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장군 묘(權慄 將軍 墓)
지정번호 : 시도 기념물 제2호
위치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장흥에 있는 권율장군의 묘소에 들렀다 지난주 우리산소의 벌초가 끝났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경건하게 참배에 나섯다
인부들이 풀깍기가 열심이었다 임진왜란 3대첩중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은
부녀자들도 전투에 참가하여 치마폭에 돌을 날라 싸움으로서 산성앞 한강엔
왜구의시체가 산을이루고 강물은 피로 물를인 대전으로 여인들의 돌을나르기
편하게 잘러서 전투에 임한 전통으로 행주치마는 유명해 졌다
장군의 덕으로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부녀자까지 따른것이다
아래 사진과 글들은 빌려다 편집한것 입니다
장군동상
덕양산 정상에 지어진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과 승병을 포함한 2천3백명으로, 왜군 3만 여명을 크게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곳이다.
승전탑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선조 26년(1593년) 1월에 우리나라와 명나라 연합군은
반격을 펼쳐 북상했던 왜군을 격퇴하여 서울로 퇴각시켰다.
그러나 왜군은 1월 27일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을 물리치고 다시 사기가 올랐다.
당시 전라도 순찰사였던 권율 장군은 이미 1592년 11월부터 5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친 뒤에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후방에서 위협하며,
행주산성으로 옮겨 목책을 세워 요새화하고 남하하는 우리 군과 합세해
서울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서울에 집결하였던 왜군들이 벽제관 승리의
여세를 몰아,
3만 대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을 총공격하였다. 우리 군은 권율 장군의 지휘하에,
인해절술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군들과 맞서 격전을 벌였다. 왜군은 수차례의
공격을 모두 실패하고 사상자가 속출하자, 시체를 네 곳에 쌓아 불태우고는
오후 5시경에 퇴주하였다.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인 이 행주대첩은 관군ㆍ의병ㆍ승군ㆍ부녀자가 합심하여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엎는데 결정적인 계기였으며, 우리나라 항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이 전투에서는 우리나라 전쟁 역사에서 처음으로 "재주머니 던지기"라는 전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아낙네들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전투를 거들었는데, 행주치마라는 이름은 바로 이 전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권율 장군은 중종 32년(1537년) 당시 영의정 권철의 아들로 태어나 46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에 의주 목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별 천거로
광주 목사를 맡으면서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뛰어난 명장으로
이름을 남기고, 선조 32년(1599년)에 세상을 떠났다.
행주산성 내에는 "충장사"가 있는데, 이곳은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셔 놓은 곳이다.
원래는 행주나루터 안마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행주 기공사가 있었으나,
6.25 사변 때 소실되고 1970년 행주산성 정화공사 때 이곳에 다시 지었는데,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 건평 25.4평의 콘크리트 건물이다. 충장사의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이며, 사당안에 봉안된 장군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이다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삼국시대의 토축산성으로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정상부를
둘러싼 소규모의 내성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거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포용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부합된다. 이곳이 백제의 초기 영역에 속하여 서해안으로의 수운과 관계된 중용한
거점으로 추측되며, 특히 나당전쟁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와의 공방전도 있었을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일뿐이며,
서쪽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정도의 토루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이 외성은 자연능선을
이용하여 양쪽에서 석심을 두고 관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계곡 쪽의 성벽은
유구를 찾을 수 없으나 산중복을 돌아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이른바
이중식산성을 삼국시대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주목된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 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을 비롯하여 어골문ㆍ수지문의 기와편에도
발견되고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중인 선조 30년(1597년) 12월29일의
상황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관련된 것이다.
당시 울산에서는 조명연합군과 왜병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 전투는 흔히 '울산성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공식명칭은 울산 '도산성 전투'(島山城戰鬪)이다.
울산에 있는 도산, 즉 지금의 학성에서 일어난
전투였다.
아래그림은 왜장이 그린 울산성 전투도의 모습입니다
1598년(선조 31)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싸운 전투. 1597년 10월 초 조선·명(明)나라 연합군의 반격에 의해 일본군은 남으로 후퇴하였다.
일본군은 직산전투에서 대패당하고 가토[加藤淸正(가등청정)]군과 합류하여 울산 서생포 방면으로 후퇴하여 울산에 주둔하면서 해변에 도산성을 신축하였다.
직산(稷山)에서 대승한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여세를 몰아 군사 4만 5000을 이끌고 남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의 내원(來援)을 경계하면서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
도원수 권율(權慄) 등이 이끄는 군사와 함께 도산성을 공격하였다. 포격과 화공(火攻)으로 인해 고립된 일본군은 양식이 떨어지고 우물이 말라 사상자가 늘어가자 서생포와 서남방의 일본군이 내원하여 격전이 전개되었다.
때마침 큰 비로 인하여 인마(人馬)가 많이 얼어죽으므로, 조선·명나라 연합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경주로 철수하였다.
마귀와 김응서(金應瑞)는 동래의 일본군을 격파하여 울산과 부산간 적의 연락선을 차단하였으며 도산성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명군(明軍)과 조선군의 사상자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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