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12월15일
국립중앙 박물관
나들길과 용산 가족공원을
우리 부부가 산책하였습니다
직박구리 곤즐박이 박새 까치
참새 비들기 들이 숲속에서
오케스트라를 연주 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왔을때는 누런 참새보다 작은
콩새 떼를 보았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본관앞 못엔 비단잉어 가 놀고 있었지만
왠 일 인지 흔한 오리도 없었고
창경궁 춘당지에 겨울이면 모여드는
원앙도 없었습니다
아!! 천년의 석등을 직박구리란
녀석이 함부로 능멸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모두 정겹습니다
데이트즐기는 청춘
대나무 숲 그리고 각종 석탑의
보물들 자연과의 조화가
참 아름다워 태양빛에 반사되는
열매와 탑신은 예술이었습니다
갈왕사 동서 삼층석탑
758년 아름다운 비례를 지닌 쌍탑이
김천 갈항사(葛項寺)의 경내에 세워졌습니다.
발원자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의
어머니인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와
그녀의 오라버니,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간절한 염원을 담아 탑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건탑 후 27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계오부인은 황태후가 되었고 그
이후 발원자였던 세 사람은 탑에 기록되었습니다.
석가탑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비례미
신라의 삼국통일은 석탑의 모습에도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기존 신라와 백제로 대표되던 각기 다른 양식의
석탑이 하나의 모습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7세기 말 경, 경주의 감은사(感恩寺)와
고선사(高仙寺)에 세워진 삼층석탑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탑들은 마치 통일 왕조의 권위와 위용을 상징하는 듯,
안정적이면서도 압도하는 웅장함이 돋보입니다.
초층 탑신석 상단 중앙까지는 밑변이
긴 삼각형 구도로 안정감을 더하였고
층간의 높이와 지붕의 비례를 일정하게
체감시켜서 그러한 시각적
효과를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 초기 석탑의 안정감과
웅장함은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면서 비례의 경향이
세장(細長)함으로 바뀌게 됩니다.
탑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돌들을 결합하고
쌓는 방식도 규칙화·효율화되었으며,
밑변이 길었던 삼각형 구도 역시 밑변이
점차 좁아지는 구도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8세기 중엽에 이르면 하부의 정삼각형
구도와 절묘한 체감율이 적용된
신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석탑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석가탑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비례를
가진 석탑들은 경주를 비롯하여
지방에서도 유행하였습니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결실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가탑에 버금가는
비례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8세기 중엽에 유행했던
그 비례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국립박물관
영주영천사지보제존자탑
개설
보물 제358호. 1915년 원 위치에서
반출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당시 두 탑 모두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었다.
일제강점기 고유섭의 기록에 의하면 두 탑 중 하나는
조금 크고 상륜부에 연화가 새겨진
편평한 복발, 보병, 상륜 2개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방형 노반 위에 보륜, 보주 등이 있었다고 하며
그 중 보병이 없는 탑에서 탑지석이 나왔다고 전한다.
명문에 탑지석이 있는 탑을 본탑, 다른 탑을
동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크기와 형태로 볼 때 탑지석은 보병이 있는
탑에서 출토된 사리구와 일치하여,
현재 보병이 있는 큰 탑을 서탑, 보주가 있는
탑을 동탑으로 전시되어 있다. 원 위치에서
이동되면서 출토된 두 탑의 사리장엄구가
와전되어 전해지면서 발생했던 착오로 보인다.
1990년에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고궁박물관)
정원으로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다.
역사적 변천
이 탑들이 있었던 영전사지는 관련 기록이 전혀
전해지지 않으며, 1912년에 이 탑들을 조사하였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폐영전사지”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에도 유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된 절터였던 것 같다.
다만, 출토된 현 동탑 사리장엄구에 시주자
‘원룡(元龍)’의 이름이, 현 서탑 유물에서는
‘시주 원로(元老)’, ‘시주 원씨(元氏)’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납석제 지석 앞뒤 면에는 도인(道人)
각수(覺修)가 왕사 보제존자의 사리 1과를
주탑(主塔)에, 비구니 묘관(妙寬)은 보제존자
사리 1과를 동탑에 봉안한다는 내용과 함께
공덕주들, 석수와 노야(爐冶) 등의 장인들의
이름과 홍무 21년(1388) 무진 4월에 목사(牧使)
강은(姜隱)이 이를 기록하였음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1388년에 동, 서 쌍탑의
불탑 형태로 조성되어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고려시대 전형 양식의 석탑 모습으로 조성된
고려시대 후기 승탑으로, 현 서탑의 기단과
탑신부가 동탑보다 약간 크며 옥개석이
조금 얇다는 것과 상륜부 형태가
다르다는 점 이외에는 거의 동일한 모습이다.
기단부는 2층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
기단의 크기가 작다. 하층기단 하대와 중대석은
한 돌로 하단에 하대가 모각되어 있으며
4매의 부재로 결구되었다.
하층 기단 갑석은 서탑은 4매, 동탑은 2매로
구성되었으며 하단은 수평처리 되었으며,
상단에는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 호,
각의 괴임을 두어 상층 기단 면석을 받치고 있다.
상층 기단 면석은 4매로 엇물려 구성되었으며
갑석은 하단에 부연을 두고 경사를 약간 둔
상면 중앙에는 각, 호, 각의 괴임을 두어
위로 별석 받침을 두었다.
탑신을 받는 별석받침은 상, 하단에 각, 호,
각의 괴임을 가지고 있다. 기단부 상, 하층
면석에는 우주가 모각되거나 옆 면석의
측면이 대신하고 있으며 탱주가
각 1주씩 조식되어 있다.
탑신과 옥개석은 모두 각 1매로 조성되었으며
탑신은 초층에 비해 2층의 높이가
급격히 감축되었다.
그러나 폭과 전체적인 체감은 안정적이다.
탑신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었으며
옥개석 층급은 4단이다.
상륜부는 동, 서 승탑이 차이를 보이는데
서탑은 연화문이 조식된 편평한 복발형의
부재 위에 보병이 남아 있고 동탑은 상단에
얕은 2단의 테두리를 두른 노반 위에
보륜과 보주가 중첩되어 있다.
특징
부처님처럼 분사리되어 다른 여러 곳에서도
보제존자나옹의 사리를 봉안한 탑들이 조성되었다.
그 중 이 동, 서탑은 두 명의 시주자에 의해 동, 서
쌍탑의 불탑형으로 조성되어 특이하다.
또한 고유섭의 기록에 의하면, 서탑의 상륜부가
복발과 보병 위에 현재는 없어진
보륜 2개가 얹혀 있었다고 하여
라마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동탑의 모습도 라마탑을 한국적으로 표현한
양주 회암사지 부도탑의 모습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의의와 평가
고려 12세기 법상종에서 방형의 특수형
승탑이 조성되고 있기는 하지만,
보제존자의 탑은 분사리에 의해 다수가
조성되었음이 확인되고 그 형태도 구형탑신,
석종형 탑과 함께 심지어 불탑형 쌍탑이
남아 있어 당시 승려들에 대한 숭배의
정도를 짐작하게 해 준다. 이러한 현상은
여말선초에 집중되는데 특히 나옹의 스승인
지공선사와 나옹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온전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동,
서탑의 상륜부에는 여말선초에 영향을 미쳤던
라마탑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어 시대성을 보여준다.
한국민족문제연구소
여주 고달사 쌍사자 석등
통일신라시대에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다른 쌍사자 석등과
달리웅크린사자가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두 마리 사자가 불발기집(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석등이다.
통일신라에서부터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여느 쌍사자 석등과 달리
웅크린 사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이 석등은 고달사가 우리나라 3대 선원의
하나인 고달원高達院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홍제동오층석탑
이 석탑은 서울 홍제동 사현사沙峴寺 터에 있던
탑으로, 1045년(고려 정종 11) 사현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5층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에는 장식이 없으나, 2층 이상은 기둥모양을 새겨
한 면을 둘로 나누고 그곳에 문짝으로 보이는
네모난 액자형을 표시하였다.
지붕돌은 넓고 얇은 편이나 육중해 보이고,
두꺼워 보이는 처마는 수평으로 펼쳐지다가
양끝으로 치켜 오르면서 더 두꺼워진 듯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으면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새김법,
새로이 유행하는 탑신받침의 덧붙임, 그리고
벽 테두리 장식 등에서 고려 전기
석탑의 조형미가 잘 나타나고 있다
원주 천수사 오층석탑,
원주 천수사 오층석탑,
려초기 쌍탑식 가람배치를
위해 세운 오층석탑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중인 천수사지 오층석탑이다. 탑의 1층
기단은 남아 있지 않으며, 2층 기단과 5층의
탑신만이 남아 있다. 탑신 2층 몸돌부터
그 높이가 급격히 낮아 진다.
통일신라 삼층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전체적 구성요소간의 비율이 간결하지 못해서
조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통일신라 때부터 이어진 정형화된 쌍탑형식의
가람배치를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고려초 지방 호족인 경기도 광주지역 호족들이 세운
하남 동사지에 오층석탑과 삼층석탑이
나란히 배치된 쌍탑형식을 볼 수 있다.
원주 천수사지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원주 천수사 오층석탑. 고려초 오층석탑과
삼층석탑이 나란히 배치된 가람배치를 위해
세웠던 쌍탑 중 오층석탑이다.
기단부가 남아 있지 않다.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비례가
적절하지 못하여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조각수법도 떨어지는 편이다.
보신각종(普信閣鍾)보물2호
보신각종은 종로에 있는 종각인 보신각에 있던 종이다.
1985년까 지 섣달 그믐 자정에 종을 울리는
행사를 하였으나 종의 보호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오늘날 새해맞이 타종을 위해 걸어둔 종은
성덕대왕신종의 복제품으로, 본디
보신각종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높이 3.18미터, 지름 2.28미터,
무게는 19.66톤이며, 양식은 쌍두(雙頭)
용뉴(龍紐)로 되어 있고, 종신복(鍾身腹)에는
3조의 굵은 띠를 돌리고 있다.
또한 종구(鍾口)에는 윗쪽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2조의 띠를 돌리고 있어
이것이 하대(下帶) 역할을 하는 문양대로 되어 있다.
역사
보신각종은 조선 세조 14년(1468년) 에
주조되어 정릉사에 걸려 있었다.
이후 원각사로 옮겨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절이 불타 종루로 옮겨졌다.
고종 때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어 보신각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문화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알리는 기능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보신각종을 타종하는 행사를 갖는다.
1985년부터는 새로 만든 종으로 타종하고 있다.
국보 100호 남계원칠층석탑
남계원칠층석탑은.
국보100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입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이지만 신라의
양식을 따랐다고 하더라구요
이 문화유산에 대해 궁금하시면 자세한건
인터넷에서 찾아보세요
야외 석조물 정원에는 이 탑 말고도
정말로 많은 탑들이 있는데요.
시대별로 만들어진 시기가 달라서
그런지 생김새가 같은듯 또 다른 느낌들을
주더라구요. 뭐가 있는지
궁금한분들은 가서 보세요
정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시대 2중 기단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조 불탑.석탑. 국보.
내용
높이 7.54m. 석탑이 있던 곳이
개국사(開國寺)터로 알려져서,
개국사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개국사는
다른 곳에 자리하였고, 석탑이 있던 곳은
남계원이 있었던 곳으로 밝혀져,
석탑의 이름이 지금처럼 고쳐 불린다.
곧 석탑은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 남계원터에 있던
것으로, 1915년에 기단부(基壇部)를 제외하고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그 뒤에 원래 있었던 곳을 다시 조사한 결과,
땅 속에서 2중으로 구성된 기단부의
나머지 돌이 발견되어,
역시 경복궁으로 옮겨 졌다. 현재는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모두 조립하여,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 석조물정원에 자리하고 있다.
석탑은 2층의 받침돌 위에 7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놓은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따랐다고 할 수 있지만
세부 모습에는 변화가 있다.
여러 장의 돌로 구성된 받침 부분인 기단부는
현재 몇 장의 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보다는 훨씬 높아진데 반해 윗층 받침돌은
약간 낮아진 듯 보인다. 아래와
윗층 덮개돌은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윗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밑면에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가지런하고 다듬은 솜씨도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다. 몸돌에는
각 면마다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는데,
예리하게 조각된 신라 석탑과 달리 얕게
새겨져 퇴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은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졌는데,
밑면에 3단의 받침이 낮게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아무런 굄대도 없이 윗층의
몸돌을 받치고 있다.
낙수면은 평박(平薄)하지만 밑면의 받침이 낮아서
중후한 느낌을 주며, 추녀가 두꺼워지고 전각(轉角)에
이르러서는 윗면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반전되듯이 밑면도 이에 따라 반전되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때문에 이 석탑은 신라 석탑의 경쾌한
느낌과는 달리 경박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7층 지붕돌 꼭대기에 하나의
돌로 만든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 남아 있고,
그 외의 부재는 없어졌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2층 이상 탑신부의
체감률이 낮지만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결구
수법을 보여,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각 부분의 수법과 양식이 모두 일치하지
않으므로, 후대에 보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915년에 옮겼을 때, 몸돌에서 7축(軸)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
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고려 충렬왕 때에
사경(寫經)한 것으로, 1283년(충렬왕 9)에
석탑을 다시 수리하면서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민족문제연구소
정원의 미르폭포
"미르"는 용(龍)을 뜻하는 옛말로
박물관이 들어선 용산 지명으로,
우리의 전통조경을 엿볼수있게 꾸민공간의 "미르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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