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홍회

골굴사의선무도(경주여행12부)

훼브스 2020. 12. 2. 19:18

 

 

 

골굴사(骨窟寺)

2017 618

 

골굴사에 왔습니다 

깍아지른 바위 절벽에 보이는 부처상을보고

질려버린 두분 숙녀는 오르기를

중단하고 친우 춘성과함께 제일높은 곳에 위치한

보물 591호 마애여래좌상 까지 올랐습니다

본전 앞에서는 우리가락 창과 무술 선무도의 공연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선무도 수행도량으로

유명하며 관광객들에게 주말 매일 무술시범을

보여준다 합니다 수행자들은 외국인들도 많다고

하는데 과연 단복을 입은 이방인들이 많았습니다 

 

골굴사는

활발한 templestay (템풀스데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사찰에 머물면서 사찰의

일상 생활을 체험하고 전통문화와

수행정신을 체험해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골굴사 석굴사원에서 체험할 수

있는 명상과 선무도를 포함한 전통불교 수행법

으로 참된 자신의 내면을 보고자 많은 외국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일본교토 고산사에 원효대사

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골굴사는  한국불교의 큰별 원효대사가

열반한 곳으로 원효대사는

태종 무열왕의 2째 사위이고 요석공주 사이에

아들 설총이 있고 수많은 저서를 남기시고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분으로

70세 되던 해 음력 3 30일 이곳

혈사(穴寺)에서 입적에 들었다 합니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주었습니다

따라서 골굴사는 삼국시대와 신라때

부터 존립해 있었으니 모든것이 예사롭지 않고

보는것 마다 감개 무량합니다.

 

우리는 선택의기로에 서있습니다

한국의 소림사라 불리워지는 본전앞의 공연

을 볼것인가?

절벽 바위 에 새겨진 보물581호 마애삼존불을

볼것인가 삼존불을 보고오면 공연은 끝이납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없이 국보를 보러갑니다

오르는 동안 멀리서의 공연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자애스런  부처상앞에 섰습니다

골굴사 마애여래상은 9세기 삼국시대

신라 선덕여왕때  조성되었다 합니다

인도에서온 승려 광유가 기림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해지는곳입니다

석회암 재질의 암벽에 조성된 불상으로 골굴사

주불이라 합니다

동해를 바라보게 조성된 이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상호에 화려한 연꽃과 불꽃이 조화를

이룬 광배가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까지 사로잡고

멀리 바닷가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위험 하다 느낄 정도로 현기증나는 정상에 오르면서

공연 모습도 내려다 보니 참 여기는 재미있고

즐거운 사찰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시간 구애를 받는일이  없었다면 선무도 구경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선무도 스님들의 무술은 국난이 있을때 마다

승병들이 나라를 도탄에서 구한 모토입니다

그많큼 종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본것중엔 목잘린

부처상 해설엔 유림들의 작품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조선의 유림들은 신라의 불상들을 파괴합니다

서울 도성안에도 스님들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던

임진란때 오히려 휴정(서산대사)를 이은  

법흥사의 유정스님(사명대사)은 승병5천을

거느리고 평양성 과 한성을 탈환하는데 선봉에

서게 됩니다  

 

어느 한곳의 국지적이 아닌 인도에서 생성되어 

세계로 전파 해가는 불교와 유대에서 생성된 기독교는 

우리나라 민족정서에 깊히 뿌리내린 신앙입니다

 

 

 

 

 

 

 

 

 

 

골굴사 입구에 명견의 공덕비가 있어

흥미를 자아냅니다

 

동아는 내가 골굴사 주지로 부임한

1990년 겨울에 태어나

나에게 입양되었으며 겨울에 태어난 아이라 하여

동아라 불렀습니다.
강아지 때부터 새벽예불을 대중들과 함께했으며

모든 행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참선을 하고 탑돌이도 따라 하며 기도객들을

안내했습니다
보통 진도견들은 가축이나 산짐승들을 해치는

습성이 변하지 않았지만 동아는

살생을 하지 않았습니다.
KBS, MBC, SBS, 외국 TV 등에 여러 차례

방영되어 세간에 유명세를 타면서 20여 차례

강아지를 분양하여 1200여만 원을 사중에 보시하여

대적광전과 선무도대학 건립에 공덕을 지었으며

유럽에까지 그의 강아지가 분양되었습니다.
만년에는 치매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나

죽는 날 아침까지 새벽예불에 참석했습니다.
지난 음력 2 15일 극락보전의 아미타부처님

봉불식을 하루 앞둔 3 29일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그 나름의 생을 입적하기 위해 동아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절을 떠났습니다.
10여 일이 지난 뒤 오륜탑 언덕 넘어

양지바른 곳에서 동아의 죽음을 거두었습니다.
사중에서는 동아의 49재를 기부하고 매년

음력 2 15일을 동아의 기제사 일로 정했습니다.

모든 불자들은 그를 동아 보살이라 불렀습니다.
다음 생은 꼭 사람으로 환생하여 골굴사에

출가하는 인과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불기 2554(2010) 5 16

함월산 골굴사 주지 설적운 합장

 

동아의 손녀라합니다

 

 

 

 

 

 

아래 주요 해설은 안내이간판과 백과사전

주요국내외 싸이트의 내용들을 취합 편집한 것입니다

 

대적광전앞에서 공연모습

대적광전의 비로자나 삼존불

 

 

 

불교와 함께 발전한 선무도의 수행법은 신라 화랑도의

정신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신라시대 화랑은 곧 세상을 이롭게 할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신라의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정식으로

공인됨으로서 많은 고승들이 출현하여 신라의 정치

문화 및 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칩니다.

특히 불교의 사상과 수행법이 동인이 되어

발전된 화랑도의 정신은 호국불교의

원동력이 됩니다.
화랑도정신의 근원은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법사(圓光法師)에 의해 그 뿌리를 내립니다.

원광법사의 전기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속고승전,

삼국유사등에 전하고 있습니다.

원광법사는 일찍이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 장안에

큰 명성을 떨쳤으며

신라국왕의 명을 받아 서기 600년에 귀국한 뒤

왕을 도우며 불법홍포에 힘썼습니다.

한때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수()

원병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작성하라는 진평왕의

명에 "자기가 있기 위해 타를 멸하게 하는 것은

사문의 행위가 아닙니다.

빈도가 대왕의 국토에 있으면서 대왕의

수초(水草)를 먹습니다.

감히 유명(惟命)을 따르지 않으오리까?" 하며

그 명을 받들었습니다.

한때, 기산(箕山) 2인의

무사가 찾아와서 평생동안 지켜 나아갈

종신계(終身戒)를 구하고자 하였을 때 비로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리게 됩니다.
 
 이것은 불교도로서,
 첫째 나라에 충성하고,
 둘째 부모에 효도하며,
 세째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네째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다섯째 살생을 가려서 하라입니다.

 

 

 

 

선무도란

 

 

 

 

위빠사나’(vipasannā)라고 불리는 수행법으로 본래는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이라 하여 부처님 당시부터

전수되어 온 수행법입니다.

이는 깨달음을 위한 실천 방법으로 인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요가와 명상을

아우르는 관법수행입니다.

1960년대 양익(兩翼)스님이 흩어진 관법수련을

체계화하여 이를 승가에만 전수하였는데,

1970년대에 이를 설적운스님이 전수받아

대중포교(大衆布敎)를 위해 1985년도부터

선무도라고 칭하게 되었다. 합니다

선무도의 수련방법에는 선요가, 좌관법,

입관법, 행관법이 있다 합니다.

현재 선무도는 해외보급과

전문지도자를 배출하기 위하여 골굴사와

국내 대학에 특강 및 교양과목으로

개설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단법인 세계선무도협회 산하에 국내외

지원과 지부를 두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골굴사는 한국선무도 총본산입니다

 

 

 

 

관음굴 옛날에는 재래식의 온돌구조였다고 하나

현재는 마루바닥입니다

 

 

 

 

 

 

 

 

골굴사 산신당 여궁(女宮)과 남근바위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는 한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을 수용하면서 발전해왔습니다.

산 전체가 하나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골굴사는 불교가

정착하기 이전부터 바위를 신성의 대상으로 삼아 기원하는

샤머니즘 신앙이 발달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좌측의 남근바위와 정면의 산신상 여궁은

삼신을 빌어 자손을 기원하는 동경주 지방

정신문화의 산실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자손이 귀한 집안의 부녀들이 남근바위를

참배하고 난 뒤 산신당의 여궁(마루아래 위치)을 깨끗이

 소재하고 그 위에 앉아 밤 새 기도를 하면 이튿날

아침 여궁에 정수가 가득히 고이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곧 소원성취의 징표이기도 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합니다

지금도 매년 정월이면 그 인연으로 태어난 자손들과

가족들의 참배가 줄을 잇는다.합니다 <출처: 골굴사>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慶州骨窟庵磨涯如來坐像)

 

대한민국의 보물 제58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골굴암의 주존불로 동남쪽을 향한 암벽의

 4미터 높이에 새겨져 있습니다.

9세기 후반이라는 절대 연대가 밝혀진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동일한 양식입니다.

··입의 처리에서 형식화가 뚜렷이 진행되고 있으며,

평판한 신체, 직선적인 신체 윤곽선,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 무릎의 물결식 옷주름, 어깨의 V

옷주름 등에서 9세기 후반의 불상 양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위키백과

 

 

 

 

 

  겸재 정선의 "교남명승첩에 수록된  골굴석굴"

 

위의 고지도와 그림을 보면 경주 골굴사는 석굴사원의

모습이면서도 굴에 전각이 조성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광유성인의 창건이후 골굴사는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

 [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 1740년 편찬, 승려 방사파(方詞婆)편찬-.

 보면 조선시대에 당시의 모습을 잘 살필 수 있습니다.

산 북쪽에 천생석굴이 있으니 옛적에 십이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돌 빛이 결백하여

혹은 설산(雪山)이라 하며 혹은

단특산(檀特山)이라고도 한다. 합니다

매우 기구하고 험준하여 발붙일 곳이 없다 합니다.

돌을 갈아 발 디딜 자리를 만들고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속에 돌이 편편하여 방처럼 생긴 곳이 있어 돌을

베개하고 누우면 차지도 않고 훈훈하며 병자가

거주하면 병이 낫기도 한다. 합니다

그리고 굴벽에는 조각한 석불도 있는데 어느

때의 조성인지 알 수 없으나 연기에 끄슬려서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굴 위에 조각한 석불에서는 자주 서광이 빛나며

산곡과 동천석굴에 비친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적이 해마다 있는 것이다.“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12처 석굴의

모습이 남아 있었고, 당시의 골굴사가 석굴사원으로서

병을 치유하는 종교적 측면이 강조 되어 있고,

현재의 관음굴 내부 마애불과 현재 보물 581호로

지정된 마애여래불의 상서로운 이적 등이

묘사 되어 있습니다.

또한 칠언으로 된 시에서도 해동, 즉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조성된 석굴사원은 골굴사

뿐임을 잘 기록하여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