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nada 그라나다
2016년 7월17일요일
그라나다의 외곽 이사벨 여왕과 콤럼버스의
계약서가 보존되어 있는 성당이 있다는 근처에
숙소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라나다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근거지였다 1492년 이사벨 여왕에 의해
결국 함락 되었으며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을
아라곤왕국의 왕자였던 남편 페르난도와 함께
마무리하고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를 후원하여 스페인 최고의 성군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후 1453년 오스만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켜 지금은 이슬람국가 터키의 영토가 되어
있으니 이사벨여왕은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영웅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호텔에서 석식후
성당 견학을 하고자 안으로 들어갔더니
마침 일요일이라 미사를 드리고 있어 콜럼버스와
이사벨여왕의 계약서는 견학하지 못 했습니다
성당을 뒤로하고 그라나다 시를 산책하는데
더위를 피해 골목길에서 정담을 나누는 가족들
그리고 카페에 앉아 와인을 즐기는 노년의 신사들
을 볼수 있었는데 카페 노천엔 하몽이 놓여 있어
원하는 만큼 썰어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여 종업은
무척 재미있게 보였습니다.
스페인 식품점 카페 어디가나 하몽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라나다 변두리 뒷골목에서
본 노천 카페 거기서 하몽을 썰어
손님에게 제공하는 것을 옆에서
보게 됩니다
하몽은 스페인 전통 음식으로 돼지
뒷다리를 6개월에서 2년 정도 소금에 절인 후
숙성과 건조를 반복하여 만든 생햄입니다.
하몽은 소금에 절인 음식이라
굉장히 짠맛이 강해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주로 햄 그대로 샐러드나 샌드위치의
재료로써 먹습니다.
하몽은 크게 하얀 돼지로 만든
'하몽 세라노(Jamon Serrano)'와
검은 돼지로 만든
'하몽 이베리코(Jamon iberico)'로
구분되는데, 후자인 하몽 이베리코가
더 고급 종으로 분류된다 합니다.
하몽 이베리코 중에서도 사료를 먹였느냐
도토리를 먹였느냐에 따라 등급이 나뉘며,
이베리코 중에서 검은 발톱을 가진 돼지로
만들어 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진
'파타 네그라(pata negra)'가
최상급 하몽으로 여깁니다.
하몽은 돼지가공품 중 가장 값비싼 음식으로
스페인 전역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적게는 5~6유로(한화 6~7천원 선)면 맛볼 수 있으나,
이베리코 최고급 하몽은 7kg에 600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70~8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 합니다.
Isabel I de Castilla, 이사벨1세 여왕
이사벨라 1세는 30년간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이었으며,
남편 페르난도와 함께 스페인 통일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스페인 통일에 한 공헌,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 후원,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국토 회복 운동) 마무리 등을
이유로 이사벨라는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성군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위 그림에서 오른쪽 백마 탄사람이 이사벨 여왕이고
왼편의 검은 말을 탄 사람이 이스람 마지막 술탄 보아브딜
입니다 멀리 알람브라 궁전이 보이고 재미있게 보는 것은
검은말의 머리도 숙여 있습니다
거의 5백년 동안 남의 기독교 나라에서 이스람 통치를
해오던 사람과 5백년 동안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았던
두 인물 감회가 느껴 집니다
알함브라의 그 화려했던 영화를 접고 모로코로 돌아가는
마지막 술탄은 초라합니다
언제나 정의는 승자의 편입니다
Royal Chapel of Granada 그라나다의 왕실 예배당
남편과 함께 잠들어 있는 이사벨여왕
Tomb of the Catholic Monarchs, Royal Chapel of Granada,
made in 1517 by Domenico Fancelli.
가톨릭 군주의 무덤, 그라나다의 왕실 예배당, 도메니코 Fancelli에 의해 1517 년
이사벨 여와의 왕관
1492년 1월,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아직
남아있던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제압,
마침내 8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지었다.
당시 무슬림과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사벨은 전장을 누비는
남편을 위해 군자금과 물자 조달 등에 국력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 위업 덕분에 1496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칭송받은
두 사람은 가톨릭 공동왕(Los Reyes Católicos)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게 된다.
이후 이사벨은 ‘가톨릭교도 이사벨’(Isabel la Católica)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또한 이사벨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을 돕기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스페인에
해외 식민지 개척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치세를
스페인의 황금시대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수많은 모험가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어 그 곳으로부터
얻은 수많은 재물을 통해 스페인은 매우 부유해졌다.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사벨은 훗날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처사에 매우 마음 아파했다고 알려져 있다.
1504년 11월 26일 메디나델캄포에서 사망하였다.
그라나다 성당 앞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동상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스페인으로 갔다.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1.기사와 제독 작위
2.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
3.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
이라는 실현 가능성없는 조건을 제시하자 포르투갈에서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교회의
성직자들은 포르투갈교회에 대한 경쟁 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를 필요로 했고, 때문에 콜럼버스를 위해
여왕을 설득했다. 결국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퍼센트(%)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선박 2척(핀타호와 니나호)을 내주고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으며, 또 팔로스항(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 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계약 후에도 이사벨 여왕이 계속 지원을 미뤘기 때문에,
실질적인 항해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나 되었다.
(당시 콜럼버스의나이는 39세였다)
위키백과)
알함브라 궁전 구시가지 중심가 플라자 누에바. 그라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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