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우공이산 태항산의기적(중국여행55부)

훼브스 2020. 7. 29. 19:41

 

 

몇몇 사진은 외국 싸이트에서 빌려온것입니다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 맨손으로

일군 태항산(太行山)궈량동(郭亮洞)

 

세계 9대 불가사의'라 일컬어지는 인공 터널

'궈량동(郭亮洞)'이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궈량춘에서 외부와 통하는 길은 오직 협곡과 절벽

위를 이어주는 '천제(天梯)' 뿐이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오르내리는 것도

너무 위험했다.

1971년 가을, 마을 서기였던 선밍신(申明信)

제의로 선신푸(申新福), 왕휘이당(王懷堂),

선푸구이(申福貴) 등이 밧줄을 사용해 절벽의

높이와 거리를 측정했고 전통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상급기관의 전문가에게 터널 공사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마을 사람들도 인공 터널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자발적으로 산양, 약초 등을 내다 팔아 해

, 정 등 돌 깨는 장비를 구입했다. 전기도 없고,

기계도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13명의 동굴 굴착 돌격대를 조직했다.

허리에 줄을 감고 절벽에 매달려 정으로

돌을 깨 홍암절벽 곳곳에 일렬로 발파구를 만들었다.

13명의 청년들은 궈량춘의 유일한 절벽 길인 '천제'

아래 모여 반드시 절벽을 뚫어 길을 내겠다고

다짐하고 197239일 본격적인

터널 공사에 들어갔다

궈량춘은 해발 고도가 높고, 경작지가 적고,

농사가 가능한 서리 없는 날도 짧았다.

1년에 단 한번 농작물을 파종해 살아가는

가난한 곳이

이런 상황에서 '13인의 돌격대'0.2 위안의

식비로 모두가 버텨야 했다

강냉이로 만든 죽, , 찜이 하루 세끼의 전부였다.

매일 한 사람에게 배당한

옥수수가 두근 밖에 되지 않았다.

1975년 말, 공사는 가장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에겐 더 이상 내다 팔 산양도,

나무도 없었다. 식량도 떨어졌다.

어느 곳을 찾아봐도 동전 한 닢 나올 곳이 없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하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팔을 걷고 나섰다

새벽 5시에 일어나 5km의 산길을 올라가

두더지처럼 구멍을 파고 또 팠다.

마을 서기에겐 도화선과 폭약 등 굴착

장비를 빨리 구해오라고 다그쳤다. 

궈량춘 절벽의 평균 높이는 약 105m.

절벽 중간에서 발파 작업을 하려면 밧줄이

필요했지만 이를 살 돈이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자

집집마다 소의 고삐를 풀어와 하나 하나 이어서

밧줄을 만들었다.

공사 인부로 나선 청년들은 목숨을 건 열정으로

절벽의 도랑을 길로 바꿔 놓았다.

궈량춘 사람들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5년 동안

거대한 절벽에서

26000의 돌덩어리를 캐냈고, 12톤을

마모시켰고, 8파운드짜리

쇠추 4000개를 소모했다

 

천길만길 협곡을 이어주는 투명 다리  

70세의 노인부터 10대의 소녀까지 공사에 참여해

하다못해 돌가루를 실어 나를 정도였다.

커다란 돌덩어리는 손으로 들어서 옮기고, 작은 것은

광주리나 바구니에 담아 어깨나 머리에 걸쳐 운반했다.  

손가락마다 피가 터지기 일쑤였다

가장 힘든 공정 때는 현 교육국의 전문가

100여명이 위엔융(原永) 국장과 함께

공사 현장에 합류, 빠른 진행에 힘이 돼 주었다.  

마침내 197751절벽장랑(絶壁長廊)’이라

불리는 궈량 터널은 왕후이당 등 희생자들을 남기고

공식 개통됐다.

궈량동은 절벽을 횡으로 1.25km나 뚫어나가면서

높이 5m, 4m로 만든 터널이다.

태항산 동쪽에 만든 '인공천하(人工天河)'

'홍치쥐(紅旗渠)'와 함께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실례이자 가난한

민초들이 일궈낸 '기적'으로 자리매김 했다.

궈량 터널에는 절벽 쪽으로 크고 작은 구멍

35개가 나있다. '천창(天窓)'이라 불리는 통풍구이고

채광창이자 전망대다.

공사 중에는 굴에서 캐낸 돌을 밖으로

내놓는 배출구 역할지 했다.

궈량춘에는 곽씨와 더불어 신씨들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원말 명초, 신씨 일가는 난징에서 관직을

맡고 있는 권세가였다.

그러나 주원장이 권력을 잡자 도읍의 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인적 청산'을 단행했다.

신씨 가문은 서역의 칭하이(靑海)로 쫓겨 갈

상황이 되자 산시로 도주했다.

수백여명의 일가 친척의 식사를 한꺼번에

만들 수 있는 커다란 가마솥을 쪼개 집집이 나눠줬다.

동서로 흩어졌다 훗날 다시 만나면  

원래대로 붙일 심산이었다. 그래서 '큰 가마솥

(大鍋申)'라 불린다.

당시 궈량춘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신씨들은

지금도 이 곳에 살고 있고,

  후손들이 바로 궈량동을 만드는데

앞장 선 사람들이다.

 

 

만선산 곽량촌의 노부부 내실에모셔진 모택동 사진

궈량촌에는 항일 전쟁 중에 팔로군 사령부가 있었고,  

산 아래는 리샹양(李向陽)이 이끄는 평원유격대

근거지였다.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태항산의 협곡을 끼고  

온갖 풍파를 이겨낸 궈량춘은 '중국 제일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 받고 있다.

셰전(謝晉)이 연출한 '청량사의 종소리(淸凉寺的鐘聲)'

40여편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태항산 일대에는 인간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 궈량 터널

외에도 5곳의 인공 터널이 더 있다.

쿤산(昆山) 터널, 시야(錫崖) 터널, 후이롱(回龍) 터널,  

징디(井底) 터널, 전쟈위안(陳家園) 터널 등이다

 

 

 

 

 

 

도화곡 구련폭포

 

 

 

 

 

태항대협곡 (太行山)  구련산의 천호폭포

 

 

 

 

 

아홉 개의 연꽃이 피어오르듯 아름다운 산이라하여

九蓮山 웅장하고 거대하다 깍아지른 절벽들이 자웅을

겨루며 버티고 있었다

 

 

 

 

 

 

천계산

 

 

 

 

 

 

 

 

 

 

 

 

 

 

 

 

 

 

 

 

 

 

 

 

 

 

九連瀑

 

 

 

 

 

 

二龍瀑(이룡희주)

 

 

 

 

 

 

 

 

 

 

 

 

 

도화곡(桃花谷) 풍경구

도화곡은 한겨울에도 복숭아꽃이 핀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한겨울에 피는

복숭아꽃, 한 여름에도 계곡에 어는 얼음덩이,

그리고 내리치면 돼지 울음소리를

내는 '저규(猪叫石)'은 도화곡의 3대 명물이다.

도화곡 입구에서 100m 가량 가면 황룡담이 있고,

배부른 듯한 석편암이 양쪽으로 배치되어,

그 사이로 하얀 실비단 같은 구연폭포(九連瀑布)

옥빛 못으로 흘러내린다. 황룡담에서 위쪽 바위

옆으로 빙 둘러쳐진 철계단을 따라 10여분 가량

올라 가면 10m 폭포와 못이나왔다  

도화원은 도연명(陶淵明: 365~427)'

도화원기(桃花源記)'와 안견(安堅)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등에

등장하여 속세에서 떨어진, 이상향을 상징한다.

송나라 시인 왕안석(王安石:1021~1086)

'도원행(桃源行)'은 전란을

피해 은거한 삶이 이상향임을 노래하고 있다.

 

 

 

 

 

 

 

 

 

 

 

 

 

 

 

 

 

 

 

 

 

 

 

 

 

수렴동 석순 과 천하폭포