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의 스페인여행
지인 아름다운 살구꽃 양숙종님은
2015년 3월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여행을
계획합니다
그녀는 여행가로서 지구촌 여러군데를 여행하였지만
항상 미지의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의 그리움으로
여행을 마치면 또 다음여행지를 찾게 됩니다
살구꽃의 융프라우여행
세비아 대성당 콜럼브스 무덤앞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됩니다 선각자들은
항상 외로운 투쟁입니다
세비야 플라멩코 Siviglia flamenco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는 세비아와 그라나다 론다
말가.코르도바.카디스.우엘바시를 통칭하는데
스페인을 통일시킨 이사벨여왕과 콜럼브스의
합심으로 대서양 항해 성공에 따른
스페인 황금기의 중심에서 번영의
절정을 맞이 합니다
세비아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고대 로마 지배를 받았던 시절 히스팔리스(라틴어 Hispais)로
불려지는 西 고트 족의 중심지였다 합니다
711년 무어인(이스람)점령 당해 지배기에는
아바스 왕조및 그후 알모리바드와 알모아드 동맹의
지배를 받을때 “시장이 열리는곳”이란
뜻의 아랍어 이쉬빌리아 로 불리는
이스람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후 히스 팔리스로 다시불려지다가
세비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과달카비르 강
황금의 탑(Torre del Oro)
강변에 위치한 황금의 탑 배의 운항에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해양박물관으로
사용한다
스페인 광장의 출입문 아라곤왕가 문양
711년 우마이야 왕조에 속한 베르베르족과 아랍인들로
이루어진 무어인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
하였다 이들은 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후 에도 각자 타이파
국가를 유지하였는데 아랍 세계에서는 무슬림 지배하의
이베리아 반도를 알안달루스로 불렀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 북단에는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과 같은 기독교 왕국들이 자리잡았고,
이들은 무슬림 타이파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여 영토를 늘려나갔다.
1492년 마지막 이슬람 타이파 국가였던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되기까지
약 750년간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진행된 기독교 국가의
영토 확장을 레콘키스타라고 한다. 스페인의 역사에서
1492년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되어 레콘키스타가 끝난 해 이면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연합하여 스페인 왕국이
세워진 해이기도 하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
첫 항해를 한 해이기도 하다.
위 출입문의 문장은 스페인 왕국을 탄생 시키는데 공헌한
아라곤 왕국의 문장이다
1929년 엑스포를 위해 만들어진 스페인 광장은
그해 10월 갑자기 세계대공항에 직면하여 주요국
들이 불 참가 의사를 밝히면서 엑스포는 보류되었다 한다
이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이탈리아인 아니발 곤잘레스 라 한다
스페인 광장 (Seville, Spain Square)
세비아 스페인광장(상)
동굴안 성당 내부
Mijas Málaga Andalusia(안달루시아 말라가 미하스)
미하스는 세비야와 마찬가지로 타르데시안 (Tartessians)인
들이 선사시대부터 살았다 요새의 유적이 아직도 도시 외벽의
일부에서 볼수 있습니다
또한 미하스는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고서에 언급한 대로
미네랄(탄수화물.지방.단백질.비타민 5대중요 성분)이
풍부한 곳 이라해서
그리스와 페키니아(고대 시리아지방 문명)
인들을 끌어들였다 합니다
미하스와 활발한 상거래를 유지하였던 로마인(서 고트족)
기독교인들의 지배하게 되었고 CE714년 이후
무어인들에게 점령당했다 무어인들은 농업 축산 및
모든 상품의 ⅓을 징수 하는 대가로 원주민들의 관습과
종교 재산을 보존케 하였습니다
코르도바의 토후국 시절엔 미하스는 “우마르 이븐Hafsun에
의해 정복 당했다 그후 9세기에는 Adb-라만3세에 의해
패배하여 Bobastro의 통치하에 남아 있었습니다
1487년 미하스는 말라가가 포위 당하자 가톨릭 군주에게
저항하는데 말라가가 점령당하자 주민들은 항복하고
대부분 노예로 판매되었습니다
몇 년후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동안 미하스는
스페인 왕가에 충성 하였습니다
19세기 미하스 농업 어업 포도산업 종이생산
이 주 산업 이었습니다
해안선과 언덕을 배경한 하얀 집들 동화의 나라에
온 것 같았습니다
미하스는 스페인 말라가주 남부 해안에 위치한
400m에 이르는 고산 도시입니다
안달루시아 전통양식 주택인 “푸에블로 블랑코(하얀마을)
가 빼곡하게 들어선 산허리와 바닷가 집들은 환상적이고
미하스 마을 입구 언덕에 있는 “비르헨데 페냐”성당은
바위를 파고 만든 천연 동굴 성당입니다
마을의 수도성인인 베냐성인을 모셨다 합니다
전설 두가지가 있는데하나는 무어인들이
밀려 오기전 기독교인들은 성모마리아
상을 성벽에 감추고 벽을 다시 쌓았다 합니다
수세기가 지난 다음 기독교가 다시 득세 하게되자
보수 공사를 하던 수도사에 의해 발견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1580년 두자매가 산책하다가
종탑 위에 앉아있는 비들기 한 마리를 보았는데
그 비들기가 성모 마리아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성당을 짓고 바위의 성모 운둔자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동굴속의 성당은 성모상이 모셔져있고 아주 작은
경내에 긴의자 두 개가 있었습니다
그라나다
Royal Chapel of Granada 그라나다의 왕실 예배당
이사벨여왕과 콜럼브스의동산은 황실예배당 앞에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잠들어 있는 이사벨여왕
Tomb of the Catholic Monarchs, Royal Chapel of Granada,
made in 1517 by Domenico Fancelli.
가톨릭 군주의 무덤, 그라나다의 왕실 예배당,
도메니코 Fancelli에 의해 1517 년
이사벨여왕의 왕관
이사벨여왕의 초상
알함브라궁전을 가기위해 그라나다에 왔습니다
위대한 여왕 이사벨이 잠든곳입니다
1492년 1월,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아직
남아있던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제압,
마침내 8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당시 무슬림과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사벨은 전장을 누비는
남편을 위해 군자금과 물자 조달 등에
국력을 쏟아부었다고 합니다.
그 위업 덕분에 1496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칭송받은
두 사람은 가톨릭 공동왕(Los Reyes Católicos)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게 됍니다.
이후 이사벨은 ‘가톨릭교도 이사벨’(Isabel la Católica)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또한 이사벨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을 돕기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스페인에
해외 식민지 개척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치세를
스페인의 황금시대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수많은 모험가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어 그
곳으로부터
얻은 수많은 재물을 통해 스페인은 매우 부유해졌습니다.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사벨은 훗날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처사에 매우 마음 아파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504년 11월 26일 메디나델캄포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스페인 식품점 카페 어디가나 하몽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라나다 변두리 뒷골목에서
본 노천 카페 거기서 하몽을 썰어
손님에게 제공하는 것을 옆에서
보게 됩니다
하몽은 스페인 전통 음식으로 돼지
뒷다리를 6개월에서 2년 정도 소금에 절인 후
숙성과 건조를 반복하여 만든 생햄입니다.
하몽은 소금에 절인 음식이라
굉장히 짠맛이 강해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주로 햄 그대로 샐러드나 샌드위치의
재료로써 먹습니다.
하몽은 크게 하얀 돼지로 만든
'하몽 세라노(Jamon Serrano)'와
검은 돼지로 만든
'하몽 이베리코(Jamon iberico)'로
구분되는데, 후자인 하몽 이베리코가
더 고급 종으로 분류된다 합니다.
하몽 이베리코 중에서도 사료를 먹였느냐
도토리를 먹였느냐에 따라 등급이 나뉘며,
이베리코 중에서 검은 발톱을 가진 돼지로
만들어 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진
'파타 네그라(pata negra)'가
최상급 하몽으로 여깁니다.
하몽은 돼지가공품 중 가장 값비싼 음식으로
스페인 전역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적게는 5~6유로(한화 6~7천원 선)면 맛볼 수 있으나,
이베리코 최고급 하몽은 7kg에 600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70~8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 합니다.
알람브라 궁전(Alhambra Palace)
알람브라(Alhambra)는 아랍어로 “붉다”라는 뜻으로
남부의 그라나다에 살고 있던 아랍군주(술탄)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1238년부터 1358년 사이에 지어진 궁전과
성곽의 복합단지입니다
르네상스식 건물은 카롤로스1세때 추가되어
이스람건축과 어울려 있습니다
수많은 이스람왕이 이곳을 거처 갔고 1492년
기독교 세력이 재 정복하면서 궁전을 개조하기 시작
하였다 아랍권내 떨어져 있었던 무어인들의 개성으로
독특한 예술성을 창조한 예술가의 창조는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우아한 기둥들 종류석 솟아
있는 듯 외부가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합니다
이사벨라 1세는 30년간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이었으며,
남편 페르난도와 함께 스페인 통일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스페인 통일에 한 공헌,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 후원,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국토 회복 운동) 마무리 등을
이유로 이사벨라는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성군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위 그림에서 오른쪽 백마 탄사람이 이사벨 여왕이고
왼편의 검은 말을 탄 사람이 이스람 마지막 술탄 보아브딜
입니다 멀리 알람브라 궁전이 보이고 재미있게 보는 것은
검은말의 머리도 숙여 있습니다
거의 5백년 동안 남의 기독교 나라에서 이스람 통치를
해오던 사람과 5백년 동안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았던
두 인물 감회가 느껴 집니다
알함브라의 그 화려했던 영화를 접고 모로코로 돌아가는
마지막 술탄은 초라합니다
언제나 정의는 승자의 편입니다
돈키호테가 돌진한 풍차 앞에선 살구꽃
라만차 세르반데스가 돈키호테를 집필한여관입구
그라나다에서 3시간여를 달려
사우드 레알 주 “카스타야 라만차”에 왔습니다
라만차는 아랍어로 건조한 땅 이라는 의미로
실제로 비옥하지 않지만
산하나 없는 고원 평야지대가
광할하게 펼처집니다
여기 까지 오는 도중에도 어김없이 올리브
농장이 끝없이 펼쳐저 있었습니다
끝없는 평야지대 가끔씩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농작물 단지도 보였습니다
대 평야를 오고 지나는동안 길가의
풀들은 누렇게 말라 한국의 가을 잡초
처럼 해 있었다 여름엔 거의 비가 오지않아
태양 볕에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런길을 갑옷입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다녔을 것입니다
이곳은 중세 무어인 군대와 기독교 군이
빈번하게 전투를 벌려 대치하던 곳이 었다
합니다
또한 스페인의 자존심 대문호 세르반데스
"푸에르토 라피세"는 라만차
평원에 위치한 세르반테스의
소설속에 나오는 돈키호테의 주 무대의
배경이 되는 곳입니다
여기로 온 것은 세르반데스가 돈키호테를
구상하고 집필하던
곳 이 있으며 공격할 거대한 성으로 묘사한
여관 "벤타 델 키호테"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 이라고 알고는 있으나
특별히 관에서 인증한 아무 근거도 없었고
다만 세르반데스의
고향(알까라 애나르네스) 가
이곳에서 멀지 않아 진실일거라
생각하게 뵙니다
베드로의 참회의 눈물
톨래도에 왔습니다
의례 관례상 인 듯 톨레도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기념사진을 찍게 합니
스페인은 4백년넘게
이스람의 통치를 받아서 이스람과 기독교 유대교
까지의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고도입니다
골목길은 협소하여 미로처럼 얽혀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람들이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골목을 미로처럼 만들어 놓았다 하면서 가이드의
부탁은 만약 일행을 잃어버려 길을 찾지못할 경우
그 자리에 그냥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불러 찾는수 밖에 없다
하였습니다
역사상 톨레도(Toledo) 지역의 첫 번재 주인은
이베로 족의 한부류였던 까르빼따노(Carpetano)
민족이었다 BC192년 마르코폴비오(Marco pulvio)
라는 집정관이 로마의 한 변방으로 합병하고
톨레툼(T0letum)이라고 불러 지금의 톨레도의
기원이되었다 로마의 지배는 5세기 까지 이어지다가
비시고도족(Visigodo)이 들어와 AD.418년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여러차래에 걸처 종교회의를
개최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589년 제3차 종교회의때 비시고도왕 레까레도(recaredo)
가 카토릭을 공식 국교로 선언합니다
8세기에 접어들어 이스람 제국과 전쟁 711년 톨레도는
아랍왕 타릭(Taiq)에 의해 점령 당하고
400년간 아랍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후 꾸준한 국토회복운동(Recconquista 718-1492년)
이 지속되 다가 가스띠아 왕국의 알폰소6세는 톨레도
수복이라는 커다란 업적을 이루고 1087년에 가스띠아
왕국 수도가 된다 13세기 이후 전성기를 거처 1492년
이사벨여왕이 스페인을 통일하고 상권을 누리던 유대인
들을 추방하는데 이는 톨레도의 경제위축을 가져왔습니다
거기에 펠리페2세는 수도를 마드리드로 천도하게 되자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톨레도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가지고 있는
위상이 있다면 스페인의 수석성당으로 세계종교회의가
여러번 열렸으며 스페인 내란 때에는(1936-1939)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 되었습니다
톨레도 대성딩
마드리드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아랍시대 부터입니다
8세기 이후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기 시작한 이스람 왕국은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고 9세기 경에는 톨레도와 마드리드를
포함한 중부 지역이 거의 이스람 세력화 되었습니다
술탄 모하메드1세때인 873년 아랍인들은 현재 왕궁이 있는
언덕에 톨레도를 수비하기 위한 요세를 건설 하면서 “물의원천”
이라는 뜻의 “마헤리트(Mayrit)라 불러 지금의 마드리드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프라도 박물관은 까롤로스 3세 시대인
1785년 "환데 비아누에바"라는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당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진 건물입니다
원래 이건물은 식물원 가까이에 자연과학연구소
용도로 세워진 건물이었습니다
1808 반 나폴레옹 독립전쟁기간 많은 부분이 소
실되는 불운을 격었으나
페르난도7세의 명령에 의해 복구되었습니다
1819년 왕립 미술박물관으로 거듭태어나게 되는데
박물관은 회화 삽화 조각등 5.000여점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세계적 미술 박물관으로서 중세부터 18세기
말까지 모든 미술 학파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Montserrat(몬세라트)
산타 마리아 데 몬세 라트 베네딕토 회
수도원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 시 요브레가트 강 바로 북서쪽으로
약 45km에 위치해 있고
1.200m 높이의 구로데스크한 산은 설악산의 뾰족봉 과
대조를 이루는 머리핀의 자형으로 굴곡 곡선과 둥근
암석의 산으로 웅대한 장관을 이루고 정상에서
멀리 카탈로니아 풍경을 감상 할 수 있었습니다
Barcelona Sagrada Familia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성가족 성당을 착공하게
된 이유는 당시 카탈루냐 시대적 배경을 꼽고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카탈루냐 지방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굉장히 변화가 많았던 시대였다 합니다.
사회주의적인 사상도 팽배했는데 마르크스가 했던“정신은
물질의 생물학적부산물이다“ 라는 말처럼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교회들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지방이 하느님께 불경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 성당을
계획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래서 건설 초반에는 신자들의
기부금 으로만 지어졌습니다
현재도 이 건축물의 공사를 이어가는 건축가들은
카탈루냐 지방의 건축가들로만 구성이 되어있고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성가족 대성당 지하 유리벽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여행의 여정 끝에서 스페인 최고의
예술을 감상하게 되는데
당시 가우디가 전념했던 그리고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성가족
성당은 아직도 미완성 작이다
모든 정열을 쏟아 붓다가 1926년 6월10일
전차에 치어 74세 나이로
그가 사랑하던 하나님 곁으로 갔다
위대한 가우디를 조상으로 둔 스페인
사람들은 성가족 성당 하나만의
입장료 수입이 한해 우리 돈으로 약370억에
이르러 경제적인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1882년 시작한 이 거대한 공사는 현재 65%의 공정을
보이고 있으며 공사 책임자의 말을 빌리면 2026년
정도에나 완공 할 수 있을까
예상 한다고 합니다
구엘공원(Park Güell)
서울에서 스페인 여행을 준비할 때 가장먼저
떠 올랐던 것은
가우디에 관한 전설적 건축물이 었습니다
성가족 성당이 그대표적 작품이지만
바르셀로나에 와서 그의 신비의 천재성에
감탄을 하게됩니다
가우디가 건축가 자격증을 따게 되었을 때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교장이었던
“엘리에스 로젠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합니다
“우리는 미친사람 아니면 천재에게
자격증을 주었다.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구엘공원은 바르셀로나 북서쪽 페라다산의
남쪽 언덕비탈에 자리잡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공원입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원래 구엘공원은
바르셀로나 부호였던 구엘백작이
가우디에게 부탁하여 정원이 있는 부자들의
이상형 전원 주거단지를 만들도록
계획된 곳이었다 실제로 이계획은
너무 혁신적이어서 1914년 까지 14년간
걸처서 작업이 계속되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고 하며 실제로
예정된 개인주거지 60구역
중 3동의 건물만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다우디가 설계한 가스 가로등/바로셀로나
살구꽃의 스페인여행/로망스
동영상 2015년 3월 21일 밤(엘 팔라시오 안달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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