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미라 동굴 객실 방을 구성하고, S 모양의
통로를 가리기위한 270 미터.그림은 동굴의 깊은곳에 있 다.
알타미라(스페인어로 높은데보기)는 도면 및 야생 포유 동물들이
인간의 손에 컬러로 그려진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로 유명한
스페인 동굴이다
동굴은 산텐테르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지점 산텐테르의
도시 칸타부리아 스페인 안에 있는 산티 야나 델 마르의 마을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그 그림과 동굴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지구가 성경에 계산된 대로 기원전 4004년에 창조되었고 사람도
이 계산에 따라 6,000여년 전에 에덴동산에서 태어났다고 믿어온
유럽 사람들에게 인류의 조상이 짐승과 다름없이
살았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주었다.인류의 조상이 돌을 쪼개 만든
연모로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저며내며 동굴에서 살았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타미라의 대표작품
그림은 페인트 브러쉬로 그려졌다 페인트는 물.주스.동물의피. 흙. 숯. 및 적철광(산화철)
등의 혼합으로 만들어 졌다 브러쉬는 스틱.작은돌.나뭇잎.동물머리털.로 되어있다
스페인 북부 산탄테르에 사는 귀족 돈마르첼리노 상스 데 사우투울라 는
도르도뉴 동국을 발견한 피에의 영향을 받아 동굴을 찾아 나섰고 알타미라를 발견하게
되는데 1879년 여름 사우투울라는 열두살난 딸 마리아를 데리고 동굴을 찾았다
그가 동굴을 조사하는 동안 마리아는 혼자 굴안으로 돌아다녔다
아버지가 잠깐 땀을 들이려고 허리를 펴보니 딸이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여러곳을 찾아 헤메이다 마리아는 동굴안쪽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된다 사우투울라는 얼른 램프를 가져다가 밧줄에 매달아 밑으로 내려보냈다
그다음 자신이 아이를 구하러 내려갔다 그곳은 구덩이가 아니라 꽤 널찍한 굴이었다
천장 한귀퉁이가 무너져 내려 막혀 있엇기 때문에 발견 못했던 것이었다
그가 딸아이에 접근했을 때 아이는 큰 소리로 외처대었다
“아빠 보세요 소에요 소”
실로 기원전 14.000 년에 그려진 그림들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램프를 높이들고 확인하는 순간 그는 쉼이 멈춰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바위에 그려진 검붉은 들소 천장에는 커다란 들소 수십마리가
살아움직이듯이 꿈틀대고 있었다 모두 빨강.보라.검정 빛깔로 칠해져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멧돼지 3마리와 말2마리 이리1마리 빼고는 19마리의 들소였다
거의 바위의 곁을 그대로 살려 자연스럽게 그린 뛰어난 솜씨였다
동굴에는 벽화 말고도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제사드릴 때 썻던
막대기와 짐승 무뉘를 세긴 칼.뼈.부싯돌 부스러기 같은 선사시대
유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널려 있었다
1880년 사우투올라는 “알타미라”동굴에서 발견한 그림들을 옮겨 그려 책으로
펴냈다 책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알타마라를 찾아왔지만 사우투울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림들의 생동감으로 그려진 색채에서 그리고 입체적인 바위의 도드라지고
오목한 부분을 적절히 활용하여 들어간 곳과 나온 것이 동물의 대가리와 배 부분이
돼도록했으며 종종 갈라진 틈조차 그림의 한 부분으로 살려놓은 것을
“에밀 카르데이악” 이라는 학자는 하나 하나 예를 들며 설명을 겻들여 벽화들이
가짜라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이렇게 훌륭한 그림을 석기시대 사람이 그렸다니 게다가 몇일 전에 칠한 것처럼
빛깔이 뚜렷한데도 수만년전에 그렸다고 믿으란 말이요?“사람들을을 모두 바보로
만들 작정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억지를 불릴수 있단 말이요?“
학자들의 의견은 알타미라의 벽화들이 가짜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들은 사우투울라가 명예를 바라고 몰래 그림을 그려 놓았다고 믿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사우투울라는 그 누명을 벗을수가 없었다 진실은 20년이
지난 20세기에 밝혀졌다 프랑스의 유명한 고고학자 앙리 브뢰이으가 프랑스
맘서부와 피레네 산맥 동굴에서석기 시대 그림을 잇달아 발견했던 것이었다
앙리 브뢰이으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가 진짜 석기시대 것임을 밝히고 그 그림들이
그처럼 생생한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벽화는 매우 진지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므로 동굴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게다가 빙하시대부터 줄곳 땅속에 묻혀 있었으므로 바래거나 상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을수 있었다
동굴 벽화들이 진짜라고 밝혀짐에 따라,많은 학자들이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와
유물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알타미라 동굴 유적은,구석기시대 끝 무렵으로 학자들이 마들렌 문화라고
부르는 때의 것이다.이 문화를 꽃피운 사람들은 약 1만1,000∼1만7,000년
전에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살았다.그때 이곳에는 사슴·말·들소가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사람들은 한군데 머물러 살거나 짐승들을 따라 옮겨 다녔는데,
사냥감은 넉넉했다.
그들은 창·칼·덫 따위를 써서 사냥했고,동굴에서 살았다.그림과 조각이
많다는 사실은 바로 마들렌 사람들에게 (사냥감이 많아) 여가가
있었음을 뜻한다.브뢰이으는 그들이 사냥감을 많이 얻고자 하는 바람에서도
이 그림들을 그렸다고 추측했다.“그림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사냥하고자 하는
동물이며,그들은 그 동물을 향해 주문을 외움으로써 그것을 잡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아직껏 풀리지 않는 의문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식량이 되었던 사슴은
어째서 알타미라 동굴 그림에 거의 나오지 않는가.)그것을 그린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렸는가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알타미라 동굴의 그림은 그것이 지닌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마들렌 문화,일명 막달레니아
미술이라고 불리는 알타미라의 벽화가 뛰어난 것은,짐승들이 움직이는
순간을 잘 잡아 나타냄으로써 힘차고 살아 있는 느낌을 주며,넉넉하고
묵직한 느낌(量感)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그들은 또 현대인이 보아도
탄복하리 만큼 짙고 옅음과 밝고 어두움을 기막히게 조화시켜
입체감을 나타냈다.알타미라 동굴의 들소 그림이야말로 그 본보기이다.
알타미라 동굴은 오늘날 극소수 단체에만 관람이 허용된다.
길이가 270m나 되는 동굴의 맨끝
꼬리 부분은 네 발로 기어서 들어가야만 한다.입구에서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각(線刻)과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압권은 ‘그림의 거실’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바로 열두살 소녀 마리아가 “아빠,소예요!”라고 외쳤던 곳이다.
‘그림의 거실’ 천장에는 가로 18m,세로 9m에 동물 25마리가 그려져 있다.
멧돼지 3마리,말 2마리,이리 1마리를 빼놓고는 모두가 들소 그림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군집화가 들소 사냥이라는 목적에 따라 하나의
그림으로 구상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그림의 거실은
사람들이 천장 그림을 잘 볼 수 있도록 바닥을 낮게 파놓았다.
그림들에 쓰인 물감은 자연에서 얻은 황토·적철광·망간 따위다
. 적·갈·황·흑색이 쓰였는데,청색과
녹색은 보이지 않는다. 물감은 가루로 만들어서
거기에 동물 기름 따위를 섞어 쓴 것으로 보인다.
천장에 그림을 그릴 때에는 손가락과
나뭇가지,이끼뭉치나 깃털을 이용했을 것이다.
동굴에 대한 추가 발굴은 호아킨 곤살레스로 1924년에서1925년까지
독일의 휴고 1981년 1902-04년 Hermilio Alcalde의 델 리오에 의해 수행되었다.
과학자들은 알타미라의 동굴 미술의 나이를 평가하기 위해 연구를계속하였다.
2008 년, 우라늄 - 토륨 데이트를 사용하여 연구자들은 그림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최대 20,000년 아닌 기간에 걸쳐 완성 된 것으로 나타났다. 2012 년,
더 우라늄 - 토륨 연대 연구를위한 노년기를 지원 출판 되었음 3만5천6백년
이전에 하나의 claviform 이미지를 포함하여 예술의 부분이다
방문자 및 복제본 "도이체 박물관"에있는 알타미라 동굴의
복제는, 1960 년대와 1970 년대를 Munich.During, 그림은 방문자의
많은 수의 호흡에서 이산화탄소에 의해 손상되고 있었다. 알타미라
완전히 1977 년에 대중에게 폐쇄하고, 1982 년에 제한된 액세스에 재개했다.
거의 방문 관람자는 신청후 3년을 대기후 볼수 있었으나 복제 목록의
결과, 하루에 허용되었다.
복제 동굴과 박물관은 인근의 건설 동굴과 예술을 재현,
마누엘 Franquelo 스벤 Nebel에 의해 2001 년에 완성되었다.
복제 동굴의 메인 홀,뿐만 아니라 작은 작품의 선택의 색채 회화의보다
편안한 시야를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실제 동굴에 참관 할 수없는 인간의 얼굴의 일부
조각이 포함되어 있다.
라스코 동굴
Lascaux Cave & Sistine Chapel
라스코 (Lascaux의 동굴) (영어 / læskoʊ / 프랑스어 : [라스코] )의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로 유명한 프랑스 남서부에있는 동굴의 복잡한의 설정이다.
원래 동굴은 도르도 뉴 강 계곡의 부서에서, 몽 티냑의 마을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들은 가장 유명한 구석기 예술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이곳의 그림은 1만7천3백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주로 시간에이 지역에 살았던 화석 기록에서 알려진
대부분의 큰 동물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1979 년, 라스코는 베 제르 계곡의 다른 선사 시대의
사이트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추가되었다.
동굴의 벽화마들렌 사람들과 어깨를 견줄 만한 미술가는 프랑스 남서부에서
오리냐크 문화를 누린 사람들이다. 알타미라와 쌍벽을 이루는
동굴 미술이라고 일컬어지는 라스코 동굴 벽화는 오리냐크 사람들의
작품인데,이것 역시 어린 소년이 발견했다.1940년 9월12일,도르도뉴의
몽티냐크 마을. 마르셀(17세)·조르주(16)·
자크(15)·시몬(15) 네 소년이 베제르 골짜기에 있는 라스코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한군데 멈추어 서서 풀섶을 헤치고 지름 60㎝쯤 되는
구덩이 둘레를 파기 시작했다.
그 구덩이는 오래 전부터 근처의 옛 성으로 통하는 중세 시대의
비밀 통로일지도 모른다고 전해져 왔다.
소년들은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탐험’을
시도했던 것이다(1940년의 신문 보도와 선사미술 교과서에는
소년들이 수풀에서 놀다가 데리고 간 개가 구덩이에 빠지자 개를
구하려고 그 곳으로 내려갔다고 쓰여 있다. 이것은 그때 신문기자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고 그럴싸하게 꾸며낸 말이다).두
시간쯤 풀을 뽑고 입구를 넓히자 어두컴컴한 터널이 나타났다.
마르셀이 먼저 그리로 들어갔다.
그 뒤를 세 아이가 따랐다. 납작하게 엎드려 배를 땅에 깔고
기기를 10여m. 문득 꽤 넓은 동굴이 나타났다.소년들은 일어서서 걸었다.
마르셀이 높이 쳐든 램프 불빛이 굴 안을 훤히 비추었다.
천장은 꽤 높았고,갖가지 기괴한 돌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다
.“앗,말 좀 봐!”갑자기 시몬이 소리질렀다.“바보 같은 소리 말아. 이런 데 무슨…
.”마르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조르주가 소리쳤다.
“어,소랑 사슴도 있네!”라스코 동굴의 말 그림. 풀처럼 보이는
선이 작살인지 풀인지 알 수 없다.
작살이라면 말사냥이 성공하기를 기원한 ‘사냥주술’이다.네
소년 앞을 수많은 짐승들이 달리고 있었다.어떤 말은 앞발을 치켜들었고,
들소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덮칠 것 같았다.동굴 벽은 짐승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년들은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섰다.길은 점점 좁아지고,벽과
천장은 온통 그림투성이였다.100m쯤 나아간 그들은 바위가
무너진 곳에서 길이 막히자 되돌아 나왔다.
소년들은 이 일을 비밀에 부쳤다가 그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어른,즉
그들이 다니는 학교의 라발 교장에게 털어놓았고,교장은 즉시 손꼽히는
고고학자 브뢰이으에게 알렸다.브뢰이으가 면밀히
조사한 결과 벽화는 모두 800점이 넘었다.들소·말·사슴·염소 따위가 주로
그려져 있었는데 드문드문 고양이나 주술사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짐승들의 크기는 대체로 커서 주(主) 동굴에 그려진
검은 소는 가로 5m가 넘었다.
그림은 빨강·검정·노랑·갈색을 칠한 채색화가 많았지만,홈을 판
선각화(線刻畵)도 꽤 있었다.그림 중에는 여러 종류의 짐승이 겹친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짐승을 손쉽게 잡으려는 주술(呪術) 행위였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동굴 안은 주동굴(길이 15.5m,너비 9m)과 거기에 달린 갈래동굴(길이 30m,너비 0.5m),
갈래동굴에서 통로를 따라가다가 갈라진 뒷방(지름 4m),
가느다란 통로(길이 25m,너비 1∼3m) 그리고 땅밑으로 5m쯤
꺼진 우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타미라에 이어 라스코 동굴이 발견되자 동굴이야말로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만년 전까지 인류의 조상이 추위를 피해 살았던 곳임이 명백해졌다.
만년 전에 등진 고향을 찾아 관광객이 라스코로 몰려들자 몽티냐크
마을 사람들은 소년들이 파낸 구덩이를 넓혀 동굴을 공개했다.
라스코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한동안 잊혀졌으나,전쟁이
끝난 뒤 관광지로 개발되었다.소년들이 파낸 구덩이에서
좀 떨어진 곳에 현관과 계단이 만들어지고,전깃줄을 깔기 위해 굴이 파헤쳐졌다.
이 관광명소는 1948년 7월14일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에 문을 열었다.
선사고고학자들이 미처 발굴과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1963년이
되어서야 라스코는 벽화 보존을 위해 공개를 중지했다.그러나 이미 그
옛날 라스코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많은 도구들이 석수·전기기술자의
곡괭이와 관광객들의 발길에 짓밟혀 거의 사라져버린 뒤였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왜 그렸나
[어린이뉴스] 2003년 10월 09일 (목) 17:42
이렇게 잘 그린 그림이 과연 예술 작품인가?
그 당시 이미 예술가라는 전문직업인이 나타난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렸을까? 이 그림은 오로지 예술가의 감흥을 표현하기
위한 현대 예술과는 그 목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또 그것은 살림집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동굴을 장식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원시인들의 최대 관심사인 생존, 그리고 그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마련하는 목적을 위해 그려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그림은 동물 형태에 깃든 동물의 영혼을 제압하여 사냥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이 벽화에 그려진 것들은 동물하고도 양순한 초식동물이며,
그 동물들은 당시 원시인들이 사냥하기 만만한,
그래서 가장 좋은 먹거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그림을 어두컴컴하고 으슥한 동굴 안의
깊은 곳-부정 타지 않는다고 여기는-에
그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 벽화에는 창을 던진 흔적이 발견될 뿐 아니라,
동물의 머리를 한 사람이나 손, 발자국 , 기하학적
모양 등 설명하기 어려운 그림들도 있다. 이 모든 그림의 목적은 잡고
싶은 동물들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빌기 위한 것이다.
이글은 여러곳에서 모셔와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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