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여행기

카라칼라목욕탕 (유럽여행55부)

훼브스 2020. 7. 24. 16:45

 

 

 

 

 

 

 

콜로세움을 견학하면서 로마인들의 건축술을 생각하게된다

현대에 이르기 까지 인용되는 건축술에 감동할 때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에 승차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차창 밖으로 고색 찬란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것은 카라칼라 목욕탕 일꺼야 라고 혼자 중얼대고

있을때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저곳은 로마시대의 큰 목욕탕이라고 달리는 버스 창넘어

고적지는 어마어마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그냥달리고 있었다

간신히 정문인가 싶은 구조물만 촬영할수 있었다

로마 동로마 시대 터키 에페소에서 바리우스 목욕탕과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을 보며 로마인들이

얼마나 목욕하기를 좋아 했는가 를 느꼈었다

 

 

 

 

 

5만명을 수용하는 콜로세움 10만명을 수용하는 대전차경기장

1500명을 수용하는 카라칼라 목욕탕 이 모든 것은

검투나 전차경주를 벌리면서 백성들의 시선을 돌리게 하는

愚民政策 수단으로 활용되었다한다 현 로마에는 대중목욕탕이

전무한데 이것은 로마시대에 목욕문화의 퇴폐로 온갖 음란한

생활이 이어져 목욕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는 일설을 자조하기

때문인것 같다

 

 

 

 

 

상류사회 부유층들은 개인주택 마다 목욕시설이 되있었겠고

서민들 1500명이 한번에 이용할수 있는 대중탕에서 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우리들의 사우나실의 풍경 100명*15배

와 나체의 여인들이 물놀이 하는 풍경을 상상하면 재미있겠다

이 목욕탕을 지은 카라칼라 황제는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생을 죽인 폭군으로 유명하다

아래글 출처 :위키백과 

 

 

 

 

알마 타테마가 그린 카라칼라 황제

 

카라칼라 (186년 4월 4일 - 217년 4월 8일 )로마 제국의 제21대 황제이다. 카라칼라(Caracalla)란 이름이 아니라,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를 뜻하는 황제 자신의 별명이었다. 로마의 속주민들이 로마를 위해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동력이었고 로마인들이 자부심을 느꼈던 대상인 로마 시민권을 모든 속주민들에게 나눠준다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황제로 꼽힌다.

 

로마 제국의 황제로 198년 ~ 211년까지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공동 통치를 했다. 황제에 오른 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동생 게타와의 경쟁이 심했는데 211년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브리타니아 원정 중 잉글랜드 요크 지방에서 죽고 게타가 드디어 로마 제국의 2인자에서 1인자로 오르면서 경쟁이 더 심화되었다.

결국 아버지가 죽은 지 1년 만인 212년 2월에 카라칼라는 게타를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살해하고 단독 황제로 올랐다. 이때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해 모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과했으나 후에 로마의 재정 문제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213년 북부 지역을 순찰하며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성했고 215년 10만 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으나 볼로가세스 5세가 자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줌으로써 명분을 잃고 중단되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던 중 소요 사태를 진압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216년 볼로가세스가 아르타바누스에게 살해되자 다시 군사를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밀어붙였다. 이때 카라칼라가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원로원까지 반카라칼라 진영으로 돌변했다. 결국 217년 4월 이에 카라칼라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의심을 품은 병사들이 마크리누스에게 호소해 카라칼라는 자신을 경호하던 백인대장의 형을 죽인 것이 원인이 되어, 메소포타미아 카레 근처의 신전에서 암살당했다.

 

 

 

 

 

 

카라칼라 목욕탕 내부장식 용 그림

 

카라칼라 욕장 (이탈리아어 Terme di Caracalla) 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공중 목욕탕 유적을 말한다. 카라칼라 황제의 명령으로 212년부터 216년까지 지어졌다. 이 공중 목욕탕은 6세기까지 남아서 그대로 사용되다가, 고트 전쟁 중에 동고트족 군대가 공격하여 파괴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카라칼라 욕장의 디자인과 양식은 뉴욕 시의 펜실베이니아 역의 디자인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1960년 하계 올림픽 체조 종목의 공식 경기장으로 사용되었고, 2009년에는 카라칼라 욕장의 발굴 유적지가 2009년 라퀼라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1899년 알마 타데마가 그린 카라칼라 목욕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