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14일 목요일
제르니모스 수도원 (Jerõnimos monastery)
우리는 호시우 광장에서 제로니모스 수도원으로 이동하였다
수도원은 기독 교인이 아니더라도 경외심을 가지게 되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장엄한 분위를 보여준다.
수도원 앞 녹지엔 소철이 꽃을 피웠다
마뉴엘 고딕양식은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좌우측에 석관이 있다
우측의 석관은 “루이스 바스드 카몽이스”의 석관이고
좌측은 “바스쿠다 가마”의 석관이있었다
그리고 제단밑에는 히브리어를 라틴어 성경으로 번역한 성 제르니모의
형상이 누운 채로 있었다
마뉴엘 양식의 밧줄 꼬인 기둥에 손을 대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가이드의 말에 모두 기둥에 손을 대고 있었다
스테인드 글라스가 화려 하고
특이한 양식인 만큼 외관의 장식도 재미 있었는데
현재의 구조는 1500년대 지어졌다 이것은 포루투칼 특유의 고딕 양식으로
인도와 포르투칼의 수익성 향신료 무역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원래 이름은 하이에로니미데스(Hieronymites)였다
수도원은 16세기 마뉴엘1세의 의뢰로 산타 마리아 예배당 자리에
세워졌다
산타마리아 예배당은 마뉴엘1세 조상인 항해왕 엔리케의 명령으로
세워 졌으며 당시 뱃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포르투칼 왕실의 묘비로 사용하려고 지었으나 훗날 탐험가 바스쿠다가마 가
인도에서 귀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바스쿠다가마는 출정항해에 앞서 이곳에 와서 기도 하였다 한다
인근에 위치한 벨랭탑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제르니모 성당 앞의 마차
정문으로 들어가는 횡단도보
정문
수도원 전경
제르니모스 수도원앞 공원
제로니모스 수도원의 피사드(facade)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 구조
성베드로의 열쇄를 든 모습과 성 바울이 책과 칼을 들고 있는 조각상
16세기 포르투칼 전성기를 이끈 마누엘1세(재위1495-1521)는
성모와 제로니모성인을 기리던 엔히크왕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항로 무역에서 거둔 5%의 관세를 재원으로
하였는데 연간 황금70kg에 달했다 한다.
후기 고딕의 마누엘 양식으로 지어진 수도원은 1501년 1월 착공
100년뒤에 완공되었다 디오고 드 보이타카(Diogo de Boitaca)
가 처음 설계하고 후안 데 카스탈루(Juan de Castiho)가
이어서 건축을 맏았다
마뉴엘 양식
마뉴엘 양식은 포르투칼에서 15-16세기에 걸처 발달한 특이한 후기
고딕 양식으로 당시 국왕 마누엘(Manuel) 1세의
이름을 따서 “마뉴엘 양식” 이라불리고 있다
세부적인 장식의 소재로서 배와 항해 용구 진취한
영대의 동식물 등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굵은 로프를 꼰 듯한 돌기둥의 조각도 그 특징의 하나다
마뉴엘 양식은 장식예술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리상의 발견당시의 포르투칼의 사회상과 인물들이 지녔던
모험과 도전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 등을 잘 들어 내는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는 양식이다
미뉴엘 양식의 걸작들
제르니모스 수도원 내부 회랑
매우 정교한 기둥으로 떠받친 거대한 삼심 아치 너머로 안뜰이 보인다
회랑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하고 세련되며 지나치게 많은 장식은 포르투칼 고딕
말기 또는 르네상스 초기 예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성 제로니모(St.Jeronimos)
5세기 이탈리아 성인으로 성서를 처음으로 그리스어(히브리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성인 이다
루이스 바스드 카몽이스( Luis Vaz de Camões 1524-1580) 포르투칼 국민시인
루이스 바스드 카몽이스( Luis Vaz de Camões 1524-1580)
포르투칼 국민시인 석관
포르투칼 국민시인 으로 기념비적인 리스본의 동상까지 있는 그가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우스 루이아다스)로서 제명은 이베리아의
서쪽에 살았던 주신(酒神) 바쿠스의 아들이라고 하는 루조의 자손인
루지다니아 사람 즉 포르투칼 사람 이라는 뜻이다
인도 항로를 발견과 바스쿠 다 가바의 첫 번째 원정을 측으로한
극적인 줄거리를 부각시켜 포르투칼의 역사와 신화를 엮어 그 영웅적
위업을 높이 찬양하는 애국적 대서시로 포르투칼의 위대함과 작자의 애국심을
그려낸 희극으로 포르투칼 국민들의 존경의 인물이다 그는 단명하였는데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았고 과부인 그의어머니가 그의 사후 연금을
인수하였다 한다
리스본의 국민시인 동상
1880년 성당으로 옮겨진 바스쿠다가바와 루이스 바스드 카이몽스
두사람의 석관은 당시 유명한 조각가 “코스타모타”가
신 마누엘양식으로 조각한 것이다
성당 출입문을 들어서 오른쪽이 루이스 바스드 카이몽스 의 석관이고
왼쪽이 바스쿠다마스의 석관이다
바스쿠다 가마((Vasco da Gama)의 석관
바스쿠다 가마((Vasco da Gama)의 석관 의 문양
바스쿠다 가마(1469-1524)는 포르투칼에 副를 안겨준 항해자이며 탐험가로
1497-99년 1502-03년 1524년 3차례에 걸처 인도를 항해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해안을 거처 인도까지 항해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때때로 인도까지의 항로를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인도 항로의 개척으로 인해 포르투칼 해상 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바스쿠다 가마((Vasco da G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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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쿠다 가마((Vasco da Gama)의의 3차 항로
바스코 다 가마는,1497년에 그의첫항해에 4배와 포르투갈을 떠나
희망봉을 반올림과 아프리카 해안을 여행했다.
그는 따뜻하게 환영 받아 1498년 5 월 에캘리컷,
인도의무역항구에 도착하지만
영구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성모성당
성모성당에 들어서면 높다란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기하학적인 천장 조각에 압도된다
성당을 지을 무렵 포르투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야자수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포르투칼을 스페인에 통합시킨 필리페3세가 1604년
제로니모스 수도원을 왕가의 묘소로 사용하도록 한이래
포르투칼 왕실이 나라를 되찾은 다음에도 성모성당은
왕실의 묘소로 사용 하였다
기둥을 만지며 소원을 비는 보석
스테인드 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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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채 플로얄 무덤.각각의석관은 이코끼리에 의해 받처져 있다
가이드의 설명을 경청
코가? 로칼 가이드와 함께
무더위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친우 춘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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