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테온 신전 성당으로 가기위하여 버스로 이동하는데 판테온의
뒤편 코끼리 받침대에 세워진 재미있는 오벨리스크가 보였다
그리 넓지않은 미네르바 광장뒤로 있는 건축물이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이라 가이드가 설명하였다
미네르바(Minerva)는 그리스신화의 전쟁의여신이며
기예 예술기술과 학문을 관장했던 아테나(Athena)의
로마 신화의 명칭이다
이성당은 미네르바를 모셨던 건축물로 추정되는 신전을 성당으로
개조한 것인데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Basilica di Santa sopra Minerva)으로 캄푸스 마르티우스
지역의 미네르바 광장에 있으며 로마에서 유일한 고딕 양식 성당이자
도미코회에서 관리하는 성당가운데 으뜸가는 성당이다
이성덩은 수많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미네르바
여신이게 바친 신전이었던 장소 위에 건설한 까닭에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외관 이면에는 밝은 계통의 붉은색 서까래와
푸른색 금도금한 별들이 그려진 아치형의 둥근 천장이 있으며
19세기에 부흥한 고딕 양식이다 성당 건물은 피냐 구획의 판테온과
인접한 작은 미네르바 광장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조르다노 부르노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을 받은곳이라한다 기원전 170년 프틀레마이오스 시대부터
시작해 약1.500년 동안 보편적 진리로 여겨졌던 전통적인 우주관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창조적 파괴를 이루어 새로운 우주관을
탄생시킨 것이“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론이다
그러나 파괴당하는 입장에서 선 신학자들이나 추기경들의 저항이
대단했다 그들의 기득권을 상실할 충격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이를 신봉하던 조르다니 브르노
(Giordano Bruno1548-1600 2.17)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시키고 브르노는 1600년 화형에 처해지고
갈릴레이는 1633년 6월22일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교회
연회실에서 종교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이곳은 1600년 신념을 죽음 앞에서 굽히지 않았던 브루노가
화형에 처해지는언도를 받았던 장소였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 최종심문을 마친후 진술에서
죽음을 모면하기 위하여 자신이 주장했던 “지동설”을 철회하면서
신념과 다르게 허위 진술을 한다
“나는 내 이론을 믿지 않고 저주하며 경멸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태양이 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견해를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라 여긴다“ 그후 법정에서 나오며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는데
진실인지는 모르겠다“지구는 그래도 돈다”
갈릴레이가 겪었던 공포는 주로 지오다니 브루노를 떠올린 탓이었을
것이다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기 10년 전에 브르노는 지동설을 받아들여
도미니크 교단에들어가 사제가 된 사람으로 점차 카토릭 교리에 회의를
품고 유럽각국을 돌아다니며 카토릭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우주는
무한하며 神性은 전우주를 꿰뚫는 생명 즉 宇宙靈 이라고 해석하고 인간은
“영웅적 정렬“이 우주령의 영원한 활동과 본성을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는 범신론적 철학을 강의 했으며 이러한 주장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연관이있는 주장 이었다
1600년2월8일 지오다니 브루노가 사형 선고를 받는다
코페르니 쿠스도 갈릴레이도 진실앞에 두려워 하였던 것을
갖은 고문과 화형 당하면서 까지 신념을 지켜갔던 브루노는 그의 사형선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런 당당한 말을 남긴다
“화형대에 선 나보다 판결을 내리는 당신들이 더 공포에 떨고 있다 ”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처럼 신념을 굽힐줄 몰라 이단으로 밀고
당해 평생 쫒겨 다니고 투옥 당했던 그는 교황청에 마지막
감금을 당하게 되었다 7년동안 불로 온몸을 지지는 등 잔혹한
중세적 고문을 당했지만 믿음의 신념을 철회하지않았고 끝내 로마
광장에서 산채로 불태워졌다
여기서 생각나는 사건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에도 순조 신유박해 때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신념의
기독교인과 형.아우. 조카 들이 참형 당할 때 다산은 배교를 하고
조카사위 황사영을 밀고 능지처참을 당하게 하고 귀양을
가게되는 일면을 보게 된다 하지만 다산의
신념은 나름 이유가 있었을 터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종교 재판에서 화형을
당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는 화형당한 이탈리아 철학자 브루노와
혼동한 것으로 코페르니쿠스는 명대로 살았다 한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세상을 떠난 이후 고고학자들은
수 세기에 걸처 그의 유해를 찾으려 노력했다 한다 1807년 나폴레옹은
그의 무덤을 찾다가 실패하였고 폴란드 공산 정권은 정부와 교회의
관계가 껄끄러워 유해 찾기 작업이 순조롭지 않았다. 2005년8월
14세기에 건축된 플라우엔부르크 대성당 제단 아래를 파고 들어가자
여러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중에 코페르니쿠스의 것으로 보이는 아래턱이 없는
두개골과 다리뼈 등이 나왔다. 유골은 사망 당시
연령이 60 ~ 70세로 추정되었다. 부러진 코, 왼쪽 눈 위 흉터 등
두개골의 특징이 현존하는 코페르니쿠스 초상화에 나타난
모습과 일치하였다.
2008년 11월20일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유전학
전문가 마리 알렌은 기자회견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책에서 나온 두 가닥 머리카락의 DNA가,
그의 유해로 추정되는 뼈의 DNA와 일치한다'라고 밝혔다.
유해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아 아래턱 부분은 소실된 상태였다.
뼈의 상태를 조사한 결과 약 70세 가량 노인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는 코페르니쿠스가 죽었을 때의 나이와 일치한다.
2010년5월에 그의 장례식이 사후 거의 500년만에 폴란드에서
다시 치려졌다.
폴란드 국민과 고위성직자들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기리며,
최고의 예우를 하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교황청 추기경 위원회 로부터 심문을 받고 있는 갈릴레이(사진오른쪽 1857년작품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2월15일-16421월8일)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고 과학혁명의 주도자이다. 갈릴레오는 요하네스 케플러와 동시대 인물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고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계와 대립했다.
그의 업적으로는 망원경을 개량하여 관찰한 것, 운동법칙의 확립 등이 있으며,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여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고 태양 임을 믿었다.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자진하여 로마교황청 을
방문, 변명했으나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황금 측량자〉를 저술하여 지동설 을 고집하였으며,
〈천문학 대화〉를 검열을 받고 출판했으나 문제가 생겨 로마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갈릴레오는 결국 그의 지동설 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고,
그의 마지막 생애를 로마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가택에서 구류되어 보냈다.
그는 실험적인 검증에 의한 물리를 추구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의 물리학의 시작을 대개 갈릴레오의 것으로 본다. 또한, 진리의 추구를 위해 종교와 맞선 과학자의 상징적인 존재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종교계와의 대립과는 상관없이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런 대립도
자신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물리학 입문 과정에서 배우는 등가속 물체의 운동은 운동학으로서
갈릴레오에 의해 연구되었다. 그의 관측적 천문학의 업적은 금성의 위상과,
그를 기리기 위해 갈릴레이 위성 이라 불리는 목성 의 가장 큰 네 개 위성의 발견, 태양흑점의 관측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또한 나침반 디자인의 개량 등 과학과 기술에 기여하였다.
그의 최대 공적은 과학적 연구 방법으로써 보편적 수학적 법칙과 경험적 사실의 수량적 분석을 확립한 점에 있다고 평가되며, '근대관측천문학 의 아버지'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또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1683년 에스파냐 마드리드에서의 이단심문
종교재판(宗敎裁判) 또는 이단 심문(異端審問.Inquisitio)은 중세 이후로마가톨릭 에서 정통 신앙에 반하는 가르침(이단)을 전파하는
혐의를 받은 사람을 재판하기 위해 설치한 제도이다.
종교재판을 실시하는 시설은 ‘종교재판소’, 종교재판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종교재판관’이라고 부른다.
종교재판이라고 해도 중세 초기의 종교재판, 에스파냐 종교재판,
로마 종교재판, 이 세 가지로 분류되며
각각 시대 배경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덧붙여 마녀재판 (마녀사냥)은 종교재판의 형식을 일부
차용하고 있지만,
그 성격(이단은그리스도인 이지만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인 데 반해, 마녀나 마법사는 원래 그리스도 를 믿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르다)이나 실시된 지역과
시대에 현격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종교재판과는 별도의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의 코끼리 받침대 조각상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Giovanni Lorenzo Bernini.1598년 12월7일-1680년 11월28일)는 뛰어난 바로크 조각이자 17세기 로마의 건축가이다
코끼리상 뒤로보이는 판테온성당 돔
내부는 3층형식으로 우주를 나타내고 있는 진한 블루의 천정이 매우아름답다
금빛의 별과 성인들이 그려져있고 외관에서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넓은 공간으로
되어 있다 고딕 양식의 교회에 필수인 장미창도 정면 싱부에 있고 성모 마리아의
주의에 순결을 나타내는 흰 백합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끼워져있다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년 3월6일-1564년 2월18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다
미켈란젤로의 (부활한그리스도) 1519-20 대리석 높이 208cm 실제크기의 대담한 누드는
기독의 조각이라기 보다는 어찌보면 이교도의 것처럼 보입니다 .
그리스도의 몸 일부를 가린 천은 시신이 무덤에 안장되었을 때 덮었던 수의이다
수의는 지상에속한 것으로 승천하기 전 그리스도의 몸에서 막 미끄러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승천하기 위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데 이 조각이 제작된후 수백
년 동안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승천하기 전의 그리스도의 다리에 입을 맞추었다
미네르바 성당에 있는 (부활한 그리스도)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가장인기
없는 것에 속한다한다 그것은 미켈란젤로가 이조각상을 직접 마무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한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을 두차례에 걸처 제작하면서 정성을 들였습니다
1514년 6월14일에 그는 이미 벌거벗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조각상을 4년
이내에 제작하기로 계약을 하였다 그것을 의뢰한 고객인 베르나르도 첸치오 마리오
스카푸치 메텔로 모스카라는 그 작품을 상당의 본당에 설치된 제단 위에 놓을 예정
이었다 하지만 미케란젤로는 대리석을 깍던중 얼굴 부분에서 검은 암맥이 나오자 제작을 중단했으며 이후 산 로렌초 성당 작업 때문에 이조각상에 손을 대지못하고 있었다 이에 메텔로 바리가 수차례 편지를 보내 정황을 살피자 미케란젤로는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메텔로 바리에게 회신을 하지 못했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자네에게도 편지를 쓰고 싶지 않았네.본의 아니게 사기꾼으로 둔갑할까봐 참담하네” 이작품은 1521년3월에 로마로 운반되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장소가 성가대석의 왼쪽 기둥으로 옮겨져 그해 10월19일에야 설치되었다.
미켈란 젤로는 승천하기 전의 그리스도를 묘사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누드로 묘사한 이 작품은 관람자에 따라 상반되는 느낌을 준다.미켈란젤로 생전에 이 작품에
제목이 없었다 현재의 제목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잡은 모습이 전통적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와 닮았다고 해서 정해진 것이다
일부 학자는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가 하나도 없는 것은 바울의 관점을 좇아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으로 봐야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작품은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종교적 상징으로도 긍정적으로 인식되었다
“피에 디 마르모“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뒤쪽에 있는 고대 신전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의
발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톨레 마이오스
2000년전 프톨레 마이오스가 주장한 천동설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태양과행성.별등의 모든 천제가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설행성의 시운동은 천동설로도 설명이 잘되므로 천동설은 16세기까지 약1400년 동안믿어져 왔다수성과 금성은 지구 주위를 단순히 원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태양을 연결하는 직선위이 한 점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원(부전원)위를 돌아간다이 때 금성이 돌아 가는 원이 수성보다 훨씬 크므로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졌을 때의 각이 금성은 48。수성은24。가 된다화성.목성.토성.은 태양과 관계 없이 작은 원(부전원)을 그리며 큰원(주전원)위를 돌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384-322B.C)는 우주를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었다
지구를 중심으로 두고 달을 기준으로 지구와 가까운 공간을 “지상계”달 윗 공간을
“천상계”로 말이다 그에 따르면 두 세계는 각각을 이루는 물질부터 다른데 지상계는
흔히 볼수 있듯 불 물 흙 공기의 4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천상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테르로 차있다 두 세계에서 일어나는 운동도 차이가난다 아직 지구가 원형이라는
확실한 인식이 없을 적.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계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직선운동이
주를 이루고 천상계에 있는 천체들은 등속원 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며 지구를 비롯한 모든 행서이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설 16세기말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하고 브르노.갈릴레오갈릴레이 로 발전 뉴턴까지 이어진다
수성과 금성이 동서로 왔다갔다 하며 태양에서 일정한 각도 이상 멀어지지 앟는 것은 지동설로 설명이 잘된다
지동설로 설명한 화성의 시운동
위글은 위키백과 등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서유럽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 헬레나의석관(서유럽여행60부) (0) | 2020.07.24 |
---|---|
바티칸 시스티나성당의벽화(서유럽여행57부) (0) | 2020.07.24 |
카라칼라목욕탕 (유럽여행55부) (0) | 2020.07.24 |
트로이와라오콘 유럽여행54부 (0) | 2020.07.24 |
대영박물관의 말의신화 (서유럽여행53부) (0) | 2020.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