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애절한 공녀들의한(남한산성2부)

훼브스 2020. 8. 1. 14:33

1차 남한산성은 2011년 3월27일 춘성군 부부와 함께 했을때

진달래 꽃피는 계절에 다시오자 하여

 

오늘 2011년 4월 24일 안박사부부가 합세하여

3쌍이 8호선 산성역에서 미팅 9-1번 버스 타고 가는데

굽이굽이도는 산성도로 넘어 벗꽃과 빨간 복사꽃이 줄지어 피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산성의 봄은 잊지못할 비운의 역사를 기록한 한많은 곳이다

 

남한산성내에 하차

1차때는 시계 방향 남문서부터 돌았지만 오늘은 그반대 방향으로 들어서다.

 

정조 1788년에 세워졌고 완전 붕괴 위치마저 찾기 힘들었던 행궁 정문을

원형복원시켜 2011년4월중 일반에 공개된다 하는 한남루를 지나

 

 

 

 

17세기 남한산성지도

 

 

한남루(漢南樓)는 1798년(정조22) 행궁의 정문으로 신축됐으나

1909년 이전에 이미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조사단은 프랑스 외교관 프랑뎅이 1890년대에 찍은 한남루 사진이 남아 있어

복원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의 복원된 행궁 정문 한남루

 

 

옛 무기제작소라 불리우는 침괘정 을 지나

침과정은 1972년5월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백제 온조왕과 병자호란때 이서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렬전을 지나 는데

 

 

 

 

 

숭렬전 직전의 약수터

 

 

 

 

 

이서장군(1580-1637선조13-인조15)은 선조1603년 무과에 급제한뒤 진도군수

경기도 방어사 를 지내다

김유 이귀등과 인조반정 군사구테타를일으켜 광해를 내치고 인조를 세워

정사공신1등으로 완풍부원군에 봉되고 호조판서에 기용되었다.

 

28년 병조판서 32년엔 특명 공조판서가되어 청의 침입에 대비하다

병자호란때 적군 대치상황에 병사하였다

 

인조가 아끼는 신하와 꿈에본 온조왕을 함께 모신 숭렬전엔 매년광주 시장이

초헌관이 되어 음력 9월5일에 거행되는 "숭렬전 제향" 제례를 지낸다한다

 

숭렬전 제향 모습(사진출처 광주시 홈피)

 

원래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 왕이 ‘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려 이때

 

 

 

 

부터 숭렬전으로 불린다.

 

 

 

 

 

 

 

 

 

현장학습나온 학생들이 선생님의 강의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다

 

숭렬전을 지나 아늑한 곳에서 간식과 커피한잔씩 나누는데 우리가 건강할때

열심히 다니자 하는데 모두 의기투합하다

 

숲길을 걷는데 바람과 나무향과 우정있는 대화가 있으니 무었이 부족하랴??

 

 

 

 

 

 

 

 

청설모 한쌍이 사랑을 하는데 애석하게도 그모습을 담지 못했다

 

산성 으로 나가기전 큰소나무 사이로 청설모 두마리가 양쪽 나무를 비상하며 나무아래위로

돌아다니다가 얼마나 빠르게 둘이 잼있게 노는지 한참을 보고있는데 안박사 어부인께서

 

"저놈들 다죽여야돼 토종 다람쥐도 다잡아먹고

잦이며 호도같은 것도 남아나질 안는대요!"하였다

그러고 보니 안박사 부부의 고향이 호도과자의 고장 천안 이었다

 

외래종 남방 청설모는 60년대 부터 원목수입 할때 속에 있다가 우리나라에 상육하였는데

영역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자기 구역의 다람쥐는 모두 죽여버린다 한다

 

귀엽고 앙징맞은 토속 다람쥐는 점점 볼수가 없을것이다 그나마 깊은 산에서 만나는

우리의 귀염둥이 다람쥐는 청설모에게 모두 죽어간다니 참 아쉽다..

 

 

평보가 석룡산에서 찍은 우리의 다람쥐 입니다

관촌이 관악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숲에서 나와 산성길에서다 자연석에 새겨진 비문이 있는데 흥미러워

안내입간판을 보니 과연 그해설이 이러하다

 

병암남성신수비는 정조 3년 1779 6월 18일 부터약

50여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응의 지휘아래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금석문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산성을 증, 개측하는데 돈1만냥과 쌀 900석의 재정을 투입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아래 벽돌, 석회 등을 구어 운반하는 관리와 보수할 곳을 18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패장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으로 보아 선조들의 건축실명제의 한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이다.

 

정조는 즉위 후 영릉을 참배하는 길에 자주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산성의 관리실태와 주민들의 생활상 등 민의를 살핀 개혁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동문밖에 있는 기해주필이 그 사실을 잘 반증해 주고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수어사였던 서명응이 짓고, 광주부윤 이명중이 쓴 것이다.

 

 

 

 

 

 

 

주위에 제비꽃 양지꽃 현호색 별꽃 들이 봄을 노래한다

 

휜제비꽃자주 제비꽃

 

별꽃양지꽃

 

 

 

 

수어장대로 향한다

성곽길을 걷는데 여성분들이 남한산성 예찬논이 끝이없다

 

남성들은 성곽의 활용성에 대하여 실제 활을 당겨 보는 시늉하며

투석도 해보는 모션 ㅁ구로 정찰과 사격위치를 해보았으나 옛 전투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매바위

 

 

매바위 안내문을 살피다가 안박사가 하는 말은 그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잘되는 꼴을 못본 다니까..

 

 

선조는 그난리통에도 충무공을 잡아올리니 !!

 

 

 

 

 

이어 교직에 있었던 춘성이

 

 

어디 충무공 뿐이겠는가 홍의장군 곽재우도 반란을

 

 

우려해 귀양보내지 않았나 그당시야 언론이 있나 뭐있나

 

 

 

그저 우리의 역사는 붕당이 원흉일세 이분 이회장군은

 

 

애써 성을 축조 했는데 죄없이 참수형을 당했으니 한이 많았겠지

 

 

때 맞춰 매가 내려와 결백을 증명해 주었으니 억울한 영혼은 편안해 졌을꺼야..

 

이승만의 기념식수

 

수어장대 

 

무망루

 

 

인조가 군사들을 지휘했던 수어장대 인조와 북벌의 꿈을 실연시키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고 세운 무망루를 보면서 나라가

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한 공녀(인간 진상)들이 생각난다.

 

壬辰倭亂은 7년씩이나 처절한 사투를 벌려 물리친 반면 丙子胡亂은

1년만에 치욕적인 항복을 한다 그까닦을 말한다면

이괄의 난부터 시작된다

 

 

 

인조반정 군사쿠테타의 주역

이귀.이괄 김자점등이

세검정에서 칼을 갈고 모의하여

창의문을 부수고 들어가 광해를 내친 장소 洗劍亭

세검정이란 지명은 이에 유래했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 영조-정조 부친 이광사가 당쟁으로 사사 되어 그배경으로 평생

 

과거를 포기 야인으로살았다)은 조선후기 역사가 인데 練藜室記述를 저술하였다

 

삼성출판사 이민수역에 보면(연려실기술 제24권 인조조 고사본말 仁祖朝故事本末)

 

이괄은 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으로 무과에 합격 글또한 잘하여

명성이 있었다.

 

계해년 (1623)에 북병사(北兵使)로 임명되 부임전에 김류 이귀등이

 

反正 거사를 말하고 끌어들였으나 반정논의에 늦게 참여했다 하여 2등으로 낮추었으므로

 

이괄이 매우불평하였고 !!!!! 반란을 하게 된다...

 

이괄은 인조2년 1624년 한성까지 진격하여인조는공주까지 몽진하였다

이괄은 반정거사당일에 김유가 늦어 총지휘를 맏아해서 반정의 1등공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2등공신이 되어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만군사로 처음엔 서울입성하는데

환영도 받았다 한다 관군에 패하게되자 이괄과 한명윤 은 자기만 살겠다 배반한

부하장수 기익현과 이수백에게 경기도 이천에서 기습공격으로

참수되어 공주에있는 인조에게 목이 받쳐졌다

 

공주까지 몽진하였으나 九死一生 관군의승리로 진압되자 많은

 

 

반란 조선군과 부관이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후에청)으로가서

 

남침을 꼬드겨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조장하였다 이에 서인들의 배금사상과

망해가는 명을 도우려다 9년만에 丙子胡亂1636 인조14년 2차남침이 일어난다

 

그렇게 쉽게 패한 까닦엔 이괄의 난에 후금에 갔던 조선군의 배반으로

길안내와 약점이용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공녀들이 조공되는데 그참상은 대몽항쟁에 패한뒤 공녀를

원나라에 바치게되어 고려공민왕때 이곡이 올린 상소문에서 그잔혹함을

볼수 있다

 

그후 明시대 조선의 태종 세종도 공녀를 보냈고 청때 병자호란으로

끌려간 부녀자들은 나라에서 돈이없어 개인들이 돈을 가지고 청으로

가서 노예로 사는 공녀들을 귀국 시키고 이경석이 청에가서대거 귀국시키는데

還鄕녀 그들은 어느새 화냥년

이되서 모진 고통속에 살게 된다 그들도 살아가야 하기때문에 술 팔고

했을것인데 그들이 낳은 자식은 호로자식이라 아여 극도로 천시당했다하였다

 

이로서 크나큰 사회적 문제와 혼란에 빠진

나라에서 아이디어를 짠게

지금의 홍제천(서울시 서대문구 은평구 사이)에서 목욕하면 모든 것이

전처럼 깨끗하여 진다 하였다는 공녀들의 모진 삶을 엿볼수 있다.

우리의 사대부들은 힘이없어 지켜주지도 못한 주제에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지천과 홍지문 오간수문 사진들

 

조선조에서는 물이 얼마나 깨끗하였을까?

이곳에서 목욕하면 신원이된다 하여 한많은 공녀들이 목욕을 하였으나

그나마 양반님네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하니 그들은 어찌되었을까??

 

 

평보가 찍은 무의도의 찔레꽃

 

공녀들은 끌려가며 허기진 배고픔을 찔레꽃 새순 을 따먹었나보다

머나먼 중국땅으로 걸었으니 그 아픔이 어떠 했을까?? 짚신을 신은채

길섶에서 자게되고 고향의 부모님을 그리며 얼마나 울었을까??

 

 

 

 

 

엄마 일가는 길가 하얀찔레꽃

찔레꽃 하얀잎은 맛도좋지

배고픈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이노래는 공녀라는 이름으로 원나라로 끌려가며

비통함을 노래한 찔레꽃 이란 노래다

 

고려여인들은 대몽항쟁중1231-1257 25년동안 20만명이 끌려갔고

전쟁이 끝나고도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 고려충렬왕1275-공민왕4년 1355년

80년동안 50여차래나 원나라에 2000명이나 되는부녀자가 공녀로 끌려가

노리개감이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세종때도 7차래 114명 후기에도 7차래 27명이 공녀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말 대학자 이곡(이색의아버지)은 1335년(충숙왕4년)공녀 폐지

상소문을 원황제에게 올렸다

 

“여자들을 모아들여 공녀를 선발하는데 이쁜여자도 있고

미운여자도 있습니다 사신에게 뇌물을 주고 욕심이 채워지면

이쁜여자도 놓아주고 다른데서 구합니다

 

이러다보니 한 녀자를구하기위해 수십집을 뒤져야 합니다

오직 사신의 말만 통할뿐 누구도 어지지 못합니다

황제의 명으로 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들이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소리가

끝나지 않습니다 혹은 여식을 가둬놓기도 하고 이웃마을에 숨겨놓기도

합니다 그런 친족들을 묶어놓고 매질하며 주리를 트는 꼴이란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일입니다

 

공녀로 뽑혀 떠나는 날이면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난간에 길게 엎어짚거나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이 여럿입니다

 

근심걱정으로 기절하거나

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자도있고

대들보에 목을 메기도 합니다

 

이런 애절한 상소문을 접한 원나라 황제는 고려여성 헌납을 받지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곡의 상소문에 따르면 고려인의 수난은 계속되다가

1356년(공민왕5년)에 중단된다

 

가정공은 고려와 원나라의 성리학의 종장으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원나라에서는 그의명성과 외교능력을 소유한 이러한 애절한 상소문이

받아들여진것이다 훗날 고려의 백성들은 가정공의 공덕을 기려 곡도와 감사제를 지내며 공덕을 기리는 풍습까지 생겼다

 

가정공의 17대손 휘 경재 문강공(文강公)이 세운 신도비에 공녀폐지에

대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있다 고려사절요 제25권 金宗瑞

 

 

조선군의 비밀통로

 

 

 

 

 

멀리 성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아름답다

 

 

 

남문의 정경

 

 

 

 

한국의 실학사상(삼성출판사) 서론에 각론하기를 흔히 전통유학은 전근대적 유물로서

우리나라 근대화의 저해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것은 전통유학이 지닌 시대착오적

요소 때문임은 다시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이 지닌바 소위 번문욕례(繁文縟禮)라거나

가부장적 종속윤리라거나 형이철학적 理氣 철학이라거나 한결같이 현실개혁의 저해요인

으로 간주되고있는것이다. 라하였다

 

내가 생각하기를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신주단지 모셔 피신시키는게

사람의 도리였으니 아니그렇겠는가?

 

기울어가는 명을 돕자고 주장하던 척화파 와

개혁과 등걸이 왜교를 펼쳤던 광해(광해는 영창을 살해한 도덕적결함)를 몰아내고

왕이되어서 명분만 앞세웠던 인조는 진달래 활짝핀 아름다운 저 성문을지나 지금의

송파구 까지 가서 항복하는데 산성일기에는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시자,

 

 

 

저들이 인도하여 단에 오르셔서 서향하여 한의 오른쪽에 앉으시게 하였다.

 

 

한이 남향(임금은 남향하여 앉는다)하여 앉아서 술과 안주를 베풀어 놓고 임금께 돈피

 

 

(모피) 두벌을 주니 임금께서 그중 한벌을 입으셨다.(산성일기중에서)

 

 

 

항복을 하고 君臣관계를 맺고 그의 공덕비를 세운게 현존 송파구 삼전동 289-3번지에

 

 

있는 삼전도비다 난세에 명재상 이경석(白軒 李景奭)이 쓴 비석은 그동안 매몰 복원 등

 

 

 

많은 풍파 끝에 지금자리에 보존되어 있다

 

사진출처:

김규봉의 사는 이야기

 

 

현실 정치에 있어서도 대의명분에 치우처서 실리를 버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기사화된 용인시의 경전철 같은 버려도 써도 년간 수천억원의 적자를 면치 못한다

 

하는것들은 아직도 우리가 명분에만 치우치는 우를 범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옛 공덕있는 광주고을 수령들의 공덕비

성곽을 돌며 역사이야기로여사님들은 흥미를 가진다

춘곡의 말이 생각 나서 그들에게 전해주었다

 

"역사란 미래의 대한 교훈이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역사인식을 잘못하여 우를 범하는 때가 많다"

 

 

 

다시 숲속으로 들어 갔다

한적한 숲속을 지나니 진한 거름냄새가 난다 산성안 사유지가 있나보다

남한산성을 유네스코 에 올리려고 힘들게 노력하고 외국인들도 많이 오는데

이런 진한 임분 냄새를 피워도 될까??

 

 

 

 

고택으로 지어진 음식점을 지나고

 

 

 

 

 

 

 

 

 

만해 기념관은 개인 사업인가보다 입장료가 있고

 

 

차라리 / 한용운

 

 

 

님이여, 오셔요. 오시지 아니하려면 차라리 가셔요. 가려다

 

 

 

오고 오려다 가는 것은 나에게 목숨을 빼앗고 죽음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책망하려거든 차라리 큰소리로 말씀하여 주셔요.

 

 

 

침묵으로 책망하지 말고 침묵으로 책망하는 것은 아픈 마음을

 

 

 

얼음 바늘로 찌르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아니 보려거든 차리라 눈을 돌려 감으셔요.

 

 

 

흐르는 곁눈으로 흘겨보지 마셔요. 곁눈으로 흘겨보는 것은

 

 

 

 

사랑의 보(褓)에 가시의 선물을 싸서 주는 것입니다.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한용운

 

사랑하는 사람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함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잊고 싶을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때 돌아보지 않는것은 너무헤어지기 싫기 !!

 

후문생략

 

이런 싯귀들도 연인을 비유한 조국을 말하는 것일겁니다......

 

만해 기념관을 지나 농악놀이에 빠져들다

 

 

농악놀이 끝나고 로타리 우측 순교자 현양비를 보게 되었다

 

 

 

 

 

 

 

 

현양탑이 있는 이곳에서 신유박해(辛酉迫害)1801년 순조1년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년 헌종5년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터라 한다 특히 신유박해때는 정약종이 죽었고 그동생 정약용은 귀양보내졌고 중국선교사 주문모사형 기해박해 때는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임을 알게되면 연좌죄뿐아니라 한집 에서 천주교인이 발각되면 주위5집식구 모두

사형시키는 오가작동법을 써서 많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는데 죽임을 당한 자리에

현양탑(위령탑)이 서있다.. 불과 1백 몇년전 이곳에선 신앙을 지키려고 신념을 지키려고

참수형을 당해 남한산성 하천으로 던져지는 순교를 당했다는 장소이다....

 

농악놀이에서 퀴즈맞춰 동동주교환권으로 탁주를 교환하러 갔더니

그안에 인조의 마지막 만찬이 조형되어 있었다

 

 

인조가 산성을 떠날때 마지막 수라상의 표현

 

직접빚은 술 동동주를 농악단의 퀴즈를 맞히면 상품권을타서 이술로교환된다 

 

한식이 최고 라는 집에 가서 1만원 한식정식을 먹는데 성찬이었다

설것이 할것 없이 깨끗하게 접시를 비웠다

 

 

 

 

 

 

 

2011년 3월과 4월에 연달아 남한산성을

방문하게 된 동기는 역사적 유적지의 탐방에

있었지만 또하나 매주 일요일 2시부터 공연하는

광주 광지원 농악단의 신명나는 연출 때문이었다

 

 

 

진행자의 말에 따르면 전주 대사슴놀이 전국 경연에서

연속 4번의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하는데

 

 

 

 

 

상쇠를 필두로 징을 치는 아가씨 장고 치는 아가씨 모두

아름답고 특히 고유복색에 남성두명이 추는 춤사위는

우리의 멋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절로 어깨춤이 추어지는 한판 공연뒤엔 뒤풀이라하여

함께 춤추며 즐기며 즐거움을 주고 같이 기념 사진도 찍어주는

이벤트 행사는 요즘 지방자치제 의 자기고장 선전의 큰장점으로

보이며 온힘을 다해 연출하는 연기자 여러분의 노고에 큰 감명과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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