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홍회

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경주여행6부)

훼브스 2020. 12. 2. 18:47

 

불교 역사관에서는 너무많은 것으로

시각적인 감동이 덜했던 탓일까

불교 미술관에 들어서면서 불교미술의

진면목을 볼수 있었습니다

 

부처상은 각나라마다 특징있는 재료로

만들었는데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많아 석불을

일본은 나무로 만든 목불 중국은 벽돌로 부처상을

많이 만들었다 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불상의 재질

1.석조(石造) : ()로 만듬()
2.목조(木造) : 나무()로 만듬()
3.소조(塑造) : 진흙()으로 만듬()
4.철조(鐵造) : ()로 만듬()
5.청동(靑銅) : 청동(靑銅)으로 만듬
6. 금동(金銅) : 구리()로 만들고, ()으로 도금
7.마애(磨崖) : '벼랑()을 갈다, 마찰(磨擦)하다'라는

뜻으로, 자연 암벽에 조각을 함

 


불상의 인물

1.여래(如來),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를

신성하게 이르는 말
2.미륵(彌勒), 미륵보살(彌勒菩薩) : 미래에 부처가 될 보살.
3.이불(二佛) : 2()명의 부처(),  석가모니불(오른쪽: 현재불),

  다보불(왼쪽: 미래불)을 말합니다.
4. 삼존불(三尊佛) : 3()명의 존경하는() 부처(),

  아미타불(중앙),  보현보살(오른쪽),  문수보살(왼쪽) 

말하기도 하고,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을 말하기도 합니다.
5.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불은 부처님의

육신(肉身)이 아닌 법신(法身)의 부처(),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비로자나는 고대 인도어로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주된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불상으로 만들어 숭배하고 있습니다.

 

불상의자세

 

1.() : () 있음
2.() : 앉아() 있음
3.병좌(竝坐) : 2명이 나란히() 앉아() 있음
3.() : 누워() 있음. 와룡(臥龍) '누워있는 용'으로,

초야에 묻혀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한 큰 인물.
4.반가(半跏) : '()만 책상다리()'이란 뜻으로,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포개 얹고 앉아 있는 모습
5.반가사유(半跏思惟) : 사유(思惟) '생각한다'는 뜻으로,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포개 얹고,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생각을 하는 모습으로

어떻게 하면 중생을 구할수 있을까 하는 고심을

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춘성부부와 우리부부는 아름다운 불교예술에

감탄을 하였습니다

 

 

 

 

 

 

1층의 불교미술I실에서는 신라 불교사의

흐름에 따라 각 시기의 대표적인

불교미술품을 보여드립니다.

삼국시대 신라의 불교조각의 정수인 경주 남산

장창골 출토 석조미륵삼존불상, 통일신라 초의 경주

낭산 능지탑 출토 소조불좌상 편과 감은사 터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보물 제336) 등이 대표 전시품입니다.

불교미술II실에서는 신라의 소형 금동불과

대형 석조불상을 유형별, 시대별로 구분하여 불교조각의

전개를 한 눈에 보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백률사 금동약사불입상(국보 제28)을 비롯하여

경주 금장대 출토 사리공양석상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2층의 황룡사실은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불교사찰이었던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대형 망새(치미)를 비롯한 기와,

사리갖춤, 지진구, 불상 등의 여러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황룡사를 축소복원한 모형이 나란히 선보입니다.

국은기념실은 평생 모은 666점의 귀중한 문화재를

우리 박물관에 흔쾌히 기증한 국은

이양선 박사(1916~1992)를 기리기 위해 주요

기증품을 전시한 공간입니다. 대표적인 전시품으로는

기마인물형각배(국보 제275),

청동옻칠발걸이(보물 제1151) 등이 있습니다.

출처:국립경주 박물관

 

 

신라미술관 가다록

 

 

 

 

 

 

석굴암 문수보살 .삼일면관음보살.보현보살

석굴암 본존바로 뒤에있는 삼일면관세음보살과

본존불 앞에있는 보현보살 문수보살을

일제강점기에 석고로본뜬것이라 한다

비록 복제품이지만 원본의 셈세한 조각수법과

예술성을 느끼게하고 있다

지금도 각처에 새로만들어진 관음상을 비롯하여

석불상을 볼수 있는데 이불상처럼 셈세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은 없는 것 같다

 

 

약사불

 

경주 남산 용장굴출토

8-9세기 불상은 원래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발생했다기보다는 불교와 그리스

문화가 만나서 형성되었던 간다라 영향을 받은

종교적 상징으로 다양한 재질과 형태로 만들어졌다

설굴암 불상은 그 뛰어난 조형미와 조각기술

등으로 세계를 대표하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통일 신라시대이후 에는 불교에서 신앙의중심이

타에서 불상을 모신 불전으로 바뀌었는데

아마도 탑에모실 부처님의 사리가 현실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모든 질병뿐아니라 무지의 병까지 고쳐준다 준다는

부처인 약사불이다

왼손에 약단지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불임을 쉽게 알아볼수 있다

 

원래 남산 용장굴에 있던 것이다

처음 박물관에 옮겨올 때에는 머리에서 몸체가

떨어져 있었는데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그런데 약단지를 빼면 석굴암의 본존불과

많이 닮아있다

오른 손가락으로 땅을 가르키는 모습의 항마촉

불상을 닮은 상이 만들어 졌는데

이불상 역시 그러한 불상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불상은 언제쯤 만들었을까??
풍만하고 당당한 신체는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굴암 본존불과 닮았지만 화려해진 광배경은

9세기에 유명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9세기 초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경주박물관)

 

석조보살얼굴
통일신라 8~9세기

보관을 쓰고 있으나 파손이 심하여 원래의 모양을 알 수 없다.

 머리와 어깨의 일부, 그리고 두광만이 남아 있다.

넓적한 얼굴은 인자한 모습이며, 오목조목하게

표현된 눈, 코, 입은 가운데로 몰려 있다.

어깨에 닿을 듯 길게 늘어져 있는 귀, 목에는 ..."

 

미룩삼존불

 

출토지:경주남산 장창골

높이:160cm(본존) 100.0cm(협시)

 

장창골의 한 석실에 안치되어 있던 것을

1925년에 박물관으로 옮겨왔습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 충담 스님이 차를 공양했다는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으로 추정되며,

선덕여왕대인 644년에 미륵불을

모시기 위해 삼화령에 생의사를

세웠다는삼국유사의 기록과

관련지어지고 있습니다.

의자에 앉은 자세의 불상은 당시

중국에서도 미륵불로 여겨졌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체비례와 천진난만한

얼굴표정에서 신라인들의 따뜻한

심성과 신앙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부처

 

하출토지:경주 인왕동

시대:신라7세기 저난

높이:91.0cm

 

하나의 돌에 불신과 광배, 대좌를 모두 새겼습니다.

얼굴에는 어린 아이같은 천진스런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대의는 양 어깨를 가렸고 주름이 흘러내려

무릎 사이를 덮었으며, 끝자락은 대좌 위로 늘어뜨려졌습니다.

오른손의 시무외인과 왼손의 여원인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유행했던 손의 자세입니다.

단순 소박한 표현형식과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에서

신라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 통일신라 8세기 후반 /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이 약사불은 원래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에 있던 것인데,

1930년에 박물관으로 옮겼다. 소금강산은 불교 공인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한 곳으로, 신라인들에게는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약단지를 쥔 손이 없는데도 무슨 이유로

약사불이라 부르는 것일까 ?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 사진집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왼손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데, 경주 사람들은 이 부처를

약사불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 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외형 틀과 내형 틀을 고정하기

위한 틀잡이(型持) 자국이 있다. 뒷면에는 머리 한 곳과 몸체

세 곳에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데, 모두 턱이 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별도의 구리판을 끼워 마감했슴을 알 수 있다.

 

불상의 표면을 자세히 보면, 여러 곳에 붉은색, 푸른색,

녹색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원래는 부처의 몸에서 금빛이 난다는 경전의

내용을 쫓아 금도금하였을 것이지만, 점차 도금이 없어지자

어느 때인가 불상에 채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체의 양감이 두드러졌던 8세기 중엽 불상과 달리 다소

밋밋해졌지만, 입가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서 8세기 중엽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적 숭고미가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부처

 

경주 남산 용장골출토 7세기경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경주 남산에는

많은 불상들이 있는데 오랜세월과 조선 유림들에

의해 파불이 많았으며 대부분 머리의 형태를 없애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남산불상에는 머리가

없는 것이 많으며 이불상의 머리들은

파불되어 훼손된 불상의 머리로 보인다

 

 

 

 

보살얼굴 통일신라8세기 충효동출토

 

 

 

 

석조불좌상(石造佛座像), 신라 7세기 전반 / 경주 인왕동 출토

 

이 부처는 인왕동 부처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인왕동은

국립경주박물관 인근 동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확한 발견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부처의 이름은 부처의 손 모양으로 알 수 있다.

손가락 끝이 하늘을 향한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이라고 하는데,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의미가 있다. 반대로 손가락이

땅을 향한 왼손은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이다.

 

그런데 이 손갖춤(手印)은 모든 부처가 할 수 있는 손모양이다.

그래서 이 부처의 이름을 단정할 수 없었다.

 

4등신에 가까운 신체, 둥글둥글한 얼굴은

장창골(삼화령 三花嶺) 미륵삼존불과 매우 비슷하다.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불상은 주로 7세기 전반에 조성되었다

 

금동반가사유상 신라7세기전반

 

금동반가사유상머리 신라7세기전반 황룡사터 출토

 

석조 불입상 경주읍성출토8세기

석조불입상

이불상은경주 도당산토성 동쪽에 있는

왕정골 절터에 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으로 약간 살이오른 통통한 열굴이

탄력감이 오는게 옷주름은 단이 져있어

마치 실물을 보는 듯 한 것이 마치 실물을

보고있는듯한 착어

 

 

사자입석/선 사자 돌조각

금강역사 경주하동출토

 

 

석조 선각 불좌상 9세기말

 

국보 제28

 

명칭: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상체를 뒤로 젖힘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단전과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경주 불국사 금동비

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금동불상

 

출토지:경주 황룡사 터

시대:신라7세기 전반

높이:17.5cm

 

황룡사 목탑 터의 동쪽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입니다.

오른손을 내려 둥근 지물을 들고 있으며,

왼손으로는 옷자락을 쥐고 있습니다.

손에 든 지물을 약사불이 지니는

약그릇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는 설도 있습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착의방식과 한쪽 다리에 힘을 빼고 비스듬히

서 있는 자연스러운 자세 등은 삼국시대

주로 신라 지역에서 유행했던

불상의 특징입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회랑 유리창에

장식된 꽃무늬 사이로 남산이 멋있게 보인다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

분왕사에서 출토된 석조관음보살입상

 

대부장경호(다리달린 긴목항아리)

 

반자금고쇠북

용얼굴 무늬기와

영묘사터 출토 8-9세기

신라최고의 조각가인 양지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실적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압형토기(오리모양토기)기원전1세기

 

 

 

기와

 

출토지:경주 황룡사터

시대:신라7세기

높이:45.8cm

 

황룡사 목탑 터 서편의 폐와 더미에서

출토된 사래기와입니다.

추녀 끝에 잇대어 댄 네모난 서까래에

사용하는 장식기와로서 보통의 서까래기와보다

큰 편입니다.

위가 둥글고 아래가 각이 진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가운데 위아래의

연꽂무늬를 중심으로 그 양 옆의

빈 공간에는 인동당초무늬가 부드럽고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가운데와 위아래 양옆에 뚫린

못구멍 5개는 고정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동 옻칠 발걸이 

 

보물 제1151. 14.7, 너비 12.1, 길이 14.9.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출토지는 미상이나 대구의 개인

수장가인 이양선(李養璿) 1986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일련의 유물들 중 발걸이이다.

말을 탈 때 사용되던 것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덧버선과 같다.

덮개에는 선을 촘촘하게 배치해 장식하고 위쪽과

아래쪽에는 구름과 같은 형태의 무늬로 장식하였다.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일본 정창원 소장

발걸이와 비교하여 볼 때 통일신라로 추정된다.

 

말안장의 일부인발걸이, 즉 등()은 초기에는 테로

이루어진 윤등(輪鐙)이었다가 이 발걸이처럼 앞에

덮개를 덮은 호등(壺鐙)으로 발전하였다.

이 호등은 등단(鐙靼)과 연결되는 부분이 방형이며,

밑에 긴 방형 구멍이 있어 등단을 매게 되어 있다.

몸체는 마치 버선의 앞부분 같고, 표면에는 위의

고리에서 좌우로 굴곡을 지으면서 굵은 테를 돌렸는데,

밑에는 작은 둥근 구멍을 뚫었다. 고리에서 다시 콧등을 따라

 굵은 융기선이 내려왔고, 고리와의 접속부와 콧등 좌우,

그리고 콧등 밑 좌우에는 각각 마주보는 엽문(葉文)

도드라지게 새겨졌다.

바닥은 콧등에서 내려온 융기선이 코밑에서 바닥으로

연속되다가 위의 엽문을 확대 변형시킨 넓은 문양이 새겨졌고,

하단(下端)에 삼원형(三圓形)의 구멍이 나있다. 몸체 좌우의

넓은 공간에는 사선형의 돋을새김선을 촘촘히

시문하되, 중앙 부근에서 상하로 구분하여

사선의 방향이 바뀌어 어골문(魚骨文) 같은 형상이 되었다.

발걸이 1쌍 모두 청동제의 주조물이며 전면에 검은색의

옻칠이 남아 있다.

1점은 약간의 균열이 있을 뿐 완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다른 1점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국보 275.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陶器 騎馬人物形 角杯

 

높이 23.2cm, 14.7cm의 기마인물형 이 토기는,

김해 지방에서 출토되었는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토기는 앞서 설명한, 금령총에서 출토된 국보 91

기마인물형 토기와 비교되는 우수한 유물로서,

출토지가 확실한데다가 아직까지도 실물이

출토된 바 없는 이 시대의 방패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가야 시대 토기 뿐만아니라,

말갖춤(마구, 馬具)와 무구(武具)의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나팔 모양의 굽다리접시(고배, 高杯)의 받침(대각, 臺脚) 위에

직사각형 판을 마련하고, 그 위에 말을 탄 인물,

기마인물상을 올려 놓았는데, 말의 엉덩이 부분에 뿔잔(각배, 角杯)

두 개를 부착시켰다. 받침의 네 모서리에는 손으로

빚어 깍아낸 말다리가 있다.

굽다리받침에 두 줄로 뚫린 구멍은, 가야 시대

토기의 굽다리 접시 형태와 동일하다.

 

말은 머리에 "말머리 꾸미개(馬面)"를 하고,

말갑옷(馬甲)을 입혔다.

무사는 두 다리를 등자(鐙子)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왼손에는 방패를, 오른손에는 창을 잡고 있다.

방패의 앞면에는 마름모 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말에게 입힌 갑옷, 즉 마갑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말갈기는 직선으로 다듬어져 있다.

말을 탄 무사는, 머리에는 몽골 바리 모양(鉢形, 발형)

 투구를 쓰고 있고, 가슴에는 목부분까지 보호하는

경갑(頸甲)을 착용하였다

 

특히, 아직까지 실물이 발견된 적이 없는 방패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점은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다.

또한, 기마인물보다도 뿔잔이 훨씬 큰 점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문화재청이 붙인 공식 명칭이도기 바퀴장식 뿔잔,

높이 18.5cm, 길이 24cm의 이 가야 이형(異形)

토기는 보물 637호이다.

출토지가 확인되지 않은 이 토기는, 가야 전성시대인

5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적으로 보아, 흑회색의 바탕은 마치 쇠가

녹슨듯 한 색깔을 띠고 있으며, 전형적인

가야 토기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는 말 모양,

배 모양, 오리 모양, 인물 모양 등의

토기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하면서 환상적인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 이형(異形) 토기의 받침은, 이 시대에

제작된 굽다리접시(고배,高杯)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이 벌어진 나팔형으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굽구멍(투창, 透窓)

 

 

청동사리함 경주 동천동 출토 8-9세기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는 동탑과 서탑에서

사리 맞춤이 따로 출토되었는데 사리갖춤은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는데

외함에 새겨진 사천왕 은 서역인을 연상시킨다

 

감은사지 3층서탑 사리갖춤내함 하나의 작은 불전

으로 만들어 졌다

 

황룡사터 목탑 사리갖춤(사리장엄구)

구층 목탑 심초석 사리공내 출토

신라 646-고려1438

금함과 은함 그리고 구술

 

 

 

망새

 

출토지:경주 황룡사 터

시대:신라7세기

높이:182.0cm

 

망새는 궁궐이나 크고 위엄있는

건물의 대마루 양 끝에 세운 대형의

장식기와를 말하며, 매와 같은

새 꼬리 모양을 하고 있어 치미라고도 합니다.

이 망새는 황룡사 강당자리 북쪽에서

수습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크기가 커서

통째로 구워내지 못하고, 위아래

두 부분을 따로 만든 후 중간에

구멍을 뚫어 묶었습니다. 

면에는 연꽃무늬와 사람얼굴이

표현된 부분을 끼워 장식하였습니다.

지난 날 황룡사의 웅장했던

규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황룡사 지진구

지진구는 큰 건물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을 누리기

위해 땅에 묻는 것을 일걷 말이다

 

각종지진구 (가위 칼 펄찌 방울 침통 허리띠 장식등)

청동거울

청동풍탁

청자 대접 청자접시조각 관이 새겨진 백자조각 청자접시

 

 

추정복원도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643(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慈藏)의 요청으로 건조되었다 한다.

그러나 645(선덕여왕 14) 처음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4 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 완공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는 황룡사 구층탑지 심초석(心礎石) 안에서 도굴된

신라황룡사찰주본기(新羅皇龍寺刹柱本記)에서 비롯한 것이다.

아홉 개의 층은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고

탑을 세움으로써 이웃의 침해를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698(효소왕 7)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어 웅장한 모습을 유지해왔으나

1238(고려 고종 25) 몽골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려 그 후로는 중수되지 못하였다.

 

 

 

 

 

반가사유상

 

경주송화산 7세기

반가사유상을 보며 놀라웠다 바티칸시국에서

보았던 그리스 명품조각상 투르소처럼

강한 힘과 생동감을 느낄수 있는 불상앞에 서있어

긴장했다

커다란 돌 하나로 조각된 반가사유상은 두팔과

머리는 깨어져 남아있지 않지만 남은 높이로보아

건장한 성인남자의 신체와 가깝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위에 올리고

벗은 윗몸에 목걸이를 하고 있다

아랫몸에 걸친 치맛자락은 서로겹치며 주름지고

끝자락에서 물결을 이룬다

발가락과 발톱까지 나타낸 왼발은 연꽃을 딛고 있다

바위에서 연꽃이 막 피어올라 성스러운 부처님

발을 받치고 있다

후대의 불상에서는 이러한 사실적인 표현은 사라지고

형식적인 느낌이전부이다 (출처:경주박물관)

 

 

 

바티칸 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헬레니즘 미술을 대표하는

조각상이라 할 수 있는 일반적으로 토루소라 부르는 작품인

벨베테레의 투루소(Torso Belvedere)이다 짐승 가죽을 깔고 앉아

있는 남성의 상체 몸통만 남아 있는 작품으로 아테네인 아폴로니오스가

조각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가 이작품에 심취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는데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볼수도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