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홍회

경주박물관 경주여행5부

훼브스 2020. 12. 2. 18:44

 

2017년 6월17일

 

불국사에서 경주 국립 박물관으로 이동 합니다

의외에 무료입장입니다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바티칸박물관 북경박물관등 어느곳에도

뒤지지 않는 품격을 가진 경주 박물관이

무료입장이라니??

 

박물관은 그나라의 문화의 척도를 나타내는

유물을 전시하는 곳입니다

 

 

 

 

입장하고 나서 제일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에밀레종 이라 불려지는 성덕대왕신종

이었습니다

유수한 세월 갖은 풍난을 이겨내고도

어제 주조한 것처럼 당당하게 서있고 웅장한

종소리도 녹음되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박물관 관내 뜰엔 출토된 신라의 석조 예술품들이

자연스럽게 배치 되어있었습니다

신라역사관 옆으로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복제

품이 정교하게 장식되어 석양을 받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우선 신라 역사관부터들어가서 구석기

유물부터 시작하는 찬란한 신라문화를

감상합니다

 

이어 신라미술관으로 가서 불교석조

조각품을 감상합니다.

 

 

일본이 반납해야할 대표적 우리유물

 

 

감상내내 아쉬움을 떨칠수 없었는데

박물관만 오면 안타까운 사연은

수많은 유물들이 일제강점기에 불법 반출

되어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가슴아픈

현실이었습니다

 

 

 

경주 박물관 현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봉덕사(奉德寺)종으로도 불리우며, 높이가 3.6m

달하는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크기나 양식 면에서 볼 때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명문에 의하면 경덕왕(景德王)이 부왕 성덕왕(聖德王)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다음 대인 혜공왕(惠恭王) 7(771)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으며, 이 종을 제작하는 데 구리 12만 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 종은 어린아이를 집어 넣어 만들었다는 전설과

함께 종소리가 어머니를 부르는 듯하다고 하여 '에밀레종'이란

이름으로 우리 에게 더욱 친숙하다.

종의 세부 형태를 살펴보면, 용뉴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으며 목 뒤로 굵은 음통이

부착되어 있다.

대나무 가지처럼 마디가 새겨진 음통에는 위로부터

앙복련(仰覆蓮)의 연판무늬 띠와 그 아래에 꽃무늬가

장식된 띠를 둘러 3단을 순서 대로 배치하고, 제일

하단에는 위로 향한 앙련이 새겨져 있는데,

각 연판 안에는 돌기된 꽃무늬 주위로 유려한 잎이 장식되었다.

 

특히 음통 주위를 작은 연꽃으로 두르고 다시 천판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연판무늬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범종이 잘 보이지 않는 천판 부분에까지

얼마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 제작하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상대에는 아래 단에만 연주무늬가 장식되었고

대 안으로 넓은 잎의 모란당초(牡丹唐草)무늬를

매우 유려하게 부조하였다.

상대에 붙은 연곽대에도 역시 동일한 모란당초무늬를

새겼다. 한편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오리는

상원사종과 달리 돌출된 형태가 아니라

연밥이 장식된 둥근 자방(子房) 밖으로 두 겹으로

 8엽 연판이 새겨진 납짝한 연꽃으로 표현되어 매우 독특하다.

이러한 형태는 나중에 운주지(雲樹寺) 소장 종이나 조구진자

(常宮神社) 소장 종과 같은 89세기 통일신라

범종에까지 계승되는 일종의 변형 양식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이뿐만 아니라 주악천인상과

종구(鐘口)의 모습 등이 다른 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있다.

즉 종신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향로, 병향로(柄香爐)

받쳐든 모습의 공양자상(供養者像)이 앞뒤 면에 조각되었는데,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往生極樂)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몸을 옆으로 돌린 공양상의

주위로는 모란당초무늬가 피어오르고 머리 뒤로

천의를 흩날리고 있다.

 

 

 

 

 

 

 

 

 

석탑 몸돌에 부조로 새겨진 불상

 

 

 

 

 

 

 

 

 

 

석조 관음보살입상

경주남산출토 통일신라8-9세기

원래 머리와 몸체는 따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머리는 일직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몸체는

경주 남산서쪽 기슭 능지탑근처에 반쯤 묻혀있었다

그러다가 1975년 몸체를 조사하다가 그마을에 살던

노인에게서 이불상과 달리 길쭉했다 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또한 1997 4월에는 몸체가 묻혀있던 부근에서

연꽃대좌를 발견하게 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석조불입상

경주 양북면 장항리 한 절터에 흩어저 있는 것을

복원한 것이다

장항리 절터에는 오층석탑2기와 불상대좌가

남아있다이불상은 하반신은 없는데도 서있는

불상이라 부르는 근거는 불상대좌에 불상을

세우기 위한 측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신라 역사관 전경

 

 

 

신라역사관 가다록

 

 

 

 

 

 

반구대 탁본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州 大谷里 盤龜臺 岩刻畫

:Bangudae Petroglyphs)는 울산광역시 태화강 상류의

 지류 하천인 대곡천의 절벽에 새겨진 그림이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너비가 약 8m, 높이 약 5m

주변 10여개의 바위에도 암각화가 확인 된다.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새겨진 것으로 추정한다.

반구대 암각화는 지금까지 지구상의 알려진 가장

오래된 포경유적이다.

2010 1월 울주 천전리 각석과 함께 '대곡천

암각화군'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하지만 암각화가 사연댐의 완공된 1965년 이후인

1971 12월에 발견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수위가 상승하여

1년 중 6~8개월 동안 잠기면서 훼손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보존 방법을 놓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말머리 가리개 5세기 경주사라리 출토

1995년 경주사라리5호 덧널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치열한 전투에서 말을 보호하기위한 것으로

여러장의 철판을 조립하여 만들었다

 

판갑옷 4세기

 

1995년 경주사라리5호 덧널 무덤에서 출토된

투구는 볼 가리개와 이마를 보호하는 쇠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머리윗쪽을 보호하는 복발이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천마총 금관

은제 관모

금동관

 

 

 

 

 

 

보물 620호 유리잔

 

1978년 12월 7일 보물  제6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7.4cm, 입지름 7.8cm.  

부장궤()의 남동쪽에 있던 은제 합() 북쪽에서 

 금동제 합과 함께 출토된 2개의 유리잔 중 하나이다.

청색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고, 다른 하나는

담록색으로 받침이 붙어 있었던 자국이 있으나,

파손되어 복원이 불가능하다.

유리의 질은 기포가 없고 투명도가 높은 양질이며,

구연부가 약간 밖으로 꺾여져 있다.

전체 모양은 하반부가 약간 좁아진 깊은 U자형이고,

밑부분이 닿는 부분만 누른 평저()이다.

구연부 밑에서 몸통의 상반부에 걸쳐 굵은 

 수직선조문대()를 조식하고,

그 아래 몸통에는 귀갑형(龜)의 면을 깎아낸 듯

문양을 장식하였으며, 이 문양은 유리잔이 굳어지기 전에 

 틀에 눌러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풍의 18짜리 장식 보검(단검)

 

신라에도 서역 사람들이 건너와 살았을까. 페르시아,

아랍,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온 서역인들이 한반도

신라에 정착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심증가는 유물은 꽤 있다. 경주 계림로 14호분의 페르시아풍

장식 보검(단검)을 비롯해 황남대총과 천마총의 로만글라스

유리잔, 괘릉(흥덕왕릉)의 서역풍 무인상 등등….

문제는 결정적 유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별히 주목받은 유적이 1973년 5월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 지구 정비사업을 위해 배수로를 파다가

우연히 발견된 6세기께의 계림로 14호 고분이다.

동서 3.5m, 남북 1.3m에 불과한 봉분도 다 깎인 외관이었지만,

지하 돌무지덧널 묘실 속에서 세개의 태극형 무늬가

보석으로 장식된 페르시아풍의 18㎝짜리 장식 보검(단검·사진)과

숱한 귀금속 말갖춤, 장신구 등 보물 200여점이 쏟아졌다.

1500여년 전 묻힌 무덤 주인은 누굴까. 국내 유일한

서역인 무덤일 것이라고 입에 오르내렸던

이 유적에 대해 약 40년 만에 최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결론을 내렸다.

‘14호분의 주인은 서역 보물에 관심많은 신라

진골 계통의 귀족 무사였다’고.




 

 

 

 

 

 

 

 

 

 

 

 

 

 

 

 

 

 

 

 

 

얼굴무늬 수막새

경주영묘사터에 출토된 기와에 사용된 수막새로

사람얼굴을 하고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신라의미소라 불리우는 이 수막새는

현재도 경주를 대표하는 이미지 상징물로

여겨지는 중요한 문화재다

친우 춘곡은 이수막새의 미소에 반하여 있다

 

 

 

이차돈 순교비 /경주시 동천동 백룡사출토

높이 106cm 국립경주박물관소장

이차돈이 순교한지 290년이 지난 818(헌덕왕10)

그를 추모하여 세운 6면 비석이다

새겨진 글씨는 거의 판독불가하나 읽을수

있는 단어들 중에는 삼국유사의 이차돈 순교

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이 있다

인물의 옷은 부인의 통치마 같은 하의에 허리까지

덮는 상의로 신라복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묘사된 이차돈의 순교

장면은 좌측에 법흥왕이 있고 가운데

죽음을 맞는 이차돈이 보인다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솟아오르고

어두워진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