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헬레나 또는 콘스탄티노스폴리스의헤레나(248-329)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첫 번째
아내이자 최초의 그리스도인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1세의 어머니이다.고대 그리스어로
“태양”이라는 뜻이다.
그녀와 관련해서는 수많은 전설과 전승.이야기가 내려오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 했다는 전설이 가장유명하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의 성녀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의
축일은 모두5월21일 이다
326년 헬레나는 에수의 행적의 발자취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와 함께 예수의
시신이 3일간 매장되었던 무덤을 발견하였다
헬레나는 예수의 무덤에 작은 기념성당을 건축하게 하였으며 십자가는
로마로 가지고 돌아왔다 그 녀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의 축일은 5월21일
이며 성녀 헬레나의 축일은 8월18일이다.
(위키백과)
콘스탄티누스1세 얼굴 조각상 포로노마노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내진에 놓여 있던 거상의 파편으로 현재 로마 카피틀리니 미술관
콘세르바토리 궁전 뜰에 놓여있다
현존하는 파편을 토대로 원래 크기를 추정한 결과는 12m높이의 좌상
으로 보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I, 274.2.27~337.5.22]
콘스탄티누스 대제. 고대 로마 황제(재위 306∼337).
정식 명칭은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 또는 콘스탄틴 1세라고도 불린다. 콘스탄티우스 1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제 퇴위 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재통일시켰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인한 황제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따라 갈레리우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하였다.
306년 아버지가 죽자 황제에 추대되었으나, 정통파 황제를 자칭하고 로마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꺾어야 했고312년에야 정식으로 황제 지위를 얻었다.
314년부터 로마 제국 동부를 차지한 황제 리키니우스와 대립하였으나,
323년 고트인(人)의 침입을 막아낸 후 리키니우스를 격파, 제국을 통일하여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원래 그는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나 그리스도교에 깊이 경도하여 그 자신도 그리스도교도가 되어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勅令)을 공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당시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박해를 중지시키고 교회의 사법권 ·
재산권 등을 우대하였다.
또한 북아프리카 도나투스파의 분파(分派) 문제도 조정하였으며,
325년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는 등 교회 내의 분쟁 ·교리(敎理)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한 통치 방식을 계승 발전시켜, 문무(文武) 관직의
기능을 완전히 분리하였고,
황제고문회의의 권한을 강화하여 중요한 정치에 관여시켰으며, 황제를 정상으로 하는
계급적 관료제도를 완비하였다.
또한 상비군 제도와 변경의 둔전병(屯田兵) 제도에 의거하여 군제를 정비하였으며,
사르마티아인(人)과 게르만인을 변경지방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야만족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행정적으로는 관료와 군대의 유지, 오리엔트식의 궁정조직과 의례(儀禮)형식의 채용,
대규모 건축사업 등에 대한 지출이 증대하였기 때문에
각종 세금제도(금을 납부하는 형식으로)를 신설하였고, 솔리두스 금화본위(金貨本位)로
화폐제도를 정비하게 되었다.
한편 이교적 색채를 불식한 그리스도교적인 도시로서 비잔티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라고 명명하였다(330).
그는 군인 ·통치자 ·입법자로서 제1급의 인물로 꼽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재건자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NAVER백과사전에서)
밀라노칙령 勅令
라틴어 Edictum Mediolanense
313년 2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Licinius)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6월에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되었다.
이 칙령은 리치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za)를 무찌른 후 오리엔트
총독에게 보내<박해자의 죽음에 대하여>(De mortibus persecutorum, 348)란 서한
속에 실려 있었고,이것이 다시 락탄시오(Lactantius)와 에우세비오(Eusebius)에
의해 인용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밀라노칙령은 양 황제의 의견차로 인하여 밀라노에서
공포되지 못하였고,칙령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형식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밀라노 칙령 勅令
영어 Edict of Milan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영구히 종교적 관용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한 포고령.
이는 313년 2월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협의한
정치조약의 결과였다.
동방교회는 313년 6월 리키니우스에 의해 선포된 이 포고령에서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그리스도교도에게 법적 권리(교회를 조직할 권리도 포함)를 보장해주며, 몰수한
재산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신속히 돌려주도록 지시했다.
이전에 내렸던 여러 칙령들은 그것을 선포했던 역대 정권들만큼 단명했으나,
이 밀라노 칙령은 종교 관용을 제도적으로 확립했다.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성베드로 성당 내부에 베드로 제단 우측 중앙에 십자가를 든 헬레나가 보인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받치는 남서쪽 기둥의 벽감에 있는 성 헬레나
의 5m 높이 조각상 벽감 윗부분과 조각상 기단부에 각각 라틴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
PARTEM·CRVCIS·QVAM·HELENA·IMPERATRIX·IN·VRBEM·AVEXITVRBANVS
·VIII·PONT·MAX·E·SESSORIANA·BASILICA·DESVMPTAMADDITIS·ARA·
ET·STAVA
HIC·IN·VATICANO·CONDITOLLOCAVI
(헬레나 황후가 갈바리에서 로마로 가져온 십자가의
부분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산타 그로체 인 제루살렘메
성당에서 이곳 바티칸 성유물함으로 옮겨 제대와 성상을 추가하였다)
조각상 기단부에는
SANCTA HELENA AVGVSTA
(성녀 헬레나 황후) 라 새겨져 있다
로마시대 헬레나가 부조된 동전
이석관은 그리스 십자가의 방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의 석관이다 전투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성 헬레나의 석관은 4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로마의 병사들이
야만족을 물리치는 모습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래 토르 티나타라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콘스탄티누스 데제의 딸인 콘스탄티나의
석관도 같이있다. 헬레나의 석관에는 전쟁부조가 콘스탄티나의
석관에는 포도수확의 부조가 있다
콘스탄티나의 석관은 4세기에 만들어 졌으며 로마인들이 숭배하는 포도주의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칠 포도주를 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해 놓았다 한다
로마 노멘타나 길에 위치한 성녀 크스탄자 성당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석관 밑 받침대 사자상
석관앞 바닥에 있는 것은 365일 여성의 건강을 기원하는 천연대리석 모자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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