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홍회

석굴암에가다 경주여행9부

훼브스 2020. 12. 2. 19:01

 

 

2017618

 

우리는 석굴암에 왔습니다

주차장에서부터 석굴암 까지 15

숲길을 걷는데 다람쥐가 사람들을 따르며

먹이를 받아먹고 있어 누가 이르기를

제는 인간이 다되었다

하여 일행들이 웃었습니다

 

 

 

실지 우리나라 삼국시대 기록은 고려때 삼국사기인데

1145년 고려인종의 명으로 김부식이 8명의 인재들과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사료들을 참고로 만들어져 있고

대신 일연스님의 삼국유사는 개인적으로 쓴 사서지만

단군신화와 불교에대한 서술이 많이 있습니다

석굴암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합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합니다.

그 뒤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 중수하거나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정선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정선의 골굴석굴도.

 

1.현재의 복원된 전실

 

윗그림은 정선이 1733(영조 9)에 그린

'교남명승첩(嶠南明勝帖)' 2권 중에 있는 골굴석굴도입니다

이 화첩에는 석실 입구에 전실(前室)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어,

후의 복원공사에서 목조 전실을 만들게 된

근거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가 해체후 보수공사시 시멘트공사후

버려진 석굴 부속물 전시 이 부속물들이 완전하게

다들어가야 복원이 이루어지는데 현재의 기술로는

어려워 과학이 발전된 다음 후손들에게 맏기기로

하였다 합니다

석굴암 전실 로 입장

 

행사가 있는지 많은 불자들이 예불하고 있었습니다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동원하여 구축한 석굴암도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 의하여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탁월한 예술적 안목과 신심을 지닌 경덕왕의 뜻에

 크게 힘입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서라기보다

경덕왕의 원찰로서, 또는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찰로서 경영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대성의 발원은 신라국민의 염원이었고, 인공적인

석굴의 경영은 온 국민의 정성이 모임으로써 가능하였고,

또 그 찬연한 예술적 기품은 이러한 거족적인 호흡의

일치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고 할 것이다. 석굴의 건축적

구조가 신라인의 창의와 전통에서 이루어졌고,

수려하고 품위있는 불상은 그들이 연마한 정성에서 이룩되었다.

그것은 승화된 생활미학의 결정이며, 조국을

지키려는 강인한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먼저 전실에 들어서면 비도(扉道)의 정면에서 본존불을 볼 수 있습니다.

전실은 넓이가 약 3.5칸이고, 길이가 약 2칸 정도됩니다.

좌우의 석벽에는 4구씩의 팔부신중이 각각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면 좌우 석벽에는 입구를 향하여 2구의

 금강역사가 서 있어 항상 비도를 지키고 있습다.

이 전실의 구조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이루어졌던 까닭에 여러 가지 이설이 있어서,

아직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확정을 짓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전실에서부터 몇 걸음 나아가 좌우의 금강역사를 보면서

비도에 들어가면 약 2칸의 넓이에 길이가 1.5칸인

공간이 있습니다.

이 비도의 양측에는 좌우 2체씩 4체의 사천왕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상부는 아치형으로 덮여 있으므로 원래 전실에

목조건축이 없었을 당시에는 바로 여기서부터 석굴의

내부로 들어간다는 인상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석굴의 입구에는 좌우 2기의 석주가 있다. 한 변이

8촌인 팔각형 연좌 위에 서 있고, 중앙에는 연판의

장식이 가해져 있습니다.

이 석주는 비도와 굴을 구분짓는 경계의

뜻으로 건립되었습니다.

 

 


굴의 평면은 원형이고 좌우의 지름은 6.8m, 앞뒤의

지름은 약간 좁아서 6.58m이다. 중앙에서 가볍게

뒤로처진 곳에 높이 약 1.6m, 지름 3.7m의 석련대좌가 있고,

그 위에 본존불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높이 약 2.72m의

그 숭고한 모습에는 자연히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굴의 주위에는 10개의 요석(굴의 벽을 이루는 돌)이

놓여 있습니다.

요석의 높이는 약 0.2m, 너비 1.8m, 그 위에 다시

높이 약 2.42m, 넓이 약 1.2m2의 화강암 15면을

병렬시켜 석벽으로 삼고, 각 면에 엷은 부조의

석상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본존불 바로 뒤 중앙에는 십일면 관음보살의 입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좌우로 각각 5체씩 합하여 10체의

십대제자입상이 조각되었고, 다시 그 좌우로 각각

2체씩의 천 또는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조상에 새겨진 돌 위에 다시 긴 이마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또 한층의 새로운 다른 세계가 전개됩니다.

본존불의 바로 뒤 십일면관음의 위쪽으로는 복선단판의

광배가 새겨져 있고, 그 좌우로 각 5개의 작은 감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안에는 문수·유마·지장·기타의 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다만, 현존하는 것은 좌우 4체씩 모두 8체뿐이며,

나머지 두 개의 감실은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누군가에 의하여 일본으로

반출된 이래 지금까지 비어있게 된 것입니다.

 

 

 

1.석굴암 전실(前室)

 

석굴암의 구조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본존불이

계시는 주실과, 통로인 비도, 참배자가 참배를 드리는 전실로 나뉜다.

그런데 이들의 형태를 보면 주실은 원형이며 전실은

방형(네모꼴)으로 이것은 당시 신라인들의 사상인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형이다) 의 사상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개의 으로 원형 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이며, 석굴의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신장(八部神將,호위신)

두고 으며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은 김대성에 의해 751년(경덕왕10년) 에 창건되었다.

석굴암은 돌로 돔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만든

석굴사원으로 본존불이 있는 원형의 주실과 그 앞부분의

네모난 전실로 뚜렷이 구분된다.

 

전실 석벽 좌우에는 8체, 금강역사 2체, 사천왕상

 4체가 서로 마주보고 조각되어 있다. 맨 앞쪽

좌우각각 4체씩 조각된 팔부신중은 원래

고대인도의 신으로,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팔부신중 앞으로 용맹하고 날렵한 인왕상이

그 앞으로 수미산을 지킨다는 사천왕상이 각

조각되어 있다.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중상은 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 가지 모습의 신들이며,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고 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2) 8부신중 (八部神衆)

 

전실에 들어서서 좌우 양 벽에 각각 4구의 상이 있는데,

그것은 팔부신중 혹은 천룡팔부라고 부른다. 부처님의 권속

또는 불교를 수호하는 신중들의 조상이다.


현재의 조상에 나타난 각 상이 천룡팔부의 어느 상을

나타내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왔지만,

새로이 검토된 결과에 따르면, 지금 배열된 팔부신중의

순서는 반드시 일반적으로 각 경전에서 열거되는 바와 같은 순서

그대로는 아닌 것이 판명되었다.

여기에 나타난 순서대로 보면 대체로 부처님을 향해서

우측으로 가루라·건달바·천·마후라가 이며, 본존불을 향해서

좌측으로 입구에서부터 아수라·긴나라·야차·용의 순으로 되어 있다.

① 가루라 : 두터운 옷을 입고 신을 신었는데, 왼손에는

삼지창을 쥐고 있고, 두 귓가에는 새의 날개 모

      양의 것이 조각되어 있다. 다른 상에 비해서 훨씬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② 건달바 :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손에는 군지, 즉 깨끗한

물을 담은 그릇을 들고 있다. 이것은 건달바

      가 천상에서 지키는 소마의 영약을 담은

그릇으로 봄이 타당하다.
③ 천 : 머리 위에 화염을 표시하고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④ 마후라가 :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손은 가볍게 구부러진

손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손의 모습

     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복행, 즉 배를 땅에 대고 기어다니는 생태를 표

     현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⑤ 아수라 : 머리와 발 부분이 없어진 형태로 있으나,

삼면육비(三面六臂 : 세 얼굴 여섯 개의 팔)의 특징

    을 드러내고 있고, 옷은 아수라의 특징 그대로 별달리

입은것이 없다.

다만 가볍게 부분적으로 천을 감고 있을 뿐이다.

배에는 악귀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악귀를 정복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⑥ 긴나라 : 머리를 기르고 단정하게 서 있으며,

왼손에 삼차극을 쥐고 있다.
⑦ 야차 : 머리 위에 사자를 이고 있고 가슴 밑에 밧줄을

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⑧ 용 : 머리 위에 용을 이고 있고 왼손에는

구슬을 쥐고 있다. 용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시된 신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매우 중요시되었고,

호국의 선신으로도 간주되어  왔다</

 

 

 

(1) 8부신중의 의미와 형상

전실은 금강역사(金剛力士)의 앞에 있는 네모난 방을 말하는데,

이 곳은 하늘 아래서부터 지옥까지의대표자들인

팔부신중이 새겨져 있다

팔부신중은 석가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좌:천상

 

① 천(天): 천계에 거주하는 제신(諸神). 천은

삼계(三界:欲界 ·色界 ·無色界) 27천으로 구분되나,

지상의 천으로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도리천(忉利天:三十三天)이 최고의 천이며,  

제석천(帝釋天)이 그 주인이다.

 

이 상은 표식이 없어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세 갈래의 금강저를 들고 있는 것이 천(天)이다. 

천은 하늘의 형상을 인격화한 것인데 신라 말기의

천들은 삼고저를 들고 땅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자세인 것을 보면 땅을 보살피는 하늘의

신을 말하는 듯하다.

 

우:龍상

② 용(龍) : 물 속에 살면서 바람과 비를 오게 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 호국의 선신(善神)으로 간주되며

팔대용신(八大龍神)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생김새는 범의 눈에 돼지 입, 뱀 몸뚱이에 닭의

발을 갖고 있는 무서운 모양을 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비바람을 다스리는 제일 위력 있는 신으로 신앙되었다.

 

석굴암 전실의 용은사람의 몸에 사람 얼굴을

한 상인데 머리에 용관을 쓰고 있다.  바위대좌에

정면으로 서서 오른손을 첫째 손가락과 엄지를 짚어

법인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워

여의주를 들고 있다.

 

:야차(夜叉) 

③ 야차(夜叉): 고대 인도에서는 악신으로 생각되었으나,

불교에서는 사람을 도와 이익을 주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되었다.

 야차는 인도 신화에서 사람을 해치는 귀신을 말하는데 석가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9세기경 신라 탑에도

염주를 입에 물고 두 손으로 염주알을 헤아리고 있는모습으로 나타난다.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는 모습이다.

 

우:건달바() 상

④ 건달바(乾闥婆): 인도신화에서는 천상의 신성한

물 소마(Soma)를 지키는 신. 그 소마는 신령스런

약으로 알려져 왔으므로 건달바는 훌륭한 의사이기도 하며,

향만 먹으므로 식향(食香)이라고도 한다.

 

남벽 둘째상은 건달바 상이다. 건달바는 음악과

향기의 신이다. 

신라 말기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상으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융복 차림에 사자탈을 쓰고 있다. 

바위대좌 위에 발을 벌리고 정면으로 서서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표시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오른손 높이에 들고 무엇인가 설명하려는 표정이다. 

머리위에 사자탈은 웃고 있는 눈과 코가 보이고

드러난 이빨이 이마에 닿아 있다.

좌:아수라(阿修羅) 상

 

⑤ 아수라(阿修羅): 인도신화에서는 다면(多面) ·다비(多臂),

 즉 얼굴도 많고 팔도 많은 악신으로 간주되었으나불교에서는

조복(調伏)을 받아 선신의 역할을 한다.

 

얼굴이 셋, 팔이 여덟인 것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지옥의 왕으로

하늘의 신들과 싸운 인도교의 가장 무서운 신인데 석가

부처님의 교화로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신라시대에는

세 개의 얼굴에 여덟 개의 팔이 달린 사람으로 나타나는데

위로 든 손에 해와 달을 들고, 다른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다. 

 아수라가 여덟 개의 팔을 휘두르면 온 세상은 뒤죽박죽이 된다.  그

런 상태를 아수라장이라 하는 것이다.

 

 

 

우:가루라(迦樓羅) 상

 

 

⑥ 가루라(迦樓羅): 새벽 또는 태양을 인격화한 신화적인

새로서 금시조(金翅鳥)라고도 한다. 불교 수호신이 되었다.

인도의 새벽 태양의 신이 불교에서 불법을 설하는 곳의

수호신으로 표현되는 신중상이다.

 

석굴암에서는 두터운 옷을 입고 신을 신고 있는

입상으로 표현되었다.

왼손에 삼지창을 쥐고 있고, 두 귓가에는

날개 모양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실의 조각들보다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좌: 긴나라(緊那羅)상 

⑦ 긴나라(緊那羅): 인간은 아니나 부처를 만날 때

사람의 모습을 취한다.

 때로는 말의 머리로 표현되기도 한다. 가무의 신이다.

 

표식이 없어 무슨 상인지 확실하자 않으나 긴나라(緊那羅)

상이라 짐작된다

긴나라는 인비인(人非人)으로 사람과 짐승의 중간인

가상 동물이다. 

바위대좌 위에 정면으로 서서 오른손에는 칼을 들어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네 손가락을 굽혀 손바닥을

앞으로 보이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도 투구도 쓰지 않았고 철갑옷을 입었다.

 

 

 

 

우:마후라가상[摩喉羅伽]

 

 

⑧ 마후라가(摩睺羅迦):사람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음악의 신.

땅속의 모든 요귀를 쫓아내는 임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의 수호신 격이었던 것이 불교에서 팔부신중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왼손에는 검을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군지를 들고 있다.

 

 

‘천룡팔부중’에 관한 기록은 《법화경(法華經)》

등의 대승불교 경전에 보이며, 사천왕(四天王)의 

전속으로 기술되고 있다.

경주 석굴암의 조각은 경전의 묘사와는 달라

신라시대 신앙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1910년대 초반 일제가 보수하기 직전의 석굴암 팔부신중상 부

 

입구에 있는 팔부신중은 다른 팔부신중과 달리

90도로 꺾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규명을 위해선 석굴암의 보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붕괴 위험마저 보이던 석굴암을 보수한 것은

1913~1915년이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석굴암은 조각상들 사이가 서로 벌어져

뒤편에 쌓은 돌이 보일 정도였다. 일제는 본존불을

제외한 모든 부재(部材)를 해체한 뒤 다시 세웠다.

 

이후 습기가 차는 문제가 발생하자 1920년대 부분

보수를 다시 했고, 문화재관리국이 1961~1964년

또 다시 보수했다.

이때 전실 입구에 꺾여 있던 좌우 팔부신중 한 쌍을

다른 팔부신중과 일렬이 되도록 폈다. 여기서부터

전실 구조 논쟁이 시작됐다.

 

조선시대 이전에 석굴암을 상세히 표현한 그림이나 도

면은 없다. 일제가

보수에 들어가기 직전에 만든 ‘석굴암 재래 기초

평면도’나 세부 촬영 사진이 가장 오래된 자료다.

 

최근에 잇따라 공개되고 있는 당시의 사진을 보면

전실 앞부분은 한결같이 90도로 꺾여 있다. 따라서

석굴암의 ‘원형’을 이야기할 때 전실 입구 좌우측이

꺾였는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더 이상

 

 

석굴암 본존불상은 그 종교성과 예술성에 있어서 세계의

종교예술사상 탁월한 유산이다. 특히 간다라식의 어깨선,

두 팔과 두 손, 가부좌를 한 두 다리와 무릎 등이 인공적인

부자연스러움이 없이 부드럽게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본존불의 손은 촉지항마(觸地降魔)의 인상(印相)을 나타내며,

이것은 도가 이루어져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극치에

달한 때에 생기는 불가사의한 승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본존불의 석련대(石蓮臺)는 교묘한 형태와 뛰어난

조각솜씨로 본존불의 위용을 돋보이게 한다. 맨 밑에는

평면의 원형으로 된 2단 기대가 있고 이어 복련대가

새겨져 있는데, 복련의 연판은 32개로 웅대하고 화려하다.

전체높이는 약 1.6m, 최하부의 지름은 3.63m, 윗좌대의

지름은 2.72m이다. 석굴의 본존불상 바로 뒤, 전면을

향한 중앙에 지름 2.24m의 크고 둥근 돌을 새겨넣어

두광을 만들었다.

그 주위에 36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전체를 오목한 거울면처럼 만들어 전실에 서서 본존을

예배할 때 바로 본존불의 두광을 향하도록 구상되어 있다.

 

 

문수보살

 

 

본존불 바로 뒤에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은 중생교화를 위해서

11개의 얼굴모습을 갖추고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본존불앞에

좌우로 문수·보현 두 보살이 조화있게 배열되어 있다.

모든 조각상은 하나 하나에 조화와 질서가 있고,

그 모든 것은 전체로서 또 하나의 조화와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십일면관음신주심경(十一面觀音神呪心經)》에 십일면관음의

형상과 의미가 설명되어 있다. 석굴암의 관음은

전면에 화불 1면이 있고, 좌우에 각 3면,

위쪽에 3면, 정상에 1면을 가지고 있다.

 

십일면 관음보살상은 바로 본존 여래상의 뒷면 둥근

벽의 중앙을 차지하고 똑바로 서있다. 그 어느 조각보다

정교하게 조각되어 석굴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존불 바로 뒤에 배치된 이 조각의 양식적 특성은 무엇보다

 머리위에 작은 아홉개의 얼굴이 있고 그 위에 다시

한 관음이 있어서 본체와 합하여 십일면이 있는 관음

보살이란 점이다.

긴 몸에 섬세하게 표현된 천의와 온몸을 덮고 흐르는

 영락(纓珞)은 정교한 귀걸이나 목걸이 등과 더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관음보살은 이 세상의 생명체 즉 중생이 이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곧 바로 그 소리를 듣고서

그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노력을 기우린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관음(觀音) 또는 관세음(觀世音),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보살이라고 불리우며, 그 의미는

"소리를 본다"는 뜻이다. 보는 소리는 사물의

내재적 진리를 직관하는 것이아닐까?

 

본래 여래는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다섯가지

기관이 서로 그 대상을 바꾸어 작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하며, 명의(名醫)는 환자의 손을 만져보고도

그 병을 알고, 탁월한 연주자는 악보를 보기만 하여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관음보살의 뛰어난 구제력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하여 관음보살은 천수천안(千手千眼)관음으로

나타나고, 중생의 고통을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얼굴이 11면이 되는 자비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3방면으로 3면을 나타낸

까닭은 욕(欲), 색(色), 무색(無色)의 3계(界)를

화(化)하기 위함이며, 이 11면을 본면과 합하면

12면이 되는데, 그 11면은 방편면이요, 본면은

진실면이라고 한다.

 

이 방편면으로서의 11면 중 자비의 얼굴은 문(文)을,

진노의 얼굴은 무(武)를 나타내어 쌍을 이루는 것으로서,

선(善)한 중생을 화(化)하기 위해서는 다만 자비의

얼굴로써 하고, 악한 중생을 화하기 위해서는 진노의

얼굴로 악의 항복을 받으며, 선악이 뒤섞인 많은 중

생을 화하기 위해서 폭대소면으로 악을 비웃고

가책하며 선을 칭송하여 복돋우며, 깨끗한 업을 닦는

이에게는 백아상출면으로써 그 정진을 찬양함을 상징한다.

 

즉, 11면 관음보살은 자비와 진노, 폭소와 분노로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함을 나타내고, 그 상단에

그 모든 것을 여위어 모든 불꽃을 꺼버린 열반에 든

부처를 표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석굴암의 11면

관음상은 현재 11면 중 2면은 상실되어 그 후 보수된 것이다.

 

 

 

 

 

 

 

 

『조선 경주의 미술』에 수록된 석굴암 평면도

 

 

'석굴암'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한일'합방 직전인

통감부(統監府) 시대의 어느 경주(慶州) 우체부였다.

그날도 경주에서 출발하여 불국사를 거쳐 토함산(土含山)

동산령(東山嶺)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우편배달을 가던

이 우체부는 범곡(凡谷)근처에서 능() 같은 것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합니다

가까이 가보니 입구에는 문이 있고 천장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으로 가서 자기가 발굴하였다 보고하고

이를 인본으로 반출하기 위하여 해체작업을 진행중

한일합방이 되어 여기도 자기나라인데 반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일인들은 다시 보수작업에 들어갔는데

옛장인들이 만들은 과학적인 원형을 되돌릴수 없어

세멘트로 처리하여 습기와 이끼가 끼게 되고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방치되어 오다가

석굴암은 말라붙은 새똥과 이끼, 곰팡이가 피고

말았다.합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가 바른 시멘트로 인해

습도와 온도 유지가 어려워지고, 내부에 맺힌

물이 시멘트를 녹여 결과적으로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들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덮었다.

 

 

 

보수전의 석굴암 외부

 

 

 

천정이 파괴된 보수공사이전의 석굴암

[

 

일제식민지 시대의 1차 보수장면 

 

 

[출처] 세계문화유산 석굴암[石窟庵]이야기

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