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성 전투도
김시민 장군 영정
가로 226㎝, 세로 37.2㎝의 비단 두루마리에 붓글씨로 쓴 이 공신 교서에는 김시민을 선무공신으로
임명한다는 긴 제목을 시작으로 진주성 방어의 찬양과, 자손에게 벼슬을 내리고 죄를 지어도
사면해준다는 등의 혜택이 있다. 이어 이순신·권 율·원 균 등 18명 선무공신 명단이 적혀 있고,
끝 부분에는 국새(國璽)로서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 있다. 김시민 장군에게 하사된 이
선무공신 교서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후 이 교서는 2005년 11월경 일본의
고미술품 경매 시장에 출품되었으며, 이 사실이 재일교포 학자와 일본에 머물던 우리나라
학자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2006년 5월 국내 각 언론은 이 교서에 대하여 보도하였고,
6월 말부터 mbc 문화방송의 프로그램 「느낌표」와 시민 단체 「문화연대」,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우리 문화유산 되찾기>를 위한 국민 모금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이 교서를 2006년 7월 24일 일본에서 구입하여 7월 25일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김시민 장군 동상
표준영정 논개
진주성 전투도
진주성 전투 재연
적장을 안고 투신하는 논개
논개의 의암석
위키백과사전
1578년(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경기어사의 서찰로 구황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여진족 이탕개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때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에 제출하였으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질타하자 이에 젊은 혈기에 분개하
여 사직하였다.
임진왜란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진주로 돌
아와 성민을 안심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한편으로 군사 훈련으
로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
왜군은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진격하였다.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과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
재우등과 합세하고, 적을 중간에서 요격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천을 이끌고 가서, 거창의 사랑암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군을 맞아 승전하였으며, 이 공으로 1592년 음력 7월 26일 진주목사로 관직을 승진 제수받았다.[1]
김시민은 취임 후 염초(焰硝) 5백여 근을 만들고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따로 부대를 배정하여
숙달시키는 한편,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음력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통정대부로 임명하였다. 그 뒤 금산(金山)에서 적을 격파하여 사기가 충천하였다.
진주대첩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진주성 전투입니다.
한 번 대패한 일본군은 진주를 빼앗으려고 다시 계획을 세웠다. 1592년 음력 10월 5일 일본의 2만 대군이 진
주성晋州城)으로 쳐들어왔는데, 1부대는 마재를 넘어오고 2부대는 불천을 넘어 들어오고, 3부대는 진양을
무찌르고 들어왔다. 그런 다음 성을 둘러싸고 포위 공격을 감행하자 김시민은 고을 안에 사는 백성은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성으로 들어오게 하고 여자는 모두 남장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조직된 3,
8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지키며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을 물리쳐 퇴각시켰으나 성을 사수
하던 조선군 역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592년음력 10월 9일김시민은 전투 뒷처리를 하다가 시체들 속에 숨은 왜군이 쏜 유탄에 맞고 숨졌다.
사후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봉해졌으며,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되었다. 선조 40년에 사액
을 받고, 1702년(숙종 35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하
사했다.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민사가 없어지고, 진주성 내의 창렬사에
함께 배향되었다.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619년(광해군 11년) 음력 7월에 진주성에
세워졌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진주전상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하며,
시도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나란히 서 있다. 1987년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을 위로하기 위
해, 비의 뒷편에 계사순의단을 건립했다.
일본의 반응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주도의 조선관민이 보여준 필사의 항전은 적인 일본군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전투는 일본의 정예 병력이 패배했기 때문에, 김시민은 조선군의 맹장으로서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일본군은 김시민을 모쿠소, 또는 모쿠소 판관(木曾判官)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김시민의 직책인
목사(牧使;중세 한국어에서는 사가 아래아 발음이었음)를 일본발음으로 읽은 뒤, 다시 비슷한 음의 일본 한
자로 표기한 것이다. 조선군 맹장 "모쿠소"에 관한 소식은 히데요시에게도 알려져 이듬해 무슨 일이 있어도
진주성은 꼭 함락시키라는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원인이 된다. 김시민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나, 일본군은
진주목사의 교체와 사망 사실을 몰랐고,(후에 《징비록》이 일본에서 발간되면서 알게됨) 전투중 살해당한
진주목사 서예원의 목은 모쿠소 판관의 것으로 알려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모쿠
소" 란 캐릭터는 조선군의 맹장이자 충신이면서, 원한을 품고 일본을 전복하려는 원귀로 가부키의 소재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텐지쿠 도쿠베라는 별도의 가부키 캐릭터와 섞여 들어가는등, 원래 김시민과는 상관없
는 가상 캐릭터가 되었다.
권율장군 영정
부녀자들의 항전 행주치마로 활약
행주산성 전투도
경기도 장흥에 있는 장군의 비문
충장공 권율(忠莊公 權慄)
행주대첩
大捷碑文(대첩비문)
[有明朝鮮國諸道都巡察使正憲大夫知中樞府事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유명조선국제도도순찰사정헌
대부지중추부사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權公慄卒
旣朞.其軍佐겸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사홍문관제학동지성균관사권공률졸기기.기군좌等以公前有幸州
之捷其功尤大將卽其地建碑于岡以載列垂永請公婿今領相등이공전유행주지첩기공우대장즉기지건비우강이
재렬수영청공서금령상李公[恒福]書來徵文於岦.謹按歲壬辰四月日本兵大勢來寇乘我不戒連陷鎭若이공
[항복]서래징문어립.근안세임진사월일본병대세래구승아부계련함진약邑中外大駭.읍중외대해.
上曰予聞權某可用今其人安在.於是由故義州牧使起拜光州牧使方朝臣視兩 상왈여문권모가용금기인안재.
어시유고의주목사기배광주목사방조신시량南死地公聞命單騎馳甫及州.京城已不可守大駕西幸而業徵兵入
衛.全羅巡察使남사지공문명단기치보급주.경성이부가수대가서행이업징병입위.전라순찰사李洸發兵四萬防
禦使郭嶸分嶺而北迺署公防禦軍之中衛將用書生以武夫人이광발병사만방어사곽영분령이북내서공방어군지
중위장용서생이무부인或難之公曰吾職也.혹난지공왈오직야. 行至稷山與忠淸軍會亦可數萬進軍水原洸令嶸
前撃龍仁賊營公謂曰賊先據 행지직산여충청군회역가수만진군수원광령영전격룡인적영공위왈적선거險非可
襲之勢.且大於此者京城已爲賊有主公擧一道之兵以來惟當直上涉祖江험비가습지세.차대어차자경성이위적
유주공거일도지병이래유당직상섭조강塞臨津毋令賊西而我得形制之便稟命行在有路乃可以圖大.今不可爭鋒
於小새림진무령적서이아득형제지편품명행재유로내가이도대.금불가쟁봉어소亦非萬全以損聲威也.先鋒將
白光彦助防將李之詩各以精兵一千自隨有輕進意역비만전이손성위야.선봉장백광언조방장리지시각이정병일
천자수유경진의公又戒之要與相待則皆不能從光彦等至皆沒.是夜軍中虛驚朝則望賊大潰공우계지요여상대즉
개불능종광언등지개몰.시야군중허경조즉망적대궤諸軍皆還.제군개환. 公亦旣還光州寢不解衣以更聽主將久
之寂然卽奮曰此非臣子坐待國亡日也. 공역기환광주침부해의이경청주장구지적연즉분왈차비신자좌대국망
일야.遂聚境內子弟五百餘人傳檄旁邑又得千餘人之慶尙界上軍焉.聞南原民先賊自수취경내자제오백여인전
격방읍우득천여인지경상계상군언.문남원민선적자爲亂(壬辰七月初三日中道助防將李由蒙潰還于長水聲言
賊至其軍入南原城위란(임진칠월초삼일중도조방장리유몽궤환우장수성언적지기군입남원성盡破帑藏境內
人隨聚其餘穀)少却以撫定之.巡察使得公報事符公權稱都節制진파탕장경내인수취기여곡)소각이무정지.순
찰사득공보사부공권칭도절제令督率列邑官兵以截賊自嶺而湖者.公進軍梨峙阻險而俟七月遌賊疾撃之.령독
솔렬읍관병이절적자령이호자.공진군리치조험이사칠월악적질격지.會同福縣監黃進在軍有勇名中賊丸退一
軍爲氣阻不覺賊躍入砦急甚公提劔회동복현감황진재군유용명중적환퇴일군위기조불각적약입채급심공제검
大呼先冒白刄戰士無不一當百賊救死傷不給棄重狼藉以走.대호선모백인전사무불일당백적구사상부급기중랑
자이주. 旣而行在遙拜公羅州牧使以羅重於光也.尋拜本道巡察使敎書至陣中公西向稽
기이행재요배공라주목사이라중어광야.심배본도순찰사교서지진중공서향계首泣甚悲動一軍.公令防禦使代
守梨峙身之全州發道內兵萬餘以九月勤王.于수읍심비동일군.공령방어사대수리치신지전주발도내병만여이
구월근왕.우時諸賊分據平壤黃海開城而據京城者爲大營放其兵四刼西路巳絶勤王諸시제적분거평양황해개성
이거경성자위대영방기병사겁서로사절근왕제軍皆入江華阻江爲固而巳.公以旣聞上在義州賊尙未過平壤今唯
先圖京城使已군개입강화조강위고이사.공이기문상재의주적상미과평양금유선도경성사이西之賊東於不暇於
計爲得.遂軍水原之秃城以聞則上解劔馳賜曰諸將不如令者서지적동어부가어계위득.수군수원지독성이문즉
상해검치사왈제장불여령자以此劔從事.이차검종사. 京城之賊患公軍居要害以其兵數萬分爲三營擺布烏山等
處往來挑戰.公堅壁不 경성지적환공군거요해이기병수만분위삼영파포오산등처왕래도전.공견벽불應惟時出
奇兵以折角距賊則無所得夜燒營去之.癸巳二月公二分麾下精兵約四응유시출기병이절각거적즉무소득야소영
거지.계사이월공이분휘하정병약사千人其一以畀節度使宣居怡軍衿川山使爲聲援.公自領其一實二千三百人
濟自천인기일이비절도사선거이군금천산사위성원.공자령기일실이천삼백인제자陽川江軍高陽之幸州山城.
于時天朝大將李公如松提督救師而東已克平壤威名양천강군고양지행주산성.우시천조대장리공여송제독구사
이동이극평양위명大振.賊之逃死平壤者棄黃海者棄開城者自咸鏡聞風而遁者皆聚京城京城之賊대진.적지도
사평양자기황해자기개성자자함경문풍이둔자개취경성경성지적勢顧益熾大.세고익치대. 公懸軍已入肘腋之
地賊且知其兵少不以爲意容一窺足轢之而巳.三月十二日黎 공현군이입주액지지적차지기병소부이위의용일
규족력지이사.삼월십이일려明候吏白有賊形公戒軍中毋動升高而望則去城五里賊已被原矣.先逼以百餘騎명
후리백유적형공계군중무동승고이망즉거성오리적이피원의.선핍이백여기俄盛兵乘之圍之而倍者不可復測
度.我軍殊死戰矢石雨下.賊分兵爲三迭休而進아성병승지위지이배자불가부측도.아군수사전시석우하.적분병
위삼질휴이진自卯至酉而三合不利則人持束葦因風縱火火及柵城中以水救之直西北子城僧자묘지유이삼합불
리즉인지속위인풍종화화급책성중이수구지직서북자성승軍守者少燒.賊大叫而入一軍披靡公抽劔叱諸將諸將
爭逆鋒格戰賊大衂積尸爲군수자소소.적대규이입일군피미공추검질제장제장쟁역봉격전적대뉵적시위四處焚
之而去.我軍收斬其餘猶爲百三十餘級得所棄旗幟鎧甲刀鎗無數.時李사처분지이거.아군수참기여유위백삼십
여급득소기기치개갑도쟁무수.시이提督軍開城而先鋒遊撃査大受聞公大捷翌日遣其褊裨來視戰處又數日要與
相제독군개성이선봉유격사대수문공대첩익일견기편비래시전처우수일요여상見公整陣而迎至則嘆曰外國有
眞將也.旣而公移陣坡州之山城賊以必報幸州之敗견공정진이영지즉탄왈외국유진장야.기이공이진파주지산
성적이필보행주지패擧衆而西望見公壁壘如幸加嚴相戒毋犯而還如是者三焉.거중이서망견공벽루여행가엄상
계무범이환여시자삼언. 四月李提督用沈惟敬計諸賊稱受和約一日棄京城以去.公聞之輕兵馳入城則 사월이제
독용침유경계제적칭수화약일일기경성이거.공문지경병치입성즉賊已渡漢江而提督遣遊撃戚金觀公動靜皆收
津船使不得濟追兵矣.公怏怏無奈적이도한강이제독견유격척김관공동정개수진선사부득제추병의.공앙앙무
내而罷兵還本道.夫以公本圖京城之志屈於前巡察不能因兩湖六萬兵之會而趣臨津必이파병환본도.부이공본
도경성지지굴어전순찰부능인량호륙만병지회이취림진필可守之便適以取龍仁之一潰若其梨峙之役可謂小逞
於不幸之後.然使湖南數年免가수지편적이취룡인지일궤약기리치지역가위소령어불행지후.연사호남수년면
爲蛇豕再窺而根本征輸東西以給繄誰頼也曁代巡察而後可以擅用一道之兵.위사시재규이근본정수동서이급예
수뢰야기대순찰이후가이천용일도지병. 然是時一道之兵用之者衆.如節度使崔遠先已提領號稱勤王大兵而頓
之江華 연시시일도지병용지자중.여절도사최원선이제령호칭근왕대병이돈지강화及如所在官義諸軍以戰以
守未可一二數也.公僅俱萬兵而行其勢不能直擣豺虎而
급여소재관의제군이전이수미가일이수야.공근구만병이행기세부능직도시호이秃城之扼持足以遏其橫突使兩
湖以貫畿右之路脉無阻比至幸州則主而致客寡而독성지액지족이알기횡돌사량호이관기우지로맥무조비지행
주즉주이치객과이克衆盖不獨天將平壤之餘威爲足以懾凶膽.向非有懾則雖百沈惟敬不能使之一日극중개부독
천장평양지여위위족이섭흉담.향비유섭즉수백심유경부능사지일일去京城也.於是公本圖京城之志庶幾不負
矣.거경성야.어시공본도경성지지서기불부의. 六月拜都元帥督嶺南諸軍.自是厥後或乞釋符或復推穀而丁酉
冬從於麻提督 육월배도원수독령남제군.자시궐후흑걸석부흑부추곡이정유동종어마제독貴蔚山之役.戊戌秋
從於劉提督綖順天之役皆以體統受制有先見之言而不用귀울산지역.무술추종어류제독연순천지역개이체통수
제유선견지언이부용有先登之勇而不効不獨公自汶英涙盖志士共惜之.然賊不能再窺深入俄又不能不捲유선등
지용이불효불독공자문영루개지사공석지.연적불능재규심입아우불능불권還則以京城旣復而有以守也.至是
或可以騐公之本圖而中興無所歸功則已矣환즉이경성기복이유이수야.지시흑가이험공지본도이중흥무소귀공
즉이의有則誰擧第一哉.유즉수거제일재. 己亥病乞免歸就醫都下不能復朝七月以卒享年六十三.訃聞上震悼輟
朝 기해병걸면귀취의도하불능부조칠월이졸향년륙십삼.부문상진도철조賜吊祭賻有加.嗚呼公之勞著本朝則
不允丙申辭再帥賜內廐馬有敎因拜辭사조제부유가.오호공지로저본조즉불윤병신사재수사내구마유교인배사
賜酒又賜內廐馬馬裝有敎回.戊戌乞罷疏加奬勵有諭卒贈官詢大臣有議.聲사주우사내구마마장유교회.무술걸
파소가장려유유졸증관순대신유의.성達天朝則有宋經略應昌移本國行賞之咨有兵部石尙書星上功天子之奏有
欽遣달천조즉유송경략응창이본국행상지자유병부석상서성상공천자지주유흠견鴻臚寺官宣諭本國之旨.至臨
津之際麻提督稱其能行號令楊經理鎬嘉其兵將力戰.홍려사관선유본국지지.지림진지제마제독칭기능행호령
양경리호가기병장력전.移歲之後中國大小官聞名必想識其爲人倭中諸酋必問權元帥起居若此類者太이세지후
중국대소관문명필상식기위인왜중제추필문권원수기거약차류자태史氏當書于冊非碑之所以重輕可略也.사씨
당서우책비비지소이중경가략야. 公字彦愼系出安東高麗太師幸之後本朝贊成近之六代孫而領議政轍之子. 공
자언신계출안동고려태사행지후본조찬성근지륙대손이령의정철지자.其器業固有自來而御人事物尤以誠心和
氣不專嚴毅故能得其悅服緩急以頼云.기기업고유자래이어인사물우이성심화기부전엄의고능득기열복완급이
뢰운.公生四十六中壬午文科由郞官超堂上竟以儒將顯歷官無多立朝亦罕遭時艱공생사십륙중임오문과유랑관
초당상경이유장현력관무다립조역한조시간虞所樹立非究也.然牙下故吏士懷公德誼而無以宣爭出財力告公兄
護軍公從우소수립비구야.연아하고리사회공덕의이무이선쟁출재력고공형호군공종事於玆碑亦可尙哉.上護
軍公嘉善大夫恂領相李公鰲城府院君恒福.公再有室皆사어자비역가상재.상호군공가선대부순령상리공오성
부원군항복.공재유실개無男葬在京城西之洪福山.(崔岦)]무남장재경성서지홍복산.(최립)][公卒旣殯其宗人
之從事於軍者見余泣且言曰公在軍甞取一卷子若有箚錄者[공졸기빈기종인지종사어군자견여읍차언왈공재
군상취일권자약유차록자曰我死有婿李議政在必能誌我墓以此銘我足矣.왈아사유서리의정재필능지아묘이차
명아족의. 余發其篋得所謂卷子者有記其幸州之役天朝總督軍門大司馬宋應昌咨奬本國 여발기협득소위권자
자유기기행주지역천조총독군문대사마송응창자장본국者曰權某扼守孤危時抗大敵板蕩忠臣中興名將.繼而兵
部尙書石星奏之자왈권모액수고위시항대적판탕충신중흥명장.계이병부상서석성주지則天子嘉之有勅諭本國
者曰今觀全羅斬獲數多該國人民尙可振作.其下又記즉천자가지유칙유본국자왈금관전라참획수다해국인민상
가진작.기하우기丙申二敎有云卿忠勞茂著勇略超世名聞天下威慴敵國元帥之任舎卿伊誰.及
병신이교유운경충로무저용략초세명문천하위접적국원수지임사경이수.급入對勞之曰非卿國家何以得至今
日.又曰時事粗安繄卿之功是賴殄殲凶賊입대로지왈비경국가하이득지금일.우왈시사조안예경지공시뢰진수
흉적奠安國家予惟望之.仍賜廐馬云云等語皆公手蹟宛然.전안국가여유망지.잉사구마운운등어개공수적완연.
余讀之喟然曰多矣哉.此足矣彬彬乎文哉.奚復以假辭爲也.况公有命敢不克 여독지위연왈다의재.차족의빈빈
호문재.해부이가사위야.황공유명감부극遵以光大其寵靈乎.而於碑略之則懼史氏之或逸也碑成遂假其背而記.
(李恒福)]준이광대기총령호.이어비략지즉구사씨지흑일야비성수가기배이기.(리항복)]
이순신 장군 도
충무공 이순신 동상
명랑대첩 해전도
한산대첩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두 차례 해전을 통하여 참패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6월 하순부터 또다시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 무렵, 웅천에 있던 와키사카의 함대와 부산포에 있던 구키, 카토의 함대가 합세하여 조선수군을 상대로 패전을 설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공세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도 남해안에서 일본 함선의 활동이 현저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이런 일본 수군의 움직임에 타격을 가하고 그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하여 제3차 해상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이른 아침에 미리 약속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파손된 전선 7척을 수리하여 이끌고 온 경상우수
사 원균과 함께 고성의 견내량으로 향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부대를 대거 동원해 호남을 향하고 있었다. 7
월 6일, 전함 일흔 두 척의 삼도수군 함대는 7월 7일에 견내량에 정박중인 적의 선단을 발견하고, 이를 한산
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다. 따라서, 일본
수군이 요행히 조선 수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이 섬에 상륙하더라도 오래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순신은 한사도 앞바다를 결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7월 8일, 이순신은 수 척의 판옥선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의 병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낸 다음, 학익진
을 펼쳐 일본 수군 선단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리고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면서 거북선을 적 선단 핵심에
돌입시켜 좌충우돌로 맹공을 가하였다. 먼저 2,3척을 격파한 뒤 좌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쳐 대선 20
척, 중선 17척, 소선 5척을 불태웠다. 이 싸움에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갑옷에 화살을 맞아 구사일생
으로 간신히 김해로 피하였고 선장 마나베 사마노죠는 자결하였다. 대승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로 품계를
올라갔고 선조로부터 칭찬도 듣게 되었다.
삼도수군 훈련도
도요또미
전경용어사전 에서 옮겨옮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선조 25)~98년에 2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난리.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조선과 명(明)나라의 군사가 연합하여 물리친 전면적인 국제전쟁이었다. 임진년에 처음 발생했다 하여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하며, "7년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언급할 때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른다. 그외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이라고 한다.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정세
동아시아의 조선•중국•일본 각 나라는 14세기에 다같이 새 국가와 정권이 등장한 이후 2세기 동안 안정기를 누려왔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명나라가 동요되고 이웃한 여러 민족들이 자주적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동아시아의 정세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명나라는 16세기경에 환관(宦官)이 실권을 장악하는 등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졌고, 지방에서도 향리재주(鄕吏在主)의 관리나 과거급제자층이 향신(鄕紳)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여 반(反)환관운동•반(反)해금정책 등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각지에서는 농민봉기와 종실간의 반란이 잦았으며,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적이 자주 침입해왔다. 한편 일본은 16세기 전반에는 전국 다이묘[大名]들의 영국경영(領國經營)에 기반하여 상공업 발달이 이루어졌고, 후반에는 권력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정권이 전국통일전쟁 과정에서 국내의 상권과 국제무역권의 통일을 강화해갔다. 그리고 포르투갈인의 내항과 총의 급격한 보급으로 철포대 등 총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새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오다 정권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간토[關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연합한 뒤 1587년 전국을 통일했다.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 과정에서 도시 부상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대륙과의 교통 창구인 하카타[博多] 등을 장악하여 역시 상권과 무역권의 통일적 확보를 중시했다. 그리고 토지와 농민을 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전국적 검지(檢地)와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신분규정을 정하는 등 체제정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은 다이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토지소유에서 제외된 하급 무사들의 불만을 많이 샀다. 더욱이 삼포왜란(三浦倭亂), 영파(寧波)의 난(亂) 등으로 명•조선과의 무역이 거의 폐쇄되자, 정치적으로 강력한 다이묘들의 무력을 해외로 분출시켜 국내의 안정을 기하고 경제적으로 국제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당입"(唐入:중국 침입)을 통한 "체제변혁전쟁"(體制變革戰爭)을 구상하게 되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1세기 동안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나, 15세기말부터 정치의 실권을 가진 훈척(勳戚)과 중앙정계로 진출하던 사림(士林) 간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연이어 사화(士禍)가 발생했다. 1567년 선조(宣祖)의 즉위를 전후하여 사림정치가 확립되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혁신은 선조의 구신계(舊臣系)에 대한 비호와 내부 분열로 인해 정파정치(政派政治)의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심의겸(沈義謙) 문제로 인해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되고, 이어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계기로 동인에서 퇴계(退溪) 문하가 남인(南人)으로 분립하는 등 중앙정치세력의 알력 및 개편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권세가들의 경기도•황해도 지역의 해택(海澤)•노전(蘆田)의 강점, 군역의 포납화(布納化), 수령•유향소(留鄕所)를 통한 상납물의 강제 징수 등은 민심의 동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군제도 병농일치의 개병제 원칙이 붕괴되고, 각급 지휘관들이 군사의 입번(立番)을 면제해주고 대가를 받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군사는 기능을 상실하여 국방력이 약해졌다. 이에 대해 이이(李珥)는 초기의 군사제를 규정대로 운용하면서 10만 양병을 주장했는데, 선조의 미온적인 반응과 사림 내부의 뒷받침이 없어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 직전의 한일관계
도요토미는 규슈[九州] 정벌로 전국통일이 막바지에 이른 1587년에 중국 침입의 구체화를 위해 조선 내 사정에 정통했던 쓰시마 섬[對馬島] 도주(島主) 소[宗義調]에게 조선침략 방안을 의논했다. 이때 소가 우선 조선과 교섭할 것을 건의함에 따라,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가신인 다치바나[橘康廣]를 파견했다. 조선에서는 다치바나가 가져온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오만하다며 회답하기를 미루다가, 이듬해에 수로(水路)가 미매(迷昧)해서 통신사를 파견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새 쓰시마 섬 도주 소는 1588년 10월과 다음해 6월 다시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내한하여 공작과 조총을 바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을 파견했다. 그들은 교토[京都]에서 도요토미를 만나 답서를 받았는데, 답서에는 종래의 "예폐"(禮幣)가 "방물"(方物)로 바뀌어 있었으며 명나라를 침입한다는 "입대명"(入大明)의 구절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에 통신사가 시정을 요구하자 방물은 다시 예폐로 바꾸었으나, 입대명의 구절은 없애지 못했다. 이듬해 1월 귀국한 통신사들이 3월에 입경(入京)하여 일본의 조선 침입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서로 엇갈리게 보고함에 따라 조정의 견해도 양분되었고, 이에 일본침략에 대한 방비책의 논의가 유야무야되었다. 그해 4월 겐소 등이 다시 들어와 1년 후에 "명에 쳐들어갈 길을 빌리겠다"(假道入明)라고 통고하자, 조정에서는 이 내용을 명에 통보하고, 하삼도(下三道)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했는데, 몇 곳을 제외한 각 도에서는 오히려 일어나지 않을 왜란에 대비하여 민폐를 야기한다는 원성이 제기되는 등 별 성과가 없었다. 반면 도요토미 정권은 1591년부터 조선 침략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여 규슈•시코쿠[四國]•주고쿠[中國]의 다이묘들의 군대를 재편성했다. 도요토미는 그해 8월 침략일을 다음해 3월 1일로 정하고 나고야[名古屋]에 지휘본부를 건설하여 수륙군의 편성을 완료했다. 총15만 8,700명의 육군을 1~9번대로 편성하고 11만 8,300명을 후속 병력으로 잔류시켰다. 그중 선봉대로서 최전선 투입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주장(主將)으로 하는 제1번대 1만 8,700명,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번대 2만 2,800명,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번대 1만 1,000명 등 5만 2,500명의 병력을 편성했다.
일본의 침략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 1만 8,700명이 7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 섬의 오우라 항[大浦港]을 출항하여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 다음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군민과 더불어 항전했으나 전사했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그후 18일 가토의 후속부대가 부산에, 구로다의 제3번대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다. 4~5월에 걸쳐 제4~9번대에 이르는 후속부대가 상륙하여 수군병력 약 9,000명을 합해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총병력은 약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부산•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 북진을 계속했는데, 중로는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를,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을 거쳐 조령(鳥嶺)에서 만나 충주로 향하기로 했고, 우로는 김해-성주-지례-김천-추풍령의 길을 택해 경기도로 북상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임시변통으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해서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우로를 방어하게 했다. 그리고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륵(金 )을 좌도안집사로 삼아 민심 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했으며,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그러나 4월 24일 이일은 상주에서 대패하여 충주로 도망했고, 신립은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달천에 투신했다. 충주가 함락됨에 따라 일본군은 다시 여주-양근-용진나루와 죽산-용인-한강의 진로로 나뉘어 북상했고, 관군은 큰 전투도 1번 치르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났다. 조정은 일본군의 서울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았으나 충주 함락 소식을 듣고는 천도를 결정했다. 4월 30일 새벽 선조와 세자 광해군(光海君)은 평양으로 피난하고,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는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하게 했다. 그당시 서울의 민들은 경복궁•창덕궁과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掌隸院)•형조 등을 불질렀고, 개성의 민들은 왕의 실정을 비난하면서 왕의 행렬에 돌을 던지는 등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18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점령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고니시는 평안도, 가토는 함경도, 구로다는 황해도로 진격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수성부대와 하삼도 후방지역 담당부대를 나누었다. 5월 15일 김명원은 평안도 정병 3,000명으로 임진강에서 고니시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해 27일 일본군은 임진강 이북으로 북상했다. 그런데 이미 5월 12일 조정은 명에 원병을 청하기로 결정하고 이덕형(李德馨)을 청원사로 파견하는 한편, 우의정 윤두수(尹斗壽)와 유성룡의 "평양사수" 결의를 받아들여 윤두수•김명원•이원익(李元翼)에게 평양을 방어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니시군이 대동강 연안까지 북상하자, 조정은 다시 평양 사수를 포기하고 북행을 결정하게 됨에 따라 평양의 민들은 위정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에 격분했다. 6월 11일 선조는 평양을 떠나 숙주•안주•안변을 거쳐 박천에 이르러 군권을 광해군에게 넘겨주고 의주로 향했다. 6월 14일 평양이 함락되었고, 17일 가토군은 함경도까지 유린하고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부산 상륙 이후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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