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7월17일
사돈어른들과의 점심약속이 있어 함께 식사 후에
선능에 들렀다
.
능안 소나무숲으로 외손녀의 재롱을 보면서 산책하게된다
성종의 묘역등 계비의묘 중종의묘 모두 장마로 인한 회손을
막기 위하여 천막이 처져 있었다.
.
조선의 성군으로 세종과 성종 숙종 정조를 들겠으나 선대왕 세종이나
정조보다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것은 여인들에 둘러쌓인 스켄들
때문이 아닐까????
새들과 각종의 야생화 버섯들 나는 차라리 선정능에 잠들어 있는 조선왕들
의 격동의 삶에 집착하기보다 아름답고 귀여운 외손녀의 재롱으로 샘솟는
엔돌핀과 숲에서 나는 피톤치드를 즐기고 있었다
1592년인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해
두 능침이 침략해 온 왜군에
의해 훼손되는 수난을 겪게되었다한다 . 특히 중종의
정릉 경우는 본래 경기도 고양군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내의 희릉(중종의 첫 왕비인
장경왕후의 능)에 묻혀있었는데,
명종때 문정왕후의 쓸데없는 집착탓에 이곳으로 강제로
옮겨졌다가 이때에 이르러 시신이 훼손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지금 현재 성종,중종 부자의 릉 선릉과 정릉은 안은 비였고
외형만 무덤인채로
보존 되어 있다 한다. 많은 기록에 임진년에 일어나 왜란에
왜군이 선릉과 정릉을
도굴해 뼈는 버리고 각종 보물은 가져갔다는 기록이 난무하고....
후에 정릉 근처에서 왠 아주큰 해골을 봤다는데(조선 시대중에 키가
큰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종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습.)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보게되면 중종이 도학정치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국문할 때 조광조 가 공술하기를
‘신의나이가 38세입니다
선비가 세상에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망령되게 국가의 병통이 이(利)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명맥(命脈)을 무궁한 후세까지
새롭게 하고자 하였을뿐이고 조금도 다른 뜻은 없습니다“
연려신기술 中宗朝古事本末 에서 발췌한 이글을 보면
뜻있는 선비를 죽인 중종또한
시신이 파헤쳐저서 봉분만 남아있는 역사의 씁슬한
면을 생각하게된다..
제9대 성종 가계도
덕종- 소혜왕후 한씨
제9대 성종
차남:자율산군(1457-1494)
재위기간:1469.1월-1494.12월(25년1개월)
부인12명 자녀:16남12녀
|
|
|
|
|
|
|
|
|
|
|
|
|
|
|
|
|
|
|
|
|
|
|
|
선능과 정능은 조선의 9대왕 성종과 11대 중종을 모신 능이다
본래 선정릉이 소재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은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부의
한 고을이었다.
옛 문헌을 살펴보고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경기도 광주부 학당리에 속해있었다 서
울시가 점점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서울시로 편입된다
성종하면 생각나는 것들을 요약한다면 우선 세종과 세조의 치세의 후광으로
태평성대를 기록한 성군으로 성종은 정치체제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성종대왕의 글 석각
982년 삼성체제(三省體制)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때의 정치개혁은 태조 이래의정치조직을 중국식으로 개편하고자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바로 중국의 3성6부제를 고려의 중앙정치조직으로 도입하였던 것이다.
982년부터 983년 사이에 등장한 새 정치기구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을 중심으로 하고, 어사도성 밑에 선관(選官)·병관(兵官)·
민관(民官)·형관(·예관(禮官)·공관(工官)의 6관(六官)을 예속
하는 체제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995년 중앙정부는 3성6부로 개정되어 고려 중앙관제의 기본이 되었
다. 성종이 도입하고자 한 중국식 관제는 우리나라 역사상 본격적인 중국관제의 도입이라
는 측면에서 최초의 시도였다.
서삼릉에있는 폐비 윤비의능
또하나 연산군과 중종에 이르는 격동의 폐비윤비를 생각나게 한다
미상∼1482년(성종 13). 본관은 함안(咸安)성종(成宗)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판봉상시사 윤기무(尹起畝)의 딸이다.
처음에 입궐하여 성종의 후궁이 되었을 때,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왕대비
인수대비[昭惠王后]를 잘 봉양하여 두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1474년 공혜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왕비가 되었으며,
1476년에 중궁으로 봉해진다.
폐비윤씨는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한다. 실록에는
폐비윤씨의 죄가 매우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인형(人形)을 만들어 저주(詛呪)한 일, 음조(陰助)의
공은 없고, 투기(妬忌)하는
마음만 가진 일, 몰래 독약(毒藥)을 품고서 궁인(宮人)을 해치고자
한 일, 무자(無子)하게 하는 일이나, 반신불수(半身不遂)가
되게 하는 일, 그리고 무릇 사람을 해(害)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일이 발각된 일,
엄소용, 정소용이 서로 통하여 윤씨(尹氏)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諺文)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고의로 권씨(權氏)의 집에 던져 넣은 일,
왕을 바라볼 때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았으며, 혹은
나의 발자취를 취하여 버리고자 한다고 말하였으며,
상참(常參)으로 조회를 받는 날에는 비(妃)가 왕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야 마땅할 것인데도, 조회를 받고 안으로 돌아온
뒤에 일어난 일 등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1479년 음력 6월 2일에 윤씨는 폐위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두려고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월 16일,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憲王后)에 추숭되고,
그녀의 묘는 회릉(懷陵)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내린 관작 또한 모두 폐위되어 원상복귀 되었고,
회릉 역시 폐비윤씨지묘(廢妃尹氏之墓)로 격하되었다.
폐비윤씨지묘는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元新洞)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사적 제362호인
제10대 폐왕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
연산군의 유년시절 어머니의 죽음과 사화까지 불러일으킨 그의 폭정.
지금까지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연산군은 무자비하고 말이 안통하는
광분에 쌓인
폭군으로 많이 그려져왔다.
조선의 제10대 왕으로서 1494년부터 1506년까지 재위하였다.
휘는 융(㦕), 성종의 척자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 또는 尹起畎)의 딸로 폐비 윤씨이다.
어려서 모친 폐비 윤씨가 사사되면서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게 되었다.
흔히 1504년(연산군 10년) 폐비 윤씨의 사사 내막을
임사홍 등이 폭로함에 따라
피바람이 몰아쳤다고 알고 있으나,
연산군은 즉위 이전부터 생모인 폐비윤씨의
비극적인 삶과 자신을 돌본 어머니가
친 어머니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중종이 태어나기 전인 1483년(성종 14) 세자에 책봉되어,
서거정에게
학문을 배우고 즉위 후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빈민을 구제하고 《국조보감 國朝寶鑑》 등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사창·상평창·진제창(賑濟倉)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사가독서를 부활하였으며,
또한 《경상우도지도》, 《여지승람 輿地勝覽》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다소의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 중종의 정릉(靖陵) > - 서삼릉 능역 내 희릉에 있다가
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중종반정
1506년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1506년(연산군 12)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成希顔)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朴元宗)은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낸 사건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愼言牌)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宴樂)
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이에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 폐위를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申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면서 거사에 차질을 빚을 뻔 했으나
호남지역에서 연산군 폐위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이
무사를 훈련원에 규합하였다.
그들은 먼저 궁금세력(宮禁勢力)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영(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
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2일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산꼬리풀꽃
아카시 재목버섯
다래열매
다래꽃
늙은 노랑다발 버섯
쪽동백 나무열매 (때죽나무과)
질경이풀
꽃사과
초롱꽃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복궁 향원정(게리네가족) (0) | 2020.08.01 |
---|---|
7코스올레와 관광(제주여행1부) (0) | 2020.08.01 |
북악스카이 길을 가다 (0) | 2020.08.01 |
문수산성의역사탐방 (0) | 2020.08.01 |
심양일기(남한산성1부) (0) | 2020.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