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홍회

조지훈의생가 주실마을(경북투어6부)

훼브스 2020. 12. 5. 09:24

 

 

2017년11월19일

 

주실마을로 가고있습니다

경북 영양군 주곡리에 위치한 주곡마을을

소개하는데 한양조씨 그러니까 1630년 호은공

조전선생이 가솔들을 이끌고 들어와 살면서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이루어졌다 합니다

 

한양조씨를 소개하는데 조광조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 하였으나

한양조씨였던 장모님의 꼿꼿한 성품을 아는지라

성리학의 개혁파로 반정공신들의 음해로

사약을 받게되는 조광조를 떠올리게 됩니다

 

 

조광조가 국문 당 할 때 공술하기를

신의 나이가 38세입니다 선비가 세상에 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망녕되게 국가의 병통이 이()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명맥을 무궁한 후세까지 세롭게

하고자 하였을 뿐이고 조금도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였다 

 

이긍익(영조때 사람)의 연려신기술 인용

 

   

 

그 후손들의 집성촌 주실마을 로 들어섭니다

가이드가 이르기를 이곳에서 박사가 40명이

나왔다 합니다

청록파(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의 한사람

그분의 시는 학창시절 누구나 자주 대하였던

였습니다

 

 

 

 

 

슴무/조지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아서 서러워라.

빈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 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빰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여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이냥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의 주실마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속하는 주실마을은 북쪽으로

일월산이 있고, 서쪽에는 청기면, 동쪽은 수비면,

남쪽은 영양읍과 맞닿아 있다.

조지훈이 태어난 주실마을은 전통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와 개화 개혁으로 이어진 진취적인

문화를 간직한 매우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주실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이

마을 한복판에 널찍이 자리잡고 있고,

옥천종택(玉川宗宅: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

월록서당 등 숱한 문화자원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위키백과

 

* 조지훈 생가
시인이며 국문학자인 조지훈(1920∼1968)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조지훈은 경상북도 영양 출신으로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선생은 박목월·박두진과 공동으로 간행한

청록집의 시편들에서 주로 민족사의 맥락과 고전미

세계에 대한 찬양과 선(禪)세계를 노래하였는데,

유교 도덕주의의 격조높은 자연 인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
가옥은 몸체와 관리사로 나뉘어 있으며 몸체는

앞면 7칸·옆면 7칸 규모에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전형적인 영남 북부지방

양반가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대문과 중문에는 태극기를 조각하여 채색한 것을

끼워두었고 집 주위는 고풍스러운 담을 둘렀다.
이 집은 이 지방 주택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조선 중기 인조(재위 1623∼1649) 때에

조정형이 지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일부

불탄 것을 1963년 복구하였다.
이곳은 조지훈 선생 외에 한말의 의병장이었던

조승기 선생과 선생의 조부인 조인석 선생 등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분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 주곡동 옥천종택
한양 조씨 옥천 조덕린(1658∼1737) 선생의

옛 집으로 살림채인 정침과 글 읽는 별당인 초당,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된 17세기 말

양반 주택의 대표적인 예이다.
살람채는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ㅁ자집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앞면 5칸의

가운데에 대문을 달고 왼쪽에 안사랑방을 두고 있다.

 오른쪽에는 마구간을 고친 온돌방이 있고

부엌·고방이 있다.
살림채의 몸채는 양 옆에 꺾여서 위치하는 부분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안마당을

향하여 개방된 6칸 대청이 있다.

대청의 오른쪽부터 도장방·안방이 접해 있고,

안방을 마루쪽으로 1칸 더 내어 2칸으로 꾸몄다.

경상북도에 분포되어 있는 ㅁ자집 중에

대청과 안방의 윗머리에 도장방이 놓여있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이곳처럼 도장방의

바닥이 온돌이 아닌 마루로 깔려있는

예는 흔하지 않다.
초당은 조선 숙종 21년(1695)에 지은 것으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노인이 머무는 곳이다.

이 지역의 전형적인 평면구성을 보이며 있으며,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가운데 칸이 좀 넓다.

안채의 오른편 뒤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담장을 두르고 있다.
안동지방의 전형적인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으나

안방이 동쪽으로 오고 사랑방이 서쪽으로

배치된 점이 다르다.

이러한 형식은 18세기부터 안방과 부엌이

서쪽으로 배치되는 평면구성으로 통일된다.

 

 

* 월록서당
후학들을 교육하고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월하 조운도(1718∼1796) 선생이 의견을 내고

 한양 조씨·야성 정씨·함양 오씨가 주축이 되어

조선 영조 49년(1773)에 지었다고 한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를 가진 한 일자형

건물로 전망이 좋고 한적하여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를 만들어 대청으로 꾸몄고

양쪽은 방을 만들어 놓았는데 오른쪽은

‘극복재(克復齋)’, 왼쪽에는 ‘존성재(存省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간직한 건물이다.

 

 

만곡정사는 조선 정조 때 유학자 조술도(1729~1803)가

정조 14년(1790) 영양 원당리 선유굴 위에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만곡 조술도는 학문과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시, 문장 및 예의와 절차를 지키며 술을 마시는

향음주례(鄕飮酒禮)에 관한 의식 등을 수록한

『만곡문집』을 편찬하였다.

이곳은 제자들이 주곡동으로 옮겨 짓고 ‘마운정’이라

하였다가 다시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기면서

만곡정사라 하였다.

왼편 온돌방 뒤쪽의 수장공간 및 폐쇄형 마루 등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조선 후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