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여행

프라도 미술관 명화(스페인여행12부)

훼브스 2020. 7. 25. 15:06

 

 

 

 

 

프라도 미술관(스페인어:Museo del Prado) 정면

 

 

 

 

 

프라도 미술관(스페인어:Museo del Prado) 옆면

 

프라도 박물관은 까롤로스 3세 시대인 1785년 "환데 비아누에바"라는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당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원래 이건물은 식물원 가까이에 자연과학연구소 용도로 세워진 건물이었다

1808 반 나폴레옹 독립전쟁기간 많은 부분이 소실되는 불운을 격었으나

페르난도7세의 명령에 의해 복구되었다

1819년 왕립 미술박물관으로 거듭태어나게 되는데

박물관은 회화 삽화 조각등 5.000여점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세계적 미술 박물관으로서 중세부터 18세기 말까지 모든 미술 학파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고야의 동상 앞에서

 

 

주변건물

 

 

 

내부 배치도

 

 

 

 

 

그림 안내 카달로그

 

 

 

내부 전시실

 

내부 조각 전시실

 

"사진들은 외국 포털에서 퍼왔습니다"

 

2016719

이날은 06시에 기상 07시 식사 08시에 숙소에서 출발

하게 되는데 이유는 조금 늦어 관람객이 많을 때는

그림 감상이 제대로 될수 없다는 가이드의 조언 때문이다

 

프라도 미술관을 가기 위하여 미술관 입구에 도착 하였는데

관람인파는 끝도없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기다려 표를 구입하고 들어가는 줄 알고 걱정이 되었으나

미리 구입해 놓은 입장권과 현지 로칼 가이드의 안내로

우선 입장하게 되었다 입장전에 가이드의 몇 번의 주의사항은

그림을 찍다가 걸리면 먼저 여행때 찍은 사진도 모두 삭제

시킨다며 촬영 불가를 몇 번 주지 시켰다

 

정문앞과 옆으로 고야의 청동상이

있었다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고야의 작품들을

교과서에서 많이 접하여 친숙한 그림들이다

백과사전을 빌어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것은

프라도 미술관은 고야 작품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프란쓰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데스 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또한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로서 특히 고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세르반테스와 함께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으며

파괴적이며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 터치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신사(엘그레꼬)

 

엘 그레꼬가 남긴 초상화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16세기 스페인 신사의 모델을 창조해냈다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검을 쥐고 있는 모습은

기사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의식에서 맹세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섬세하게 묘사된 금색의 칼자루와 레이스 장식은

작가의 뛰어난 테크닉을 보여준다

1541-1614년 엘그레꼬의 본명은 도미니코스데오토콜로스

이다 이름에서 느낄수 있지만 그는 그레타섬의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난 그리스 사람이다

그리스에서 태어나 당시 유럽대륙의 끝자락인 스페인으로

건너와 톨레도에 정착하여 죽을 때까지 살았다

엘그레꼬라는 이름도 그리스인 이라는 말이다

 

 

벨라스께스의 시녀들 Las Meninas

 

시녀들(Las Meninas, The Maids of Honour)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스페인 예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화풍은 어느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물 사이의 관계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복잡함으로 인해,

이 작품은 가장 많이 연구된 서양화 작품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 작품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궁전에 있는

큰 방을 그린 것이며, 스페인 왕실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들을

마치 스냅샷 사진을 찍은 것처럼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몇몇 인물들은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다른 몇몇 인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작을 진행하고 있다.

어린 마르가리타 왕녀를

담당하는 시녀들, 샤프롱, 호위병, 그리고

두 명의 난장이가 에워싸고 있다.

 

 

그들 바로 뒤에, 벨라스케스 자신이 큰 캔버스에 작업 중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벨라스케스는

작품 내부의 공간을 넘어 이 그림을 감상할 누군가가

자리할 캔버스 밖 저편을 바라보고 있다. 배경에는

거울이 걸려 있으며, 거울 속에는 왕과 왕비의 상반신이 보인다.

이 왕과 왕비는 감상자와 마찬가지로 작품 내부가 아닌

바깥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왕과 왕비의 모습이 그림 속에서 벨라스케스가 캔버스에

작업 중인 그림 속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 루카 지오다노는

이 작품을 가리켜 '회화의 신학'이라고 표현했으며,

19세기 토마스 로런스 경은 이 작품을 '예술의 철학'이라고 일컬었다.

최근에는 "회화로서 무엇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자신감있고

치밀하게 표현한 벨라스케스의 걸작이며, 이젤을 사용한 회화

방식이 가진 가능성을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위키백과)

 

 

 

벨라스께스 (불카노의 대장간 La Pragua de Vulcano)

 

 

 

벨라스께스 (브레다의 항복 La Rendición de Breda)

 

브레다 성의 항복, The Surrender of Breda[편집]

 

왕의 별궁의 여러 왕국의 사이라는 큰 홀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전승화(戰勝畵). 1625, 네덜란드 남부의 요새 브레다에

대한 스페인군의 승리를 기념하여 제작한 것으로,

 패배한 브레다 수비대 지휘관 유스티누스 (오라녜 공 빌럼 1세의 서자)

 승자인 스페인측의 총사령관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에게

성문의 열쇠를 넘겨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런 종류의

 전승화에서는 패군의 장군은 지면에 무릎을 꿇고 승자는

그것을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가 보통이지만,

브레다 성의 항복은 패자 유스티누스와 승자 스피놀라는

같은 지면에서 대등한 위치에 서있다.

 

온화한 표정인 스피놀라는, 마치 오래 사귄 친구를

대하듯이 패자 유스티누스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스피놀라의 옆에 크게 그려진 말은, 그가 패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부러 말에서 내린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같은 승자 쪽의 관대함을 이중 삼중으로 강조한

표현은 패자의 명예있는 철퇴를 용서한 스페인의

기사도정신의 승리를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백과사전)

 

 

 

 

고야 (까롤로스4세가족 Familia de Carlos )

 

위 그림은 카를로스 4세가 궁정화가인 프란치스코 고야에게

그리도록 명령한 그림이다.
혁명의 불길 속에서도 부르봉 왕가는 건재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의미를 담기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고야는 이 작품을

비꼬는 의미를 담아서 그렸다. 가령 왕은 중심부에서 물러나 있고

왕비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왕비가

왕 대신 왕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었고

왕비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천박하게 그려진 반면에 왕은

무기력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사족을 하나 더 달자면 이 그림은 뒷날 한 미술평론가에게

복권에 당첨된 빵장수의 가족 같다는 평가를 얻었다.

 

 

노히르 반 베이덴

(십자가에서 내려오심 Descendimiento de la cruz)

 

 

프라이 안젤리코(수태고지 Anunciación)

 

 

고야 (옷입은 마야 dressed in Maya)

 

 

고야 (옷벗은 마야 clothes the naked Maya)

 

 

낭만파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화가로서는

드물게 종교재판을 받게 됩니다

중세 고야가 활동하던 시기엔 보수적이며

봉건적인 사상이 세상을 지배하였는데

당시 누드화는 금기 사항이 었다

실물크기의 체모까지 그려진 누드화는 지금으로

치면 포르노 춘화쯤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니

교회의 지도자들은 외설이라 하여 전시를 못하게

하여 고야는 다시 옷입은 마야를 그렸다

불행이도 두 그림 다 전시하지 못하였고

고야는 살아 생전에 자신이 그린 마야 그림 전시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스페인 정부는 압수하였다가 고야가 세상을 떠난 3년후

1936년에 유족들에게 돌려 주었으나 지금은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중이었다 이 그림은 너무나 유명하여

직접 감상하니 감개무량 하였다

고야의 옷벗은 마야는 신성모독으로 취급받았다

옷을 벗은 마야는 신화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하는 여성을 그렸다는 것으로 당시의 성향으로

볼 때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림의 사이즈는 98×18.1cm이며 캔버스에 유화로

1797-1800년에 그려졌다고 한다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며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이 당당한 포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모델은 미누엘 데 고도이 스페인 수상의 소실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알바 공작부인 이라고도 하며 고야의

부인이 아닌 애인 이었다는 여러 추측이 많다

 

 

 

카라바조(다윗과 골리앗 Caravaggio David and Goliath)

 

소년 다비드(다윗)가 플리셋 거인 장수 골리앗 의

이마를 돌팔매로 가격해 죽이고 머리를 베는 그림이다

구약 사무엘서 17장 구절을 형상화 한 것이다

바로크시대 대표적 이탈리아 작가 카라바조의 작품이다

충격적인 것은 플리셋을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틴토레토(세족식 Tintoretto maundy)

 

이 그림 앞에서 가이드는 방향을 바꿔가며 감상 시켰는데

과연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듯 방향에 따라 변하는 듯

하였다 정말 신기 하였다

틴토레토는 티치아노의 제자였으나 대를 이어가는과정에서는

베로네세에게 밀린다

아무래도 틴토레토는 군주의 화가였던 티치아노의 마음에

들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엘 그레꼬에게 영향을 주는 화가였다

이그림은 틴토레토가 젊었을 때 베네치아 산마르코 교회를

위해 그린 그림인데 벽면에 붙여 놓았을 때 바라보는

신도들이 자신의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했다는 독특함이

있는 그림이다 

 

 

루벤스(삼미신 Three Graces Rubens)

 

 

프라도 미술관 소장인 이 그림은 명품중 명품이다

단순한 화면 구성속에 루벤스의 모든 역향이 주입되어 있다

주제는 이미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자주 다루어졌던 것이고

그림의 수법은 르네상스 붓티첼리와 라파엘등에 의해

이상화하고 미화한 형상의 계승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체의 아름다움이 한층 내적인 충만감을

수반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스 (광녀 후아나 Museo del Prado Joanna the Mad)

 

이사벨여왕의 3째 딸로 남편인 펠리페1세의 죽음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단지 잠이들었다고 믿었다

남편의 시신이 들어가 있는 관을 마차에 싣고

수도원을 돌아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녀를 광녀후안나라 불렀다 한다

스페인 역사에서 후아나는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인물이다 이그림 덕분인데 1877년 그려진 이그림은

역사회 장르에 속하는데 당시에는 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한다 하지만 인상주의가 등장하고 근대회화가

탄생하면서 이 아카데믹한 쌀롱회화는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970년대 이후에야 비로서 이작품이 미술사가

들의 주목을 받게되었고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엘 그레꼬 (삼위일체 Trinity)

 

엘 그레꼬는 스페인 여행에서 자주 접하였다

엘 그레꼬는 수직으로 길쭉하고 마치 살아움직이는 듯한

역동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화가로 유명합니다

삼위일체는 성령과 성부 성자로 이어지는 수직구도와

성부와 성자를 둘러싸고 있는 하늘의 천사들을 수평으로

수평으로 배치한 구도로 그려져 있다

이그림은 그토록 사랑하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아드님을 당신의 품에

끌어안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성부의 모습을 담았다 

 

 

 

고야 (몽끌로아의총살 Los Fusilmientos de Moncloa)

 

180853일 새벽 이곳은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프린시페 피오

언덕이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는 총성이 울려 퍼지고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시체가 쌓여간다 이것은 하루전 52

마드리드 시민봉기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점령군의 살육아었다

 

이그림 앞에서 가이드는 전쟁의 참상으로 이후 고야의 그림은

정신이 흐려져 그림부터가 달라진다 하였다

 

 

반도 전쟁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했다

스페인 전역은 프랑스군에 의해 학살과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전쟁의 참상을 그림으로

고발했다

판화집 전쟁의재난을 제작하는데 전쟁을 기록한 이판화는

연작으로 프랑스 군인의 만행을 기록함과 동시에 스페인

부역자 프랑스에 협력한 자국민들의 처형 장면도 똑같이

기록화로 남겼다

 

 

 

 

 

 

 

 

 

 

 

 

 

 

전쟁이 끝나고 스페인 왕정이 복귀하였으나 고야는 이미

왕가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외딴 집으로 들어간 고야는 퀸타 델 소르도에서 검은 그림의

연작을 남겼다

이그림들 속에서 그는 이성이라는 이름뒤에 숨겨진 광기를

묘사하였다 그림들 가운데 자식을 삼키는 사트루누스

가 있다

 

 

고야(시투르누스 satureunuseu)

 

그리스 신화의 주신 제우스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사투르누스)가 있는데 그는

제 아버지 성기를 자르고 자식을 잡아먹는 충격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여러 작품의 소재였다

궁중화가 였던 그가 어쩌다가 이렇게 험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시간의 제약으로 몇몇 중요 그림만 감상하고 출구로 나오니

아쉬움에 한쉼만 나왔다

이렇게 좋은날 이런 진품 명화를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이 소장품들은 스페인의 함스부르크가와 부르봉가의 군주들이

수집한 미술품으로 이루어졌다 펠리페2(1556-98재위)

는 카롤로스5(1516-56 재위)의 소장품을 확장했는데

이두왕 모두 치치아노 의 중요한 후원자였다 한다

펠리페 4(1621-65재위)는그의 궁정화가인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시켜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구입해

오도록 함으로서 왕궁의 소장품들을 더욱늘렸다

펠리페5(1700-46 재위)는 여기에 프랑스의 바로크 작품을

덧붙였으며 페르난도7세는 새로지은 프라도 미술관에

여러왕의 수집품들(에스코리알에 있느것들은 제외) 중에서

회화를 전부 모았다

1872년 예전에 스페인의 수녀원과 수도원들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중요 작품들도 미술관으로 넘어왔다

환상적인 그림감상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