이

얘기하기 위해 1989년에 형성된다.

이 운동이 아주 인기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또는 높았기 때문에)

경쟁선거는 허용되지 않는다.

1991년 모스크바가 붕괴한 후로

우즈베키스탄은 독립을선언하게 되고

공산당은 이름을 변경하지만 다른 것은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대부분 진짜

야당진영의 경쟁선거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 지도자인 카리모프(Karimov)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사실 독립이후

여행금지, 정치적 활동과 출판 금지,

사실상의 경찰국의 도입, 계속되는

폭력협박덕분에 그의 권력은 커지고

있으며 반대자들은 움찔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우즈베키스탄은 복합당의

민주주의지만 실제로 야당은 존재의

위협을 받고 있다. 1995년 선거에서

카리모프가 경쟁자없이 승리하게 된다.

 

이글은 치의학 안상훈박사 부인 영신여사의

설명으로 외국포털의사진과 글 그리고 위키백과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