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신미양요를생각하며 덕진진에가다

훼브스 2020. 11. 30. 15:25

이슬같은 비(雨 )를 맞으며

잿빛 바다가 보이는 덕진진에서 눈을 감고

민초의 넋을 위로하다

 

 

덕진진

 

초지진을 초토화 시키고 덕진진 포격전 광성보 조선군 수비대 600명의

대부분 전멸당한 미군과의 최초 전투지는 포대위에 초연하다.

가름하여 133년 전 1871년 辛未洋擾 를 짐작 하고 있었다.

미 해병대에 맞서 槍劍을 휘드르며 절규하는 조선군이 보인다 .

 

여기서 장렬하게 전사한어재연 장군기 도 빼았긴다

 

초지진

 

각종 장군기와 군기가 펄럭이며 처절하게 싸웠던 함성이 들리듯한다.

 

어재연 /어재연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丙寅洋擾 는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자국 선교사 를 살해한 것을 보복하려고 인천과

 

강화도로 처들어와 전투를 벌린 사건으로 이로서 외규장각 도서 들을 탈취 당하여

 

최근 까지 굴욕적인 반환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http://blog.daum.net/0118983530/8438695병인양요

 

 

포사라 함은 조선시대에 각 史庫 의 서적들을 점검하여 擧風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각처고을에 사고를 지어 보관한것은 한곳에 두면 화재나 도난 부패의 우려로

 

분산하여 보관하여오래 보관 하기 위함 이며 도서들을 햇볏과 바람에 말리는

 

것을 거풍이라하고

 

이를 게을리하여 도서들이 이상이 있을때는 관리는 엄한 벌을 받았다 한다.

 

 

광성보

 

 

 

포탄이 작열 하던

이곳에서

총탄이 빗발치던 이곳에서

 

이름 없는 병사들을

누가 그리랴

 

이름이 뉘라 더냐

권세가의 이름도 아니었고

양반가의 이름도 아니었다

 

쇠돌이 돌쇠 바우 그들이

아니었나??

 

함성이 들린다

함성이 들린다

 

화살이 떨어졌다

맨몸으로 산화하던 그들

 

광성보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여도 싸우지 않는 것은 나라를 파는것"

 

이라는 척화비는 쓸쓸함에 을씨년스럽다

조선초기에 서양문명을 받아드렸다면 어찌되었을까?????

 

역사 스페셜에 소개된 일본은 난파되어온 화란인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문물을 받아드렸다 그 배경으로 임진난때 조총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우리는소현세자가 심양에서 천주학 수학 각종 신학문을 외국선교사로

부터 전수받고 귀국하였습에도 그를 독살한 정황이 명백하게 드러나고있고

 

하멜이 제주에 난파되어 왔으나 이를 완전 죄인취급하여 이리저리

귀양보내다가여수쪽인가 보내저 배를 만들어 일본으로 겨우 탈출하여

쓴것이 하멜표류기가 아닌가??

 

-- The Flag of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Korean Forces --
By Felice A.Beato

(미해군 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사진)

 

 

 

신미양요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기가 미해군 콜로라도함에 실려있다

이 원수기는 136년지난 2007년 임대형식으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신미양요에 참가한 1370톤급 USS Monocacy의 모습

백과사전인용

 

사족(蛇足) :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6월 10일, 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란, 쇄국정책을 펼쳤던 구한말 흥선대원군 당시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의 전쟁이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1865년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입항하려다 이를 침략행위로 간주한 조선군민에 의해 저지되고 이 결과 셔먼호가 소각되고 선원 전원이 처형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배상과 통상을 요구하며 1871년 아시아 함대 5척을 동원해 조선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다. 이 결과 조선군민 250여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비록 조선은 이 전쟁에서 우세한 미군에 패했지만 미국 역시 조선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조선과의 통상이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40여일만에 중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더욱 더 쇄국의 길로 접어들게 되며 서양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 역시 더 한층 깊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미양요때 전사한 조선군사들 모습
이틀간에 걸친공격에서 5개의 존선궁 요새가 점령당하거나 파괴되고
조선군은 700여명 가운데 250명이 전사 미군은 3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1971년 이탈리아 베니스 출생 영국 사진작가
펠리체 베아토(Felice Beato, 1832-1909)씨가 촬영한 한국의 선박(Junk, 猛船)

맹선(Junk, 猛船)
조선시대에 실제로 전투에 사용된 선박으로
대.중.소맹선의 세종류가 있다.

 

 

호랑이 사냥꾼으로 불렸던 조선군들은
적에 잡히느니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미군에 의해 잡힌 조선군 포로는 20명도

채 되지 않았다.

부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힌 사진의 조선군 2명은
자신들을 촬영하려하자 이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조선 침공에 나선 콜로라도함내
미군 고위장교들이 조선지도 앞에서 작전계획을 짜고 있다.

 

 

 

 

 

미해군측과 협상에 나선 조선 관리들의 모습이다.

 

 

1871년 갓을 쓰고 흰 도포를 입은 우리측 문정관(問情官)이
포로협상단 대표가 미해군 군함에 승선 해
포로송환 협상을 위해 조선 포로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1871년 덕진진에 진입에 성공해 환희하는 미해군.
초지진에서 1박 야영을 한 미군들은 6월11일 이른 아침부터 덕진진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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