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진시황능과 지하궁전 시안(중국여행57부)

훼브스 2020. 8. 1. 13:29

 

 

 

 

 

 

 

 

 

1진시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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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스클럽 일행은 병마용갱을 나와 진시황릉에왔다

진시황의 명성에 맞지않게 볼것이 너무없다

여기서부터 1.5km 떨어져 있는 병마용갱 까지

무덤은 이어졌으니 건설 당시 얼마나 거창하였을까

상상을 해보았다

 

진시황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는 기원전 259년에 태어나고

13세 때 이미 왕이 되었으며 기원전 250년 주나라를 멸망시켜

합병시키고 아버지 장양왕때부터 통일과업이 시작되었고

기원전 230부터 시황제는 통일을 위한 양병을 하여 221년엔

마지막 남은 제나라 까지 멸망시켜 시황제 나이 40세에 전

중국땅을 마침내 통일 시켰다 여기서는 그의 공과를 논하기

보다는 그 어머 어마한 지하궁전 파수꾼 병마용갱 과 상상을

초월하는 무덤속의 규모를 어찌 건설하였을까?

 

 

 

 

 

어느날 시황제는 낭아산에 행차하였다 시황제는 그 풍경이

맘에들어 3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갑자기 그곳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한 섬이 갑자기 나타나자마자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오늘날의 신기루라고 추정) 그후 어느날 제(산동선)

살고있는 서북이라는 방사가 시황제가 보았던 섬은 전설상의

봉래산 이었다고 주장하고는 봉애산에서 불로불사약을 구해오겠다

고 했다 서북이 갈 배에는 수많은 보물과 소년소녀 3000명이

실어졌다 그리고 서북은 떠났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북의 행로는 일본으로 가서 정착하였다는 설이 있다

시황제가 불로불사약을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기에 각지에서

사기꾼까지 몰려들어 어디가면 구할수 있다던지 아니면 자기가

불로불사의 기도를 올릴수 있다 하여 돈을 뜯어 갔다

드디어 시황제는 소득이 없는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까지

만들었다 시황제는 불로불사약 인줄로 알고 먹고 자신의 생명

까지 위축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수은이다 결국 시황제는

불로불사를 꿈꾸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 까지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진시황 순행 마차 생각보다 정교하다

1호차는 3064개의 부품 2호마차는 3462개의 부속으로

만들어 졌다 하니 얼마나 정교한지 알수 있을 것 같다

 

 

2.진시황 무덤 지하궁전 시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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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스클럽은 진시황 지하궁전 축소 모형궁전에 왔다

실제 무덤은 기록상 수은의 강을 만들어놓고 유물들이 상할

우려가 있어 발굴 할수 없어 X선 투시 촬영으로 모형을 본떠

몇백배로 축소 하여 만들어 놓았다 한다

 

진시황은 13살에 즉위한후 즉시 여산에 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며 6국을 통일한 후에는 각지로부터 1

0여만명을 징집하여 능을 계속 건설하게 하여 생을

마감할때까지 도합 37년을 건설하였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진시황능은 샘 밑을 판후 구리를 녹여

구리물을 부어 견고히 하였다. 묘의 궁전에는 궁전루각과

문무백관을 만나는 곳을 건설하였으며 진귀한

보물들을 가득 놓았다.

도적을 막기 위하여 묘실내부에는 일촉즉발이 되는

쇠뇌를 설치하였다.

묘실 천정에는 보석과 명주를 장식하여 천체의 별들을

상징하였고 바닥에는 백종(百種), 오악(五岳),

구주(九州)의 지리형태를 만들어 놓고 기계로 수은을 부어

흐르는 강과 하천을 상징하였으며 수은위에는 금으로 만든

꿩을 띄웠고 묘실 내에는 고래 기름으로 만든

장명등(長明燈)”을 켰다. 능 주위에는 거대한

병마용 진을 배치하였다 능의 설계는 곳곳에서 시황제의

지고지상한 권력과 위엄을 보여주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사구평대(沙丘平臺)[오늘의 하북성

평향(平鄕) 돌연 숨을 거두었다. 유체는 진시황제

사후 2개월만에 함양에 옮겨져 장례를 치루었다.

시신을 묻을 때 진2세 호해(胡亥)가 진시황의 궁녀는

전부 순장하며 능을 건설한 공예가들도 일률로 묘속에

순장하라는 명을 내렸다.

한서(漢書)”수경주(水經注)”의 기재에 따르면

기원전 206년에 항우(項羽)가 진시황 능을 파헤쳤다.

북위(北魏)의 려도원(郦道元)수경주에서 함양에

들어온후 항우가 30만명을 파견하여 30일간 진시황 능의

물건을 옮겼으나 끝내는 다 옮기지 못하였 고

그후 관동(關東) 도적들이 또 구리관을 훔쳐갔으며

양치는 사람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홰불을 들고

묘혈에 들어갔다가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한데서 능이

철처히 소각됐으며 큰 불은 연속 90일간 타올랐으나

꺼지지 않았다고 썼다. 이는 또한 현재 가장 널리

유행되는 설법이기도 하다.

 

 

 

 

 

진시황릉에 대하여 사마천의 사기는 진시황이

340만명의 인부를 동원해

기원전 246년에 건축되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진황릉이 완공된후 6세기기가 지난때에 저술된 서사시이다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릉은 지상의 황릉을 그대로 지하로 옮긴 것과 같은 규모이며

수은이 흐르는 5.000여개의 강과 수십개의 망루를 가진 도성 안의 온갖 보물과

병사로 화려하게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진시황릉은 지상 궁전을 재현한다는 개념으로 지어졌으며 완공된 후에는 도굴을

막기위해 동원되었던 인부들을 모두 사살하였다한다 200319일 진시황릉의

부장릉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병마용 뿐만 아니라 실제 황궁을 재현한 것임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최근 조사 결과 병마용갱 부근의 리산에 토양이 많은 수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곳이 바로 진시황릉이 조성된 곳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자면 진시황릉은 높이 76m 넓이 350에 이르는 흙으로 조성된

거대한 피라미드인 것이다 리산에 대한 발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7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원격 탐지 장치를 이용하여

내부에 벽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