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스페인내전 당시 시민학살 흔적
스페인 여행에서 자주 대하게 되는 것은
내전에 대한 상처였다 바르셀로나 성당뒤로
벽에 세워놓고 수많은 시민을 총살할 때
패인 총상이 벽에 고스란이 남아 그때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피카소의 벽화
아쉬운 점은 페키지여행 일정의 타이트한 스케줄
때문에 스페인의 거장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
하지 못한 것이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너무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그림의 모티브가 된 게르니카 폭격사건은 1937년 4월26일
스페인 내전당시 인민전선(공화군)의 세력권에 있던 바스크지방
의 소도시 게르니카가 나치독일 콘도르 사단장 괴링의 폭격부대가
무차별 폭격으로 도시인구의 ⅓에 달하는 1654명의 사상자와
88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참사로 이 폭격사건의 주된 목적은
독일의 신무기 성능시험과
게르니카에 주둔한 공화파 군대의 이동을 차단하기 위하여
교량 파괴가 목적이었다 대부분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들이
죄없이 죽었다
축소된 2차대전과 같다고 하는 이 전쟁은 3년에 걸처 이어졌고
스페인은 페허로 편했다 이후 승리한 프랑코는 50년간 군부독제를
하였다
Basque, Guernica 바스크 지방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당시 게르니카의 참상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는 마침 시장이 열려 한참 붐비고
있었다 파시스트 프랑코파를 지원했던 독일 공군이 43대의
폭격기로 소이탄 고성능 폭탄으로 3시간동안 폭격의 결과는
말 할 수 없이 참혹하였다
그와중에도 의사당(1824-33) 재판소.산타마리아안티과 성당
같은 유명건물이 남아있다
게르니카 시의 피카소 작품 노천전시
바스크의사당(Casa de Juntas)
바스크인들의 정신적인 성지였던 게르니카에는
자치권을 가지고 바스크 의회가 열리고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하던 의사당이다
의사당 내부 참나무 천장화
스페인 북부 바스크지방의 바스카야주 빌바오 북동족에
있는 도시 비스카야(비스케이)만 입구 근처에 있는 플렌시아
강 유역에 위치한 이 도시는 과거 바스카야 왕조의 법률상
수도로 바스크족에게는 신성한 곳이다
고대 바스크지방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참나무는
도시 중심부 의사당 옆에 위치해 있다
1937년 폭격으로 참나무거목은 죽고 나무의 그루터기만 남아있다
이 참나무는 1000년이 넘었다는 오래된 나무로
이나무아래서 바스크 민족지도자들이 모여 국가의
주요현안에 대해 논의했고 바스크 자주 독립을 맹세했다
중요한 참나무 DNA 체취를 통해 어린 참나무가
옆에 같이 심겨져 있다
이도시의 상징은 “게르니카나무”라고 하는 오래된 참나무로
그 나무 아래서 바스카야 의회를 열어 국방 정책을 결정하고
“푸에로”라는 특권에 대한 왕의 보증을 받아냈다
이러한 전통은 중세에서 시작하여 19세기 가지 계속되었다
1366년 델로 백작은 게르니카를루노 지역에 둘러싸인
자치령으로 편성했고 이러한 지위는 1882년 루노와 통합되어
자치주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세기에 돈 카롤로스가와 왕위계승 전쟁을 치루었던 게르니카는
1932년 바스크 독립국을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프랑코를 반대했던 행동주의 작가들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의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게르니카의 대량학살에 격노한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리게
되었는데
피카소는 프랑코의 미움을 사서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남유럽으로 돌아왔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스페인이 민주화 되기 전에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에 걸수 없다”
고 했으며 프랑코가 사망후 1981년 피카소 탄생 100주년이 되어서야
이 걸작은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현재 마드리드 왕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타에 소장되어있다
일화에 따르면 나치의 파리점령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렸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대한 피카소의 답은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라고 했다한다
이그림은 349×775cm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작품으로 때문에
피카소는 붓이 아니라 롤로로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의 한국전쟁 (Pablo Ruiz Picasso Korea War)
피카소의 어록
에술은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적들을 막아내는 공격적인 무기입니다
1943년 3월24일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년7월21일 미국 시카고에서 출생하였다
1차대전 1918년 적십자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북부
호시루타 전선에 엠불란스 기사로 지원입대 하여
중상을 입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한 “무기여 잘있거라“
를 펴냈다
전후 카나다 토론토 스타지의 프리렌서 기자가
되어 파리 특파원으로 가서 거트루드 스타인 등과 사귀어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행동파 작가로 스페인 내전때 파시스트 프랑코에 반대
하여 참전하였다 1차대전도 적극 참전하고 스페인 내란때도
참전한 그의 경험으로 대표적 작품 무기여 잘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발표하였는데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 말살을 잘그리고 있다
두 작품의 상반된 성격은 무기여 잘있거라는 주인공이
탈영을 하므로 해서 현실 도피의 비극은 배우자의 죽음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애인과 동료들을 피신
시키며 자신은 산화해가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로 배우자를
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누구를위하여 종을울리나“는 어니스트 훼밍웨이의
장편 소설로 스페인 내전을 무대로 “로버트 조오던”과
“마리아”의 사랑을 그린다 제목은 17세기 영국 성공회
성직자인 존턴(John Donne)신부가 쓴 시의 구절을 인용하였다
1939년 3월 이작품을 쓰기시작하여 다음해 1940년 발표하였다
1943년에 게리쿠퍼와 잉그리 버그만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반파시스트 군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로버트 조던(게리쿠퍼분)은 작전상 중요한
교량을 폭파하는 임무를 짊어지고 파블로가 이끄는 게릴라 부대에 협조를 요청하는데
게릴라 부대에 숨어있던 부모를 살해당한 딸 마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곧 그는 작전을 추진 주에 적의 작전이 바뀌어 자신의 임무이던 교량의 폭파가
무의미해질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연락이 되지 않아 작전을 중단되지 않았고
쓸모없는줄 알면서도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완수하였다
그러나 중상을 입고 같이 죽겠다고 울부짖는 마리아를 말에 태워 밧줄로 묶은다음
말을 채찍질해 멀리 피신시키고 자신은 기관총으로 애인을 추격하는 적을 맞아
장렬히 죽어가는 마지막 씬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떤이의 죽음도 나 자신의 소모려니 그건 나도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에
그러니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훼밍웨이의 명언
기회는 자기를 웃게 만들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미소를 보내는 숙녀다 쇠가 달아 있을때에 두두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보다 좋은 것은 쇠를 두들겨서 달구는
것이다 에네스트 –훼밍웨이-
나는 이제까지 땅을 사랑해 왔다 언제나 인간보다 좋은 것이다
인간은 일시적으로 겨우 소수의 사람들밖에 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헤밍웨이-
For Whom the Bell Tolls 1943 Adventure | 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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