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은 달라져 있었다.조선총독부 건물이 사라지고 경복궁은 원형대로복원되고 많은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역사의 장을 되돌아본다 조선 역사는 외침의 연속이다.경복궁은 불타면 다시 복원하고존경하는 세종대왕 과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이 민족의 수난이있을 때 마다 정기를 불어넣어 국가의 이념이 바로세워져 오늘과 같은 세계속 대한민국의 기상이 높게 빛나고 있었다.
사진 출처 (부산 박물관 소장)
전준천 제명첩 1760년(영조36년)에 실시된 청계천 준천공역(준설)을 성공적으로 완공 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일종의 기록화첩 공사는 이해 2월18일부터4월15일까지 두달간 시행한 이공사는 연인원20만명이 동원되고3만5천냥과 쌀2.300석이라는 그당시 어마어마한 대역사로 1773년에도 다시 이런 공사를 했다 한다
하늘도 맑고 잘 정비된 청계천 시작점으로 진입한다.인공폭포가 쏟아지고 시원하게 물줄기가 뻗어 나간다.
광통교 만나다 <태종실록> 1410년(태종 10년) 8월 8일자의 기사에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광통교(廣通橋)의 흙다리(土橋)가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貞陵)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石橋)를만드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것이 곧 정릉에 있던 석물이 청계천 광교(광통교) 아래로 옮겨지게 된 연유이다 이로부터 정릉 석물은 광통교의 석축을 이룬 상태로 무심히500여년 이상의 세월을 보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1902년 여름에 우리나라를 찾아온 일본 동경제국대학 건축과 교수인세키노 타다시(關野貞, 1867~1935)에 의해 이 광교 석물의 모습은사진으로 담겨지게 된다.이 사진은 1904년에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에도 실리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근대시기에 광교 석물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알려진 최초의 계기가 아닌가 싶다.하지만 그 당시 세키노는 이 석물의 정체 잘못 파악하였는지, 다소 엉뚱한 해석을 덧붙였다.
수표교 의 잔형들을 모은 복원 다리를 지난다 청계천의 역사적 사진이 전시된 곳을 지나게 된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정조대왕의 반차도 앞에서다.
우리가 어릴때부터 들어온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는 뒤주속에갇혀 죽었다는 말로서 쌀뒤주만 보면 사도세자의 생각이 났었다 차라리 귀향을 보낼 일이지!!! 친자를 그런식으로 사살했다는영조는 사실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 야사에 전언을 보면 노론의 힘으로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 했는데 사도세자의 부인혜경궁 홍씨는 소론이었고 사도세자도 소론을 따랐기 때문에사단이 난 것으로 된다. 역사를 배우게 되면서 듣게 되는게 영조의 탕평책 당쟁을 혁파하고 군역법을 실시 하게 된다.
영조에게 전수받은 탕평책은 정조의 정치이념이었고 효는 사도세자의 애절한 사연때문이었다 구파발이 개발되기전에 화원옆으로 비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영조가 어린 세손 이산을 데리고 서오능을 참배하고 환궁할 때 비석이 있는자리에서 쉬어간다.마침 고울수령이 소도둑을 잡아왔다.사연인즉 병든노모를 위한효행이 발단인지라 어명으로 방면하라 이른다.정조는 효를 깨닫게 된다... 그런식으로 영조는 정조를 직접 대화법과 현실참여교육을 통해 정조의 자질을 높혀 주었다 52년간 왕위에 있던 영조가 1776년 3월 5일 죽자 소렴과 대렴이 끝난 5일 후인 3월 10일 조선 22대 왕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25세였다. 왕위에 오르자 마자 정조가 내린 첫 교지는 바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28세로 숨을 거둔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불과 열 살 나이에 노론이 중심으로 일으킨 임인사화를 비판할 정도로 총명했던 사도세자는 진보주의자였으며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을 극도로 싫어했다.그리하여 한많은 한중록의 저자 어머니 혜빈홍씨를 모시고 화성의 아버지묘소 화성에 있는 현능원에 행차하게 되는데 규장각에 있는 반차도는 궁중화가 였던김홍도가 그린일종의 작업계획서로서 정조에게 보고한 내용들인데 이런 반차도 때문에 170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강을 도강하게 되고 질서 정연하게 참배할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물론 실학을 존중한 정조의 배려로 정약용 같은 인물들의 활약이 있었지만 규장각 도서를 보지못한 나는 청계천 변의 타일 조각화로 표현한 반차도를 흥미있게 올려볼까 한다.
인마와 갑마를 앞세우고 경기감사가 뒤따르고 있다.
의정 채재공이 임시직 총리대신 신분으로 앞장서 가고 있다
행차의 선두, 경기도 화성이므로 경기감사 서유방이 행렬의 선두에서 위풍당당하게 행렬을 인도하고 있다. <우> 정조가 타기로 되어 있는 어가가 등장, 가마는 말이 끌고 간다. 그러나 실제 정조는 이 어가에 타지 않았다.
용기
수라가자. 행차도중 임금이 먹을 음식을 실은 수레다.
내시들도 당당히 행진했다
자궁가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탄 가마. 이 행차의 주인공 혜경궁이 탄 가마 등장, 협련군과 근장군사 등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등장한다. <우> 정조가 탄 좌마가 30명의 협마무예청과 30명의 협마순노 등의 호위 아래 혜경궁 가마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이번 행차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 때문에 일부러 가마를 타지 않았다. 말 위에 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왕의 실제 형상을 그리지 않는 관례 때문이다.
군주쌍교. 정조의 두 누이동생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탄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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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은 디자인 서울의 글을 빌려온 것입니다정조대왕 원행 행차도는 섬세한 표현을통해일련의 행사진행 계획을 그려 눈으로 보는것 만으로도 행사가 가능하도록 묘사한 살아있는 계획도이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을묘년 1795년에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묘소인 현능원에 행차한 모습을 정리한 의궤로 이행차는 정조의 어머니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것이다
의궤그림 가운데 반차도란 그림이있다 반차도란 행사의 진행을 위한 일종의계획도이다 정조대왕 원행 반차도는 이의궤의 판각화로 삽입되어있는 기록화이다 목판인쇄본에는 채색하지 않았으나 실제의 행렬모습을 측면에서 재연하여 각인물의 표정과동작등에 변화를 줄수 있었다.이와같은 섬세한 표현은 자칫형식적이고 딱딱해지기 쉬운 기록화에 자유로운 기운을 불어넣고있다.
정조대왕 원행 반차도가 흑백으로된 목판본이라면 화성원행 반차도는 한지에 천연색 물감으로 채색하여그린 1폭짜리 두루마리 그림이다 (규장각소장) 두그림 모두 행사의 순서를 그린 반차도이기 때문에 그성이나 배치에 큰차이는 없다 하지만 이두루마리의 그림은 실제원행이전에 제작된 그림으로 도상을 통해미리 행렬을 연습하기위한 일종의 그림교본이다
따라서 그림 표현방법에도 배열의 순성와 위치를 정확하게 고지하기위하여뒤에서본 시점 (부분적으로 측면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세로방향에 맞춰저있다)으로 각요소를 순서대로 나열하여 전체행렬을 보여주고 있다.한강을 건너는데는 배를 타고 건너는것이 오랜 관행이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배다리를 놓는경우가 있었다 화성으로 행차할 때 가장어려운 일은 한강을 건너는일이었다 한강을 최소의경비로 안전하게 건너기위해서는 배다리를 놓는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처음에는 20일정도 예상했으나 불과11일만에 배다리가 완성되었다정조가 지시한대로 기술을 크게 보완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덕분이었다.한강에 단기간내에 최소의물자로 배다리가 건설된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이는조선시대 다리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자 우리과학기술의 한페지를 장식하는 사건이었다.
오방색 깃발을 나부끼는 배다리위로 1700명의행렬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모습을 상상하면 장관이 아닐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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