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루투갈여행

벨렝탑 주변(포르투칼여행3부)

훼브스 2020. 7. 25. 15:32

 

2016년 7월 14일 목요일

 

벨렝탑 (Torre de Belem)

 

 

 

 

 

제르모스 성당과 같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벨렘 탑으로 향했다 탑은 강 하구로 넓은 잔디밭

위에 유도화가 아름답게 피고 젊은이 들은 그림같이

누워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유도화는 강력한 독성 때문에 독나무라

불리기도 한다독성의 위력은 청산가리 독성의 6천 배이며

섭취할 경우 구토 복통 설사 증세를 보이며 심할 경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또한 나무를 태운 연기를 흡입하여도

치명적이므로 주의해야 되는데 해충을 방지 한다 하여

포르투칼이나 스페인 유적지 마다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에

어김없이 피어있었다

 

 

 

 

11

5세기 후반에 존세는 강 남쪽에 Caparica에서 카스

카이스와 상 세바스티앙(또는 토레 벨하)의 요새에 의존

구스의 입구에 대한 방어 시스템을 설계하였다

이들 요새는 완전히 강의 입구를 보호하지 못했고

또한 보호가 필요하였다

 

왕 마누엘에 의해 명령받고 건설을위한 자재 763 리오즈

블록과 504개 의 돌을 처음 받기 시작 로드리게스

프로젝트에 대한

재무를 뒷받침 받아 큰 목선 군함이 1000톤의 선박이

요새가 완공 될 때 까지 구스의 입구에서 하구를 보호하는

것을 계속하였다

.

 

 

 

 

 

 

리스본의 수호성인을 그려 세인트 빈센트 탑이라고도

부르는 벨렘탑 (Torre de Belem)1515

마뉴엘1세의 하명으로 군사건축가 프란시스코데 이루다

(Franciseo de Belem)의 설계로 짖기 시작하여

마누엘 사망전 1519년에 완공되었다

15세기 초반 주앙2세 시절부터 리스본을 방어하기

위하여 태주강 어구에 요새를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

가 있었다 한다

 

 

 

 

 

지금은 12m 폭에 30m 높이의 벨렘탑이 태주강 북쪽

강가에 붙어 있지만 건설 당시에는 태주강 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 세워졌는데 1755년 리스본을 강타한 대 지진

의 영향으로 흐름이 바뀌면서 섬이 강가에 가까워 졌고

벨렘탑은 테주강과 대서양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6각형의 보류와 직사각형의 4층탑으로 구성되는 벨렘탑은

리오즈(lioz)라고 부르는 연한 베이지색의 석회석을

상용하여 포르투칼 특유의 후기 고딕인 마누엘양식으로

건축되었다

 

 

 

하부 보루의 난간에는 강 쪽으로 17문의 대포를 거치 할 수

있었다

 

 

 

1층에는 지사의방(Sala do Governador)으로 불리는

8각형의 방이 수조로 연결되고 북동쪽과 북서쪽 구석으로는

망루로 연결되는 통로가 나있다

 

 

 

2층에 있는 왕의방(Kings Hall)

은 강을 내려다 볼수 있도록 한쪽 벽만 있는 통로로 연결되며

구석에 있는 벽난로는 3층에 있는

청중의방(Sala das Audiencias)으로 연결되었다

 

 

 

4층에는 아치형 천장이 있는 교회가 있다

1580년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패한 다음 벨렘탑은 1830

까지 감옥으로 이용되었는데 이곳 1층에 갇힌 죄수들은

하루 두 차례 민물이 들어올 때마다 바닷물에 잠기지 않기

위하여 안가힘을 써야하는 끔찍한 곳이 었다 한다

1655년에는 태주강으로 들어오는 배로부터 세금을 받는

세관과 배들이 태주강을 항해 할 수 있도록 도항을 지원하는

기능이 추가 되었다.

 

 

 

 

 

 

 

 

 

 

 

 

 

 

 

 

 

 

1922년 이곳을 이륙해서 수상비행기로는 처음 대서양을

횡단 행던 비행기

벨렘탑 옆으로 리스본을 출발해서 남미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까지 처음 횡단 비행에 성공한 쌍엽 경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다

 

 

 

벨렘탑 주변 입체도

 

 

발견 기념비옆에 정박중인 요트들

 

요트는 아무래도 를 상징한다

리스본 항구에서 보는 요트는 많은 량이

계류되어 있다 옛날 해상 왕국의 상징이 랄까?

 

 

발견기념비(Padrao Descobrimentos)

 

 

강을 보며 좌측으로 조금 더가면

발견기념비(Padrao Descobrimentos)가 우뚝서있다

바스쿠다가마가 황해를 떠난 자리에 세워졌다는 이 기념비는

1960년 엔케리 항해왕 사후 500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53m 이다

항해중인 범선 모양을 한 이 기념비는 수많은 인물 조각상이

줄지어 서있다 맨 앞 뱃머리에 서 있는 사람이 앤리케 항해왕이고

그 뒤에는 신천지 발견에 공이 큰 모험가 천문학자

선교사 등이 따르고 있다

 

 

기념비 동쪽면

 

바람을 가득 안은 돛을 단 갈리온선의 선두에는

엔히크 왕자가 서있고 그뒤로는 동쪽과 서족의 경사면을

따라서 각각16명씩 대 탐험을 대표하는 군주.탐험가.지도제작자.

예술가.과학자 그리고 선교사 들이 석회석으로 조각되어 있다

 

바스쿠다가마는 동쪽에 있는데 선두에 있는 엔히크 왕자의

뒤로 두 번째로 위치하고 있고 처음으로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은 엔리크 왕자 뒤로 다섯 번째 위치에 있다

 

발견 기념비 서쪽면

 

 

맨앞이 엔리크 왕자이고 모험가 천문학자 선교사가

따르고 포르투칼 국민시인 루이스 바스드 카몽이스

( Luis Vaz de Camões 1524-1580)

 엔리크왕자 뒤로 여섯 번째 위치한다

 

 

 

엔히크 왕자는 포르투칼 아비스 왕가의 왕자(Infante)이며

초창기 포르투칼 제국의 주요 인물이다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나가는 항해로를 개척한는 것을

지원하였다

포르투에서 아비스 왕가 시조 포르투칼 주앙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Infante) 라는 단어는 왕위계승자가 아닌 귀족

을 말하는 것이다 1415년 북아프리카의 회교도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으며 1418년 이후 아프리카 서안에 많은 탐험선을

보내 항로를 개척하였다 세인트 빈센트 곶에 천문대와

항해 연구소를 세웠으며 탐험 항해가들을 파견하여

마두라 보자도르 곶. 베르데 곶 등에 닿게 하였다

1446년에는 북위 약15°에 있는 감비아 강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으로 인도 항로를 발견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형의 손자인 중앙2세 때

1481년 포르투칼이 식민지를 크케 확장하게 되는 기반을

다졌다

엔히크가 보낸 항해가들은 북아프리카 연안 대서양에서

마데일 제도 아소르소 제도 등을 발견하였다

 

비제우 대공 동 엔히크 왕자(Infante Dom Henrique Duque de Viseu) 동상

 

 

벨렝 지구 바스쿠다 가마 의 동상

 

바스쿠다 가마(1469-1524)는 포르투칼에 를 안겨준 항해자이며 탐험가로

1497-991502-0315243차례에 걸처 인도를 항해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해안을 거처 인도까지 항해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때때로 인도까지의 항로를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인도 항로의 개척으로 인해 포르투칼 해상 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바스쿠다가마가  출정때 마다 벨렝탑에서

출정의식을 치루었다 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씁쓸한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사실을 바탕한 영화 미션이 생각나서다

기독교인들의 아집으로 원주민 대학살의 만행을

그린 영화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새로운 영토 분계선에 따라 과라니족의 마을은

무신론의 포루투갈 식민지로 편입되고,

불응하는 관라니족과 일부 신부들을 설득하려는 추기경이 파견되지만 결과는

포루투갈 군대와 맞서 싸운 과라니족의 전멸로 끝난다

 

중재라기 보다는 예수회 신부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교황청에서

파견되었던 주교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쓴다

 

그리하여... 신부들은 죽고, 저만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나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노예 무역도 이때 부터 이루어 졌으니 한쪽은 위대한 정복자 였으나

피 정복민은 그야말로 최악을 맞이 하였다

 

영화 미션에서 원주민 학살을 주문하는 주교는 그들은  영이없는 

짐승으로 단정한다

 

 

 

 

 

 

4.25다리 (Cristo-Rei, with 25 April Bridge).

 

 

1962년 착공하여 4년만에 준공된 이다리(유럽에세

17번째 긴 현수교)의 상판에는 자동차가 그리고

하단에는 기차가 다닌다 처음에는 Salazar Brirdge

불렀으나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이후 독재자로 찍힌

Salazer 의 이름이 떨어진 대신 혁명 기념일 425

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다리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와 똑 같은데

금문교 설계자가 똑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태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길이는 2.3km 이다

 

 

 

 

 

오른편 강건너 언덕(Almada)위에는 두팔을 벌린 예수상이

높이 82.60m 양팔간격 28m 1959년에 준공되어

서있는데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 브라질 리오 데자이네로 상징물인

구원의 예수상(1931)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라 한다

 

 

브라질 리오데자이네로의 구원의 예수상

 

LISBON AQUEDUCT

An indestructible feat of engineering

리스본말라 공학의불멸의업적

 

리스본을 지날 때 차창밖으로 긴 水橋

보였다 터키에서도 보았던 것이라

내가 탄성하며 로마의 수로가 아닌가?

외쳤더니 가이드가 아니라한다

 

 

 

(포르투칼 주앙5(페두르2세아들)

 

리스본 도시를 처음으로 깨끗한 물을 공급하게 된 것은 1756

주앙5(페드루2세아들)때 완공 되었다

이 놀라운 水橋는 빌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109돌 아치로

구성되어 있다

총길이는 58km(150.36마일)이지만 가장 눈에 띄는 부분과 지상에서

극적으로 65m(213피드)로 상승 가장 높은 알칸다리벨리(최고의 전망이

Campolide 기차역에서 이다) 29m 범위는 대단하게도

1755년  대 지진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