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6월17일
대릉원에서 나오자 다음목적지를 선택해야 했다
경주국립박물관 21시까지 개관이고 불국사는 18시
까지 개관한다 하니 당연 불국사가 먼저다
불국사는 몇 번 왔지만 올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첨성대에서 15000원 편도택시 요금을 지불하고
불국사에 내린다
불국사는 국보가 많다 천년의 세월의 품격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찰을 우리는 구석구석 구경을 하였다
사실 불교를 말하지 않고는 신라를 설명하기 어렵다
신라의 불교를 말하기 위해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이차돈과 법흥왕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15년(AD 528년)조를 보면 불법이
퍼지기 시작하는데 계율과 불경을 들어 법흥왕이
불법을 흥하게 하려고 하자
난신들이 비방과 모략으로 불법을 물리치려하였다
이에왕이 난처해 하였으니.
이차돈이 왕께 이르기를 “청컨대 제목을 베어
여러사람들의 물의를
잠재우소서“하였다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찍은 이차돈순교 석상
이차돈 순교비 /경주시 동천동 백룡사출토
높이 106cm 국립경주박물관소장
이차돈이 순교한지 290년이 지난 818년(헌덕왕10)
그를 추모하여 세운 6면 비석이다
새겨진 글씨는 거의 판독불가하나 읽을수
있는 단어들 중에는 “삼국유사”의 이차돈 순교
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이 있다
인물의 옷은 부인의 통치마 같은 하의에 허리까지
덮는 상의로 신라복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묘사된 이차돈의 순교
장면은 좌측에 법흥왕이 있고 가운데
죽음을 맞는 이차돈이 보인다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솟아오르고
어두워진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졌다
왕이 이르기를 “본래가 도를 가르쳐 불법을
깨우치려 함인데 어찌 사람을
죽여 어지럽게 한다면 그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
이차돈이 답하기를 “제가 비록 죽더라도 도를 펴게
된다면 유감이없습니다.
난신들이 들고 이러나 요괴라 괴상한 말을
퍼트리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후환이 두려우니 죽일것을 말하였다
이에 왕도 형리들을 불러 참할것을 명한지라
이차돈이 말하기를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는다 만약부처가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을때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날것이다.하였다.
과연 목을 베자 피가 솟아 나오는데
빛깔이 젖처럼 희였다.
여러 사람 들이 충격으로 괴히하게여겨 다시는
불법을 비방하지 못하게
되었다....이로 인해 법국이 되었다.
佛國寺古今創記 에 따르면 동시대 법흥왕15년
528년 법흥왕의 어머니迎帝부인이 새로운 사찰
건립을 소원 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는데
건립후 574년 진흥왕의 어머니인 只召부인이
절을 크게 중건 비로자나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하였다 하고
문무왕10년(670년)에 無說殿을 새로지어
華嚴經을 가르쳤다 한다.
그후 경덕왕10년(751년)에 金大城이 절을
크게 개보수하면서 오늘날 상징물
탑과 성교등이 만들어졌다 한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불교윤회설에 따라
전생의 부모님을 기리기위하여
설불사(석굴암)을 만들고 현생의 살아계신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 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다보탑 석가탑등 그러나
그들은 壬辰倭亂의 7년전쟁으로
초토화 되어 창건당시의 옛 모습은 화강암의
초석다리만이 창건당시의 것이라
이른다 끝이없는 倭針 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택시기사의 조언은
대웅전 뒤뜰 탑이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좋은 작품이 된다하여
그곳으로 가서 생각에 잠겼다
천년사찰 풍경소리
둥근 추춧돌은
업을세고 있으며
大僧을 세고있다
파계승 원효는 법사상가요
요석공주 꼬드겨 설총을 얻는구나
의상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를 얻는구나
김대성의 효심으로 이승은 불국사에서
저승은 석굴암애서 편히 쉬어가련다
떠돌이 혜초는 구역만리
고향을 그리는구나
걸터앉은 나그네는
나이를세고 있구나
작년에 했던일이 올해 우숩고
어제 했던일이 오늘 부끄러우니
업을 세는 추춧돌
세월 세는 나그네
갈길 몰라 하누나
다보탑 석가탑은 아름답고 예술적이다
현진건의 무영탑이 연상 되는 곳
아사녀의 슬픔, 오해로의 못에 투신
아사달을 사모하여 불속으로 뛰어든 귀족 주만
아내 아사녀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
하는 석공 아사달 소설에 묘사된 아름다운
다보탑 은 천년을 두고 빛나고 있었다.
석가탑을 완성하여 그 그림자가 연못에
비춰지기만
기다리던 아사녀 그림자 없는 무영탑
석가탑은 빛나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답다.
물과 불 고행 작가의 심오한 정신세계에서
1200년 된 석탑의 세련된 모습에서
예술의 혼을 본다.
온고지신 천년을 살아온 옛것 석가탑 다보탑 에서
새로운 것을 말한다...
차라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놓은 빛을 찾으리라
불국사 평면도
천년고도 경주의 대표적인 절집 불국사의
천왕문에 있는 사천왕상들입니다.
불국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느 절집 못지 않은 대규모의
사천왕상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천왕은 하늘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4지역을 관할하는 신격적 존재로서
부처님이 계신다는 수미산의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사바세계의 사람들이 불도를 따라 사는지 살피어
사람들을 올바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경주 불국사 당간지주(慶州 佛國寺 幢竿支柱)
불국사 경내 입구 대석단 앞에 동서방향으로 2쌍이
나란히 서있는 당간지주이다.
2012년 10월 22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제446호로
지정되었다.
청운교, 백운교를 오르면 불국 세계의 관문격인
자하문에 다다른다.
이 문은 가람 배치상으로는 중문(中門)에 해당되는 문으로
이 문을 통해야만 대웅전 일곽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문은 불국사 창건 때부터 세워졌겠으나
그 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고 지금의 문은
여러 차례의 중건, 중수되었다고 전해오나 1966년
수리 때 발견된 자하문 상량문에 의하면 건륭 46년(1781)에
중수된 것으로 최종 기록이 발견되었다.
1973년 불국사 중창 복원 때 남회랑을 이 문에
붙이면서 측면 일부가 개조된 바 있다. 이 문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다포식 팔작집으로
도리칸 중앙열 기둥에 판문을 달아 개페하도록 하였다.
건물 기단은 야트막하게 마련하였는데 이는 대석단
위에 건물이 세워지므로 별도의 높은 기단이
필요가 없어 얕게 하였던 것 같다
국보 제23호 /백운교 청운교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보22호/연화교 칠보교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범영루
원래 이 종각의 이름은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으로
수미산(須彌山) 모양의 8각 정상에 누각을 지어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로는
오장간(五丈竿:50자 높이의 칸)을 세울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수미산이란 세계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산으로 그 중턱에는 사천왕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사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원래의 형상은, 인간의 온갖 번뇌를 상징하는
108번뇌를 사그라지게 하기 위하여 수미산 꼭대기에
우뚝선 누각을 구현한 것입니다.
중앙에 자하문을 두고 그 왼쪽의 수미범종각을, 오른쪽의
좌경루를 둔 것은 범부의 세계를 떠나 불타의 세계로
나아가는 다양한 방편을 제시한 것으로 보여지고,
그런 점에서 이곳을 종루로써 이용하고, 좌경루에는
불경을 보관하는 누각으로 재현하는 것이 보다
더 당초 건축자의 의도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범영루는 751년에 창건되고 1593년 임진왜란
때에 왜구들에 의하여 불탄 것을 조선시대
두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가, 1973년 복원공사 때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된 것입니다.
좌경루(左經樓)
좌경루의 다보탑과 범영루의 석가탑
화랑에 가려 잘보이지않는곳에 단순한팔각주의
좌경루는 화려한 다보탑이 앉아있고
복잡한 모양의 범영루에는 검소한
석가탑이 앉아있다
눈에 뜨이게 좌우를 맞추는것은 누구나
할수있지만 화랑속에 쓸쩍 감추어두고
조화롭지않은듯
조화를 마춘것은 비대칭속의 대칭 이라
하는데 마음의 눈으로 보는 미학이라합니다.
다보탑(多寶塔)은 경주 불국사에 있는
하대 신라 시기의 석탑이다.
국보제20호이며,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석가탑과
상대하여 위치하고 있다.
2008년 12월부터 1년간 원형 복원 작업을 거쳤었다
535년 법흥왕 22)에 창건하여, 751년(경덕왕 10)
김대성의 발원으로 불국사가 중건될 때 함께
수축(修築)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일제 강점기에 보수되기까지
유물의 대부분이 훼손됐다.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으로 현재 상륜부(相輪部)에 보주(寶珠)가 없을 뿐
그 외는 완전한 것으로, 높이 10.4미터이다.
순백(純白)의 화강암(花崗巖)으로 방형(方形)의
기단(基壇)과 사방에 계단과 난간(欄干)을 만들었다.
초층(初層)의 중앙과 4우(四隅)에 방형 석주를 세워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그 위는
팔각 삼층인데, 제1층은 4각으로 난간을 두르고,
제2층은 죽절형(竹節形) 기둥 8개에 싸인 탑신부
둘레에 8각의 난간을 두르고, 제3층은 귀두 모양의
옥개석을 받치고 있으며, 상륜부에도 각 층마다
변화를 주고 있다.
이 탑 기단의 4우에는 돌사자가 있었으나,
그 중 세 개는 일제감정기때에 일본인 들이가져가
못생겨 가져가지않은 한 개만 극락전(極樂殿) 추녀 밑에 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慶州佛國寺三層石塔)은
경주 불국사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삼층석탑이다.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釋迦塔)이라고도 한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에서 따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다보탑과 나란히 서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거북이 등 위에 올려져 있는 큰 북이 법고 인데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을 불전 사물이라 하여
예불을 올릴 때 사용합니다
법고는 지상의 온갖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울립니다
법고는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한 쪽에는
암소가죽을 대고
다른 쪽에는 황소가죽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법고는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시작하기 전인
오전 3시 30분과 오후 6시 30분경에 불전사물과
함께 울리는 것이 라고 합니다
법고를 치는 방법은 마음심(心)자를
그리듯이 친다고 합니다
보물 제1744호 대웅전
불국사에 대한 문헌은 삼국유사와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 대웅전중창단확기
(大雄殿重創 丹雘記)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년,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년,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
(...景德王代 大相大城以天寶十年辛 卯始創佛國寺,
歷惠恭世,以大歷九年甲寅十二月二日大城卒,國家及畢成...)'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 (751)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세종 18년(1436년)에 중수하였으며,
성종 21년(1490년)과 명종 19년(1564년)에 중수가 있었으나,
선조 26년(1593년)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
그 후 효종 10년 (1659년)에 중창된 후
숙종 3년(1677년) 번와 보수, 숙종 34년(1708년) 서쪽 기둥 교체,
영조 5년과 영조 6년(1730), 영조 7년에 개와(蓋瓦)를 보수하였다.
조선 영조 41년(1765년, 乙酉)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조 41년(1767년) 단청이 완료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後佛幀)을
영조 45년(1769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 바 있으며,
이어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도 개수되었다.
그 뒤 또 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 대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무설전은 불국사에서 가장먼저 만들어진
건물로 신라문무왕10년에 왕명으로 무설전을
세우고 법화경을 강의하였다 한다
무설이란 진리의 설법은 언어를 빌지않고 설법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무설전은 부처님의
설법을 바르게 설법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건물은 여러차래 개축되다가 1971년에
현재규모로 지어졌다
비로전은 대웅전 영역 뒤편 높은 대지 위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비로전은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신 건물로『화엄경(華嚴經)』에
따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중심 전각이다.
경덕왕 10년 불국사의 창건과 함께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옛 건물은 소실되었고
조선 顯宗 1년(1660년)에 중창되었으나
그것도 조선시대 말기에 소실되어 터만 남게 되었다.
현존하는 비로전은 1973년 불국사의 대복원공사 때
새로이 조영된 것이다.
그러나 기단과 계단, 초석은 경덕왕 10년 창건
당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불국사 비로전에는 협시불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비로전 왼쪽 아래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셔놓은 대웅전이 있다.
왼쪽 협시불이다 오른쪽 협시불은 비로전 오른쪽 아래에 있는
극락전의 아미타부처님이다. 이렇게 보면 불국사는
삼신불을 법당건물로서 절묘하게 배치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불교에서 비로자나부처님이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큰지를 불국사 구조물은 묵시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하는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한 법당이다.
불교교리가 점차 확대 발전됨에 따라 부처님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마침내 법신(法身, 비로자나불),
보신(報身, 노사나불), 화신(化身, 석가불)이라는 이른바
삼신불사상으로 정착된다. 바로 그와 같은 신앙을 기반으로
조성된 삼신불을 모신 법당이 곧 대적광전이다.
또한 이 불전은 대광명전 · 대광보전 · 보광명전 ·
비로전 · 화엄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그 가운데 대광명전은 대광명을 발하는 화엄
연화장세계에서 유래된 말이며,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단독으로 봉안하는 전각에 주로 사용된다.
아울러 화엄전은 화엄세계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며,
대적광전은 연화장의 세계가 대정적(大淨寂)의
세계라는 뜻을 함축하는 것으로 삼신불을 모신
법당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관음전
불국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관음전은 불국사의 중심영역인 대웅전과
무심천 뒤편 연덕에 위치한 불전으로
경사가 상당한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건물의 크기는 별로크지 않고 특징적인
면은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신앙의 대상으로는 중요시되는 곳입니다
관음전 건물은 70년대 새로 중수한 건물로
내부에 있는 후불탱화 천수관음도가
유명합니다
불국사 극락전의 편액 뒷쪽 공포 위에는
한마리의 돼지상이 있다.
사람들은 이 돼지를 복을 가져다주는 '황금돼지'
또는 '복돼지'라 부른다
이 돼지는 길이 50㎝ 가량에 나무로 다듬어져 있으며
황금빛을 띠고 있으나 뾰족한 입,
날카로운 눈매가 금방이라도 뛰어 나갈 듯
역동적인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입가에는 송곳처럼 생긴 흰색 이삘이 있어
집돼지라기
보다는 야생 멧돼지에 가까운 형상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국사가
전소되었을 때 이 극락전도 함께 불탔고
중건된 것은 조선 영조 때인 1750년이니 아마
이 돼지상도 중건 당시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편액 뒤에 꼭꼭 숨어 있다가 257년만에,
불국사를 찾은 한 관람객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극락전은 1750년 이후에도 몇 번의 보수를 거쳤는데
어떻게 발견이 되지 않았을까?
돼지상이 발견된 것은 황금돼지의 해로
떠들석했던 2007년 2월이었다.
불국사 나한전에는 16분의 나한이 모셔져있다
16분의 나한들이 각기 다른 모습의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나한은 석가모니에게 교화를 받고 현세에 머물면서
정법을 지키는 제자로 해탈의 경지에 도달은 했으나
부처님이 되지는 못한 분들이다
나한전 주변의소탑들
그외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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