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6월18일
경주 감은사지 (慶州 感恩寺址)
感恩寺지에 왔습니다 (국보112호)
저멀리 문무왕의대왕암이 있는 감포앞바다
가 보이는 절터로 신라때는 이곳까지 배가 들어와
계류하였다 합니다
그 장치를 보며 흥미를 가지고 탑과
절터에 대한 깊은 인상을 우리는 이야기 합니다
일연스님이 三國遺事에서 언급한것처럼 경주에는
기러기처럼 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신라곳곳에
수많은 탑들이 있었다 합니다
그리하여 신라는 석탑의나라라 불리울 정도로
탑과 불상의 전성시대 였습니다
물론 예술적인 다보탑과 석가탑을 견학하였지만
그들과 또다른 차별화가 있는 감은사지 석탑의
고풍스런 매력에 반하고 있었습니다
신라 문무왕(626년-681년)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둘째누이 문명왕후 맏아들로 본명은
김법민(金法敏)입니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신라에 계림대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려했던
당나라군대를 나당전쟁에서 격퇴 함으로서
676년에 위대한 3국통일을 이룬 신라30대 왕이입니다
통일을 이룬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위해
이절을 짓기 시작 진국사라 했으며
문무왕은 승려 지의법사에게 “죽은후
나라를 지키는 왕이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 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고, 그의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습니다.
감은사(感恩寺)로 사명(寺名)을 고친 것은 대왕의
별세 후 앞바다에 유언에따라 장사지내고 통일위업에
따른 대왕의 은혜를 감축(感祝)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그때 금당 아래에 용혈을 파서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합니다
이 금당은 감은사지 앞을 흐르는 대종천과 지하로
연결되어 있어 동해까지 이어진다는 설이 있다.합니다
이는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이 물길을 따라
감은사로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대왕암에서 왜구의 침입을 지키는
용이된 부왕 문무대왕이 드나들겠끔
금당밑은 특이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위 배(船) 계류 장치
감은사지 출토유물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 사리외함
(感恩寺址 西三層石塔 舍利莊嚴具-金銅舍利外函)
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西三層石塔 舍利莊嚴具)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西三層石塔 舍利莊嚴具)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西三層石塔 舍利莊嚴具)는
경상북도 월성군 감은사터에 있는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가운데 서쪽에 있는
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3층 탑신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이다.
사리를 모시기 위한 청동제사각함과 그 안에 있던
사리기로 구성되었다. 사리기를 넣었던 사리감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발견 당시 몹시 부식된 상태였다.
사각형의 상자의 윗면은 완만한 원뿔모양의 뚜껑이
있는 형태로, 전체 높이가 약 31㎝정도 된다. 사리함의
네 옆면에는 각각 사천왕상이 1구씩 별도로 주조되어
부착되었고, 그 양 옆에는 각각 동그란 고리가 달려 있다.
주위는 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모두 동판에
따로 새겨 작은 못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가장자리에는
꽃과 잎무늬로 가득 메운 가는 장식판을 이용해
단을 돌렸는데, 뚜껑의 둘레에도 마찬가지로 단을 돌렸다.
네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은 그 자세나 옷의 무늬가
중국 당나라의 조각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국적인 얼굴과 갑옷 등의 표현에서 오히려
중앙 아시아적인 요소가 많이 확인된다.
청동으로 만든 내부의 사리기는 정사각형의 기단과
사리병을 모셔 둔 몸체, 그리고 수정으로 만들어진
보주의 3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마치
목조 건축물을 연상케 한다.
사리기의 기단과 몸체 부분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나, 그 윗부분인 기둥과 전개 부분은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되었다.
사리기의 기단은 안상을 새기고 신장상을 배치하였으며,
기둥을 세운 형식이다.
기단의 맨 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중앙에 안치된
사리병을 중심으로 4구 주악상을 배치하였고,
그 사이마다 4개 동자상을 따로 끼워 놓은 구성이지만
완벽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사리병은 다리가 달린 화염보주형의 청동호 안에 안치되었다.
사리병의 뚜껑은 은제로 투조하였다. 사리함 내부에는
사리를 집을때 사용한 작은 숟가락 집게도 함께 발견되었다.
그 위에는 수정으로 만든 보주를 올려 놓았다.
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 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이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된 특수한 구조로
다른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해의 용(龍)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한 것 같다.
강당지(講堂址)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일부만
발굴되어 기단석과 초석들이 거의 완전하게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
회랑(回廊)은 강당의 정면어간(正面御間)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사지는 쌍탑식 가람으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탑 역시 한국 석탑의
대종을 이루는 신라양식의 석탑 중 양식적인
완성을 보이는 가장 오랜 것이다.(위키백과)
大王巖(문무대왕릉)
감은사지에서 감명받은 것은 문무왕의 호국에대한
열정으로 진국사로 그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위업에 감사하여
감은사로 개명하였다 하는것으로 단백 하고우아한 모습의
아름다운 예술성에 감탄을 하게됩니다
석탑뒤로 불국사 처럼 사찰을 복원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면 어떨까 우리는 의견을 주고 받았습니다
감은사지에서 버스로 10 여분?
대왕암에 이르니 길게 뻗은 백사장 앞으로
대왕암이 펼쳐집니다 용맹과 자비 그리고 애민
으로 죽음에 이르러 까지 나라를 걱정하였던 문무왕
춘성부부와 기념사진을 찍는데 옆에서는 무속 신앙인
들이 행사를 벌립니다 이곳은 해녀들도 고기잡이를
금기시하는 장소로 전국의 무속인들이 굿판을
벌리는 장소라 합니다 대왕의 의지의 기를 받기
위한 발원인가 봅니다
토암산 뒤쪽에서 발원한 동해천이 흘러드는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은 멀리서 보면 평범한 바위에
불과하지만 가까이가보면 한가운데 관처럼되어 있습니다
이 대왕암의 유래는
지금부터 200년전 1796년 무렵 경주부윤을 지내고있던
홍양호는 대왕암과 이견대를 방문하여 대왕암의전설을듣고는
그것을 삼국사기와 대조해보고 왕의 큰뜻을 가려 제물을
갖추고 제사를 지냈다고 그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
중 題(제목) “신라문무왕릉비”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또 세종실록 지리지 경주부 이견대조에 보면
이렇게 실려있습니다
“이견대 아래쪽 70보 되는 바다속에 돌이있어
4각의 높이 솓아올라 4문같은데 여기가
문무대왕의 장저이다
그리고 더거슬러 올라가
삼국사기 문무왕21년(681)조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7월1일 왕이 돌아가시므로 그 유언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바위에 장사 지냈다 세상에 전하기를
용으로 化하여 나라를 지킨다고하여 그바위를 가르켜
대왕암이라 하였다 왕이 유조에 말하기를 화려한
능묘는 한갓 재정만 낭비하고 거짓만을 책에 남기며
공연히 사람들의 힘만 수고롭게 하는 것이니
내가 죽은뒤 열흘이 지나면 곧 궁문밖 뜰에서
인도식(불교식)으로 화장하여라 . 라는 유언
대왕암은 전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아직도 용이되어 독도를 지키며 통일 한국을
염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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